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01화
독령이 보낸 선발대와 자신이 주입한 내공의 덩치는 비슷했다.
‘없애면 좋고 못 없애도 더 큰 놈을 보내면 된다는 건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 어떤 의도로 보낸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제껏 싸웠던 적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버리는 패니 나도 진심으로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백서휘의 내공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 독령의 선발대를 들이받았다.
독령의 선발대는 공방 한번 가지지 않았는데 맥없이 흩어졌다.
백서휘는 제압당한 독령의 선발대를 당기준의 통제에 따르는 기운 쪽으로 보냈다.
당기준은 눈치껏 독령의 선발대를 잡아먹고 덩치를 키웠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제압해서 넘기면 당기준이 독령의 기운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겠는데?’
이후로 독령은 세 번 더 후발대를 보냈지만 모두 백서휘를 쫓아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갑자기 기운을 안 보내네. 이유가 뭐지? 내 내공을 없애려는 걸 포기하기라도 한 건가?’
독령은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겁을 먹어서 기운을 보내지 않는 건 아닐 터.
‘설마 본체가 나서려고?’
백서휘는 주입한 내공으로 독령의 본체를 유심히 살폈다.
독령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잠들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독령은 그냥 움직임을 멈춘 채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내공을 움직여 독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독령에 자극을 가해 기운을 보내게 할 속셈이었다.
‘어느 쪽을 찌르는 게 좋을까.’
아까야 독령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 곳이나 막 찔러도 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활동하는 상황인 만큼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자칫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주입한 내공이 독령에 먹힐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좀 가까워지자 독령이 갑작스럽게 공격해 들어왔다.
백서휘는 침착하게 내공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촤르르륵! 탁!
금빛 쇠사슬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독령이 움직이는 걸 제지했다.
백서휘는 주입한 내공의 이동을 멈추고 독령 쪽을 봤다.
‘뭐지?’
독령은 금빛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어찌나 촘촘히 감았는지 독령의 본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촤르륵! 탁탁!
독령은 목줄이 묶인 개처럼 위협할 뿐 직접적으로 다가와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제야 백서휘는 독령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 움직여서 공격할라 치면 어떠한 봉인술 같은 것이 작용해 독령의 본체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막은 모양이었다.
‘몸에서 떼어낸 작은 것들을 보내는 건 괜찮은데 본체는 못 움직이게 하는 것 같네.’
그때 금빛 쇠사슬 곳곳에 부적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부적의 일부는 까맣게 타들어가 금방이라도 재가 될 것 같았다.
‘봉인술 맞군. 근데 효과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백서휘는 기감을 한계까지 높인 상태에서 주입한 내공으로 봉인술의 상태를 확인했다.
봉인술은 지금도 계속해서 쇠하고 있었다.
독령이 난동을 부릴수록 약해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이 기세로 가면 봉인술은 석 달 안에 풀리게 된다.’
머릿속에 ‘위기’란 단어가 떠올랐다.
‘당기준을 죽여야 하나?’
백서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에 보니 봉인술은 당기준의 내공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죽어서 내공을 공급할 수 없게 되면 그대로 독령이 풀려나게 되고 그 일대는 죽음의 대지가 될 것이다.
백서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해야 할지 정해진 건 없지만, 확실한 거 한 가지는 있었다.
당기준을 사람들이 사는 도시 안에 들어가게 두면 안 된다는 거였다.
‘악록산에서 계속 있어야겠군.’
백서휘는 내공을 주입한 걸 장심을 통해 회수했다.
그가 눈을 뜨기 무섭게 당기준이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그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말하는 거지?”
“독령이 보낸 기운들을 제압하는 방법 말입니다.”
백서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말을 해준다고 이놈이 깨달을 수 있을까? 나조차도 지금의 경지에 오르면서 알게 된 건데?’
백서휘의 내공이 독령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기운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백서휘의 내공은 ‘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독령보다 정순했다.
거기다 극한까지 압축되어 있어 같은 덩치를 가지고 있어도 기운의 밀도 면에서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내공을 최대한 정순하게 만들고 그걸 극한까지 압축한다. 이러면 기운 싸움에선 절대 질 일이 없지.”
백서휘는 지금 한 말이 당기준이 앞으로 갈 길의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것만 하면 독령을 제압할 수 있는 겁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백서휘는 당기준에게 독령의 상태와 약화된 봉인술 등에 대해 모두 알려주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조용히 죽는 날만 기다리는 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어떤 식으로 해결하실 건지 궁금합니다.”
“지금 떠오르는 건 두 가지 정도야. 하나는 내 도움을 받으면서 네가 독령을 제압해 통제권을 확보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너와 함께 독령을 제거한 후에 남은 독기만 네가 흡수하는 거. 참고로 두 가지 다 쉬운 방법은 아니야. 위험하기도 하고.”
“어느 쪽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독령을 제압해 통제권을 확보하는 게 100쯤 위험하다면, 그냥 독령을 제거하는 쪽은 10쯤 위험해.”
당기준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백서휘가 주입한 내공과 독령이 보낸 기운의 싸움을 봐서일까?
힘으로 독령의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것이 당기준에겐 굉장히 아득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역시 안전한 쪽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바로 선택해도 되겠어?”
“둘 중 안전한 쪽으로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독령의 통제권을 확보하면 네가 훨씬 강해지는 데도?”
“어려운 적과 싸운 경험이 있으면 확실히 강해지겠지만…….”
“아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영성을 가진 내공은 네게 도움이 될 만한 판단을 스스로 빠르게 내려 전투를 도울 수 있어. 그래, 집에 불이 났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고. 우물의 두레박을 내려서 물을 푼 후에, 다시 그걸 들고 집으로 가 끼얹는 거보다는, 미리 준비되어 있는 물을 가져다가 끼얹는 게 당연히 더 빠르지 않겠어? 그리고…….”
백서휘는 영성을 가진 내공이 전투를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는지 말해주었다.
“확실히 포기하기엔 아깝긴 한 것 같습니다만…….”
“아직 석 달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
“알겠습니다.”
“돌아가자.”
“네.”
백서휘는 당기준과 함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황보정석과 제갈선우, 모용진, 남궁민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설명했던 대로 훈련을 시작해!”
모용진과 제갈선우는 전력으로 뛰어서 악록산을 오르내렸다.
황보정석은 무쇠 팔찌와 발찌를 찬 상태로 보법과 도법을 수련했다.
“저는 뭘 합니까?”
“둘 중 어떤 걸 선택하든 기에 대한 통제력이 필요해. 그러니 통제력을 길러라.”
“알겠습니다.”
당기준은 한쪽 구석으로 가 백서휘가 알려준 대로 기운을 더 좋게 만들었다.
“남궁민! 준비는 언제 끝나지?”
“지, 진짜 관주님이랑 대련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
“백 번을 하면 백 번 다 제가 질 텐데 할 이유가…….”
“네가 지니까 대련을 하는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남궁민은 백서휘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시간 없다. 빨리 검 들어.”
“네.”
“덤벼.”
남궁민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검첨을 겨눈 채 가만히 있었다.
자세야 긴장했으니 딱딱할 수 있다고 쳐도 검첨이 흔들리는 건 문제가 좀 심했다.
‘다른 인격을 불러야 하나.’
전투만이 아니라 힘을 쓸 일이 있을 때 나서는 건 남궁민의 다른 인격인 남궁혁이었다.
‘이놈을 가르쳐 봐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좋아, 부르자.’
남궁혁을 부르려면 남궁민이 강렬한 감정을 느끼거나 기절해야만 했다.
전자가 어려웠던 백서휘는 남궁민의 훈혈을 짚기로 마음먹었다.
“안 덤벼? 그럼 내가 간다?”
백서휘는 남궁민의 수준을 고려해 구천현현보를 설렁설렁 밟았다.
남궁민은 백서휘에게 집중한 채 검을 쥔 양손에 힘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휙!
백서휘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당황한 남궁민은 좌우를 번갈아 보며 백서휘를 찾았다.
“눈 똑바로 안 뜨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궁민이 황급히 몸을 반전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남궁민은 아무런 손맛도 느껴지지 못하자 사방팔방에 검을 휘둘렀다.
백서휘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멍청한!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바람에 남궁민은 자신에게 빈틈을 있는 대로 다 보여줬다.
‘빨리 기절시켜서 남궁혁을 불러와야겠어.’
백서휘는 공격 사이에 생기는 틈을 이용해 남궁민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탁!
손가락을 살짝 대었을 뿐인데 남궁민이 스르륵 쓰러졌다.
잠시 후, 남궁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검을 어깨에 걸쳤다.
이쪽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고, 입은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묘하게 다른 분위기.
인격이 남궁민에서 ‘남궁혁’으로 확실하게 교체된 모양이었다.
바라던 바였기에 백서휘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과는 다를 거니까 제 공격에 놀라지나 마십시오!”
남궁혁이 우하단으로 검을 늘어놓은 채 백서휘를 향해 달려갔다.
‘확실히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점에서는 남궁민과는 다르군.’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흐아앗!”
남궁혁이 기합 소리를 크게 외치며 검을 내려찍었다.
쾅!
검과 피육(皮肉)이 맞부딪혔다고 믿기 힘든 소리가 악록산에 울려 퍼졌다.
백서휘는 반격할 생각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지도 대련이라 일부러 빠르고 강하게 공격하지는 않았다.
남궁혁이 끝까지 주먹을 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면 피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남궁혁은 검을 휘둘러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이루었다.
“좋은 판단이긴 한데, 너보다 고수한테는 위험한 수야.”
백서휘는 주먹을 회수하며 오른쪽 다리를 걷어찼다.
남궁혁은 하반신을 노릴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는 바람에 그의 균형이 깨지며 넘어졌다.
‘이쯤에서 포기하겠……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남궁혁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바라보며 게으른 당나귀처럼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나려타곤(懶驢打滾)?’
명가의 자제로 태어난 자가 펼칠 만한 수법이 아닌데도 남궁혁은 아무렇지 않게 썼다.
‘승부욕이 대단하네.’
백서휘는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구천현현보를 힘차게 밟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순식간에 좁혀졌다.
남궁혁이 어금니를 세게 물며 일어나 검을 있는 힘껏 뻗었다.
자신만은 못하지만, 그도 만만치 않은 악바리였다.
‘그래서 더 봐줄 수 없어.’
백서휘는 고개를 젖혀 남궁혁의 검을 피했다.
남궁혁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졌다.
백서휘는 그가 드러낸 빈틈을 향해 난화만천수의 무리가 담긴 양손을 내질렀다.
쐐애애애액!
퍽!
남궁혁이 실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날아가 바위에 처박혔다.
백서휘는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끄으으윽!”
일어나기 위해 용을 썼으나 남궁혁의 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포기해라.”
“할 수 있…….”
“정말 할 수 있다고?”
백서휘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본 남궁혁은 바로 패배를 선언했다.
그때 뒤에서 당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주님.”
“왜?”
“결정했습니다.”
당기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