귀환무관 109화
“으랏차차!”
황보정석이 대도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묵직한 쇳덩어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백서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애매하네.’
황보정석의 공격은 마음속의 최저기준치는 통과했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더 확실한 한 방이 되려면 지금보다 더 빠르고, 더 세고, 더 정교해야만 했다.
‘맞대응할까? 말까?’
황보정석이 폭류의 힘을 다룬다는 사실은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전이나 다름없는 지금.
자신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싸워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백서휘는 검을 뽑아 사선으로 휘둘렀다.
검의 목표는 황보정석이 들고 있는 대도였다.
있는 실력 그대로 펼치면 황보정석이 어떠한 수를 써도 자신의 공격을 막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백서휘는 일부러 대도를 목표로 삼았다.
황보정석은 백서휘의 배려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이 배려를 굴욕적으로 여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한 실력을 마음껏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쾌검의 무리가 담긴 검과 중도(重刀)의 무리가 섞인 검이 맞부딪혔다.
콰앙!
맞부딪히며 낸 굉음을 듣고 황보정석은 웃었다.
충격량이 크면 클수록 대도에 저장되는 폭류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약점 극복을 어떻게 했는지 볼까.’
백서휘는 히죽 웃으며 광풍번천의 초식을 펼쳤다.
광붕번천은 검을 빠른 속도로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계속 휘둘러 공간을 제압해 나가는 초식이었다.
이러한 초식의 특성 때문에 무겁고 커다란 무기를 든 자는 저항하기가 무지 힘들었다.
그때 황보정석이 대도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일도양단할 기세로 내리그었다.
‘공간 제압을 못 하도록 아예 짓눌러 버리겠다? 꽤 재밌게 대응하잖아?’
황보정석은 중도의 무리를 극대화해 견디기 힘든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제법이야.’
백서휘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확실히 이전보다 황보정석은 성장했다.
예전이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수법을 자신감 있게 던졌다.
처음에 느꼈던 실망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기준이 알면 어떤 생각을 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백서휘가 보기에 황보정석이 더 낫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제 끝날 때가 됐군.’
황보정석도 자신과 비슷하게 느꼈는지 폭류의 힘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백서휘는 기대에 부응한 황보정석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무초식을 보여줄까? 음…….’
아직 오르지 못한 곳에 뭐가 있는지 세심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지금 황보정석이 있는 곳에도 다양한 매력이 있다는 걸 체험시켜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무초식은 아직은 일러. 강검의 무리가 담긴 초식으로 대응하자.’
백서휘는 적당히 힘을 담아 회천만일의 초식을 펼쳤다.
황보정석은 대도에 담긴 폭류의 힘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앙!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굉음이 들리며 황보정석이 저 멀리 날아갔다.
“우웩! 흐흐흐흐흐!”
황보정석은 피를 토하면서도 컥컥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번 악록산행의 최대 수혜자는 독령을 얻은 내가 아니라 황보정석일지도 모르겠어.’
백서휘는 웃는 얼굴로 황보정석에게 다가가 손을 건넸다.
황보정석은 그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조금 전의 지도 대련으로 가르쳐 준 건 천만금이 있어도 배우지 못할 만큼 비싼 가르침이었다.
“우웩!”
“추궁과혈 해줄 테니까 가부좌 틀고 앉아.”
“괜찮습니다.”
“하산할 때 뒤처지면 나한테 뒤지게 맞을 수도 있는데도?”
“그러면 받아야죠. 하하!”
백서휘는 황보정석의 내상을 순식간에 치료해 주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인지 오룡단은 여전히 놀라워했다.
“자, 마지막 시험은 당기준과 제갈선우가 동시에 보는 시험이다.”
눈치 빠른 제갈선우는 어떤 시험을 보는지 대충 알아차렸다.
“숨은 당기준을 제가 찾아내는 시험입니까?”
“그래, 당기준이 일각 동안 악록산 내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 숨으면 네가 달이 뜨기 전까지 찾아내면 된다.”
“제가 당기준을 찾아내지 못하거나 당기준이 제게 들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유일하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시험을 통과 못 하면 벌칙 같은 게 있습니까?”
“그건 하산해서 장사에 돌아가면 알게 될 거다. 질문 더 있나?”
“없습니다.”
“그럼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하나!’라고 내가 외치면 그때부터 숨으러 가면 된다. 셋, 둘, 하나!”
당기준이 신법을 전력으로 펼쳐 자리를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일각이 지나길 기다렸다.
“제갈선우!”
“네!”
“이제 당기준을 찾으러 가도 좋다.”
“꼭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백서휘와 나머지 세 명의 오룡단원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선혜주란 여자애가 너 안 만나겠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포기 안 하면 어떡할 건데?”
“그냥 몰래 보고 뭐……. 그러겠죠.”
“납치하지 않고?”
“제가 많은 사람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다니긴 했어도 납치 같은 극악무도한 짓은 안 했어요.”
모용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행패를 부리고 두들겨 팬 건 극악무도한 일이 아니다?”
“……그, 극악무도한 짓까진 아니지 않을까요?”
“그건 선혜주란 여자애가 알아서 판단하겠지.”
모용진은 철없던 과거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단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제갈선우와 당기준이 백서휘와 나머지 오룡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제갈선우가 개선장군 같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걸어왔다면, 당기준은 평소 같은 무표정이 아니라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이걸 해가 떠 있는 거로 봐야 하나?”
“좀 어둑하긴 하지만 해 떠 있어. 봐봐. 저기 빛나고 있잖아.”
“그러네. 빛나고 있네. 그러면 제갈 형의 승리인가?”
“그렇지. 해가 질 때까지 숨어서 들키지 말아야 하는 거니까.”
“무슨 벌칙인지 궁금하네.”
황보정석과 모용진은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을 보면 내심 당기준이 지길 바랐었던 것 같았다.
‘남궁혁이 주 인격으로 나오는 게 아닌 이상, 오룡단 내 비호감 1순위는 당기준이니…….’
백서휘도 당기준보다는 제갈선우가 이기길 바랐다.
자신 앞에서마저 당기준이 재수 없게 굴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감이 쓸데없이 비대한 점이 걸려 그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길 바랐다.
‘오룡단 내에서 이제 최강자 대접받는 건 이제 끝이겠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려나? 끝까지 재수 없게 굴려나? 아니면 행동을 교정하려나?’
백서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제갈선우와 당기준을 맞이했다.
“어디서 찾았어?”
“바로 이 근처에 숨어 있더군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노린 것 같은데, 제 ‘일월안’ 앞에서는……. 하하!”
제갈선우는 일월안을 강조해 말했다.
비록 ‘안법’이지만 처음으로 당기준을 ‘무공’으로 이겼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럼 이제 시험 성적을 결산해 볼까?”
“당 형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 통과한 거 아니었어요?”
다시금 당기준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용진이나 남궁혁에게 밀렸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통과랑 별개로 성적이 있으니까.”
“아…….”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란 사실에 유의해라. 앞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
“그럼 지금 성적이 낮더라도 거기에 사로잡혀서 태업하면 안 되겠군요.”
“그래, 성적이 낮아도 그렇고 높아도 언젠가는 낮아질 수 있으니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성적을 부르겠다. 황보정석 최상! 제갈선우 상! 남궁혁 중! 모용진 하!”
다들 왁자지껄 떠들면서 좋아하고 있는데 당기준만 표정이 썩어 있었다.
“시험도 끝났고 결산도 마쳤으니 이제 악록산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저녁 식사 먹고 바로 장사로 가실 겁니까?”
“그건 고민 중이다.”
“그냥 내일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친 사람도 있고 치료받긴 했지만 내상을 입었던 사람도 있는데…….”
“좋아,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거다?”
“네!”
“식사하러 가자.”
백서휘가 앞장서서 식사와 수면을 해결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당기준은 생각이 많은지 제일 뒤에서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 * *
수련을 마친 백서휘와 오룡단이 장사로 돌아왔다.
그들의 옷차림은 추레했지만, 눈빛만은 밤하늘의 별처럼 형형했다.
“드디어! 집다운 집에서 자게 되겠네요!”
“그러게. 이제는 비 맞으면서 자지 않아도 되겠어.”
“더는 훈련 안 받아도 된다는 것도 좋아.”
오룡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눈치 없이 구는 모용진에게 갔다가 백서휘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백서휘의 입이 제발 열리지 않길 바랐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당분간은 ‘한 사람’을 제외하면 훈련이나 벌칙이 없을 예정이거든.”
한 사람이란 말에 오룡단의 시선이 당기준에게로 향했다.
백서휘가 그걸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두가 당기준이 힘든 일을 하게 되리란 걸 알아차렸다.
“다들 푹 쉬어라.”
“네.”
백서휘와 오룡단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잠들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감에 걸리는 느낌이 익숙해 바로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누나가 무슨 일이지?’
백서휘는 문을 열어 백은하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무슨 일이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뭔데? 얼마든지 물어봐.”
“……우리 언제까지 기숙사에 살아야 하는 거야?”
백은하가 백서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안 그래도 내일부터 그 문제를 알아보려고 했어. 저번에 출타했을 때 제갈세가한테 설계도를 의뢰했었거든.”
“제갈세가에 설계도를 의뢰했다고? 홍 대목장 쪽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는 기관진식을 설계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제갈세가에 의뢰했어.”
백은하는 백서휘가 집 문제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그럼 설계도는 언제 완성되는데?”
“지금 누나 바로 뒤에 있는 서랍 보여? 그 안에 설계도가 있어.”
“한번 봐도 돼?”
“얼마든지.”
백은하는 서랍에서 설계도를 꺼내 보기 시작했다.
원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하게 짜여 있어 뭐가 뭔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되게 복잡한 거라서 제갈세가에 의뢰했구나.”
“기관진식을 잘못 설계하면 생사람 잡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언제쯤 지을 거야?”
“내일 홍 씨 부자랑 우 노괴를 만나서 부탁을 한번 해볼게.”
“우 노괴? 아! 우 할아버지를 말하는 거구나. 그분도 목장이었어?”
“목장? 우 노괴가 자기에 대해서 말 안 했어?”
“그냥 소일거리 하던 노인이라고만 말씀하시던데…….”
“왜 숨겼는지는 모르겠는데, 우 노괴는 강호 제일의 대장장이야.”
“에이! 설마…….”
“진짜야.”
“강호 제일이면 한 사람 말고는 없잖아.”
“누나가 아는 그 사람 맞을 거야.”
“저, 정말로 우 할아버지가 화령철장이야?”
강호에 한 발 걸치고 있는 탓에 백은하는 우염상의 정체를 바로 알아봤다.
“응.”
백은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염상이 평소에 대장장이란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우 노괴한테 기관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 부탁할 거야.”
“진식은 어떻게 할 거야? 진식도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아?”
“아, 그걸 생각 못 했네.”
진식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설치할 때 진법의 전문가가 있어야 했다.
‘그냥 설계도대로 막 짓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진식의 전문가를 구하지? 아! 잠깐! 제갈선우가 있잖아?’
전투 때 오룡단에게 명령을 내리는 걸 보면 제갈선우는 진법에 꽤 정통해 보였다.
“진식의 전문가를 찾을 때까지 집은 못 짓는 거야?”
“아니, 누구한테 맡길지 생각났어.”
“누구?”
“제갈선우.”
이름을 듣자마자 백은하는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
“제갈선우가 제대로 못 하면 제갈세가에 요청하면 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비천응룡신법을 익힌 백서휘에게 장사와 융중산을 오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공사는 얼마나 걸릴까?”
“삽을 푸기 시작하면 인부들을 최대한 많이 고용할 거라 짓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다행이네.”
“다른 문제는 없어?”
“하나 있긴 한데…….”
“뭔데?”
“요즘 사범들 사이에서 학무관을 여는 일이 흐지부지된 거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어.”
“학무관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열 거니까 딴생각하지 말라고들 전해.”
“알았어.”
“이제 진짜 문제는 더 없는 거지?”
“없어.”
용건이 끝난 백은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백서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앞으로 지어질 집과 학무관에 대해 생각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