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8화
‘진짜 어검비행이었다니…….’
어검비행은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그냥 막 쓸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검(劍)과 기(氣)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천부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초고난도의 기예였다.
그런 기예를 아주 능숙하게 펼치는 걸 보면 백서휘는 다른 현경의 무인보다 더 강한 게 확실했다.
‘준비가 안 된 지금 상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이기려면 려강으로 가야 돼!’
불사림주가 오른 경지를 무인의 경지로 치환하면 턱걸이로 현경에 오른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도 그가 이길 수 있다고 희망을 품은 건 무인이 아니라 ‘주술사’이기 때문이다.
술법을 쓰는 자들은 ‘준비된 곳’에서 싸울 때 제일 강하다.
려강은 수백 년 동안 불사림이 준비한 곳으로 일종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다.
준비한 걸 펼쳐봐야 알겠지만, 돈과 시간, 인력을 있는 대로 갈아 넣은 곳인 만큼 네댓 수 위의 상대도 잡아 내리라 예상됐다.
“불사림의 주술사들은 들어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놈들에게 복수할 테니 내가 려강에 갈 시간을 벌어다오!”
주술사들도 백서휘가 어검비행을 펼치는 걸 보고는 내심 살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놈들에게 생채기라도 입히고 가자고!”
“그래!”
주술사들은 려강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알고 있기에 흔쾌히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술법을 발동했다.
그리고 그런 술법들은 하나하나가 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백서휘야 워낙 강해 정통으로 맞아도 별일 없지만 오룡단은 아니었다.
오룡단은 문자 그대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였다.
그때 불사림주가 려강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술법을 완성했다.
“려강에서 기다리겠다.”
불사림주는 크게 외치고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백서휘와 오룡단은 남은 주술사들에게 려강에 뭐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침을 뱉거나.
비웃거나.
그도 아니면 저주하거나.
주술사들의 감각을 증폭시킨 후 분근착골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백서휘와 오룡단은 려강을 향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들은 말의 몸에 상처가 나고 피를 흘려도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한나절이 안 되는 시간에 목적지인 려강에 도착했지만, 여섯 마리의 말이 모두 피거품을 물며 죽었다.
백서휘와 오룡단은 말의 극락왕생을 빌고는 려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려강에는 반투명한 막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거기다 느껴지는 기운도 심상치 않아 들어가는 게 고민됐다.
“너희들은 학경(鶴慶) 아니, 학경은 너무 가깝군. 대리(大理)에 가 있는 게 좋겠다.”
“대리요?”
“그래, 대리. 거기서 날 기다리는데, 일주일이 되어도 내가 오지 않으면 곧장 장사로 돌아가.”
“음……. 알겠습니다.”
“가 봐.”
“네!”
오룡단이 경공을 전력으로 펼쳐 대리로 향했다.
백서휘는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는 반투명한 막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아무런 저항 없이 쑥 하고 들어갔다.
누가 봐도 불사림주가 함정을 파고 있는 게 확실한 상황.
그런데도 들어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짜증 났다.
백서휘는 어쩔 수 없다고, 자신 말고는 답도 없다고 속으로 되뇌며 려강에 진입했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보게 됐다.
목내이가 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자식을 안고 죽은 여인도 있었고, 절망과 고통이 섞인 표정으로 죽은 남자도 있었다.
“제기랄.”
불사림주가 려강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강시를 통해 얻은 결정이 부서져 못 쓰게 되니 직접적으로 사람에게서 정기를 갈취한 거로 보였다.
‘근거지에 준비를 안 해놓은 이유가 있었어.’
부하들보다는 가까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먹는 게 불사림주의 입장에선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살성을 타고났다는 당기준보다 불사림주가 훨씬 더 악랄했다.
이 개자식이 계속 살아 있으면 중원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이 땅에 살아 있고, 앞으로 이 땅을 살아갈 이들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사림주를 죽여야만 했다.
‘반드시 죽인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결의는 점점 더 단단해졌다.
백서휘는 슬픔과 분노와 증오를 억누르며 흉악한 기운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려강의 광장.
원래 사람이 몰리던 곳이어서 그런지 목내이가 된 시체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았다.
“왔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불사림주가 득도한 고승 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 개자식……!”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죄책감 느낄 생각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으니 설교할 생각 따윈 하지 마라. 나는 그냥 개미를 밟아 죽인 거랑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수호문 소속이 된 이후로 셀 수 없이 나쁜 놈을 만나 봤지만, 이 정도로 잔혹하고 악독한 놈은 처음이었다.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비인간적인 면모부터 살기 위해서라면 한 도시 전체를 희생시키는 과감함까지.
골수마저 마기로 범벅이 되었다는 천마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살아 돌아갈 생각하지 마라.”
백서휘는 서늘하게 날이 선 검을 뽑아 불사림주를 향해 겨누었다.
“너야말로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흥!”
백서휘는 코웃음을 치며 구천현현보를 밟아나갔다.
불사림주가 묵빛 기운을 구슬처럼 압축해 쏘아 보냈다.
묵빛 구슬들이 공간을 점유하며 백서휘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선 그는 묵빛 구슬들을 검으로 쳐내기 시작했다.
술법도 뭣도 아닌 그냥 기운을 뭉쳐 날린 것인데 불구하고 그 위력이 굉장했다.
손을 타고 전해져오는 묵직한 힘에 백서휘는 손바닥 아귀가 저리는 걸 느꼈다.
‘려강 사람들에게서 단순히 기운만 갈취한 게 아닌 것 같아.’
그냥 사람의 정기만 흡수해서는 보일 수 없는 변화였다.
옥룡설산에서 려강으로 오는 그 시간 동안 무슨 짓을 한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놈이 뭔 짓을 했느냐에 따라 공략 방법이 달라질 텐데…….’
싸우는 내내 예의주시하면서 불사림주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측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핫!”
백서휘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마리 새처럼 높이 날아오른 그는 허공에서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쳐 앞으로 튕겨 나갔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불사림주는 놀란 표정으로 진언을 읊었다.
‘이상하네. 피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진언을 읊는다고?’
무인과 정면 상대하는 건 주술사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이 사실을 불사림이란 주술사 집단의 수장이 모를 리 없었다.
알고서도 계속 이런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함정인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살펴봤지만, 모이는 기운이 커진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백서휘가 고민하는 사이 불사림주의 술법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지금 공세를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걸 깨달으니 마음이 이상하게 더 조급해졌다.
‘함정이어도 어쩔 수 없어. 이제는 뭐든 해야만 해!’
그때 불사림주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고 진언을 외웠다.
집중해서 더 빠르게 술법을 완성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미친 새끼.
공격을 아예 보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의 경계조차 하지 않고 상대의 뜻에 맡기겠단 뜻이었다.
‘이건 죽어도 할 말 없겠지.’
상을 차리는 걸 넘어 밥술까지 떠주다니!
이런 꿀 같은 기회를 마다할 사람은 불사림주의 부모 말고는 없으리라.
백서휘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불사림주 가슴에 검강이 휘감긴 검을 힘껏 꽂아 넣었다.
푸우욱!
검이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는데도 불사림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진언을 읊었다.
“죽을 놈이 뭐하러 진언을 외우는……. 뭐야!”
불사림주의 가슴에 났던 구멍이 메워지며 검신이 살에 밀려 나갔다.
그걸 본 백서휘의 표정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나야혹 바리 제스 바탁 사바하! 흐흐흐!”
불사림주의 입에서 나오는 진언이 귀에 익숙했다.
저번에 펼쳤던 것과 같은 술법을 쓰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운이 요동치더니 발아래의 땅이 늪처럼 바뀌었다.
달라진 건 늪의 규모가 더 커지고 깊어졌다는 것뿐이었다.
‘이미 파훼한 술법을 또 한 번 쓰다니. 날 바보로 아는 건가?’
백서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전에서 진기를 끌어올릴 준비를 했다.
그때 검붉은 손이 올라오더니 그를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백서휘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기합을 외쳤다.
“하앗! 어?”
이전과 다르게 술법이 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늪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하하하! 멍청한 놈!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미 한번 파훼당한 주술을 펼쳤을 줄 아느냐. 지금 펼친 건 나찰수가 아니라 염라수(閻邏手)다.”
“이전에 펼친 것보다 강해. 인정하도록 하지. 근데…….”
백서휘는 늪 속으로 끌려가면서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진기를 단전에서 퍼 올렸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불사림주는 뒷걸음질하며 다음에 펼칠 술법을 준비했다.
“못 파훼할 정도는 아니야!”
백서휘는 술법을 기합으로 깨뜨린 후 불사림주와의 거리를 좁혔다.
불사림주는 묵빛 구슬을 계속 날려 백서휘를 견제하면서도 입으로는 바쁘게 진언을 읊었다.
휘리리릭!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다른 때보다 더 빠르고 현란하게 밟았다.
수십 개가 넘는 그의 잔상은 동작은 다 달랐지만 하나 같이 다 불사림주를 노리고 있었다.
불사림주는 겁을 먹을 만한데도 흔들리지 않고 술법을 완성시켰다.
“……옴 산다라 그라학 이제리니 아모가 사바하!”
공간이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깨진 거울처럼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에서 푸른 피부를 가진 야차 수십 명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왼손에는 검을, 오른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등활의 옥졸(獄卒)들이여, 저놈을 죽여라!”
야차들이 지축을 뒤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몸집이 커서 그리 빠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웬만한 절정 경지의 무인보다 더 재빠르고 날쌨다.
부우웅!
몽둥이가 여기저기서 날아왔지만 적중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백서휘는 끝까지 지켜보다가 몸을 살짝 젖히는 정도로 공격을 피했다.
‘저놈은 뭘 하는 거지?’
슬쩍 보니 야차들과 자신이 싸우는 동안 불사림주는 다른 술법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모이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걸 보면 위력이 대단한 술법임이 틀림없었다.
‘제기랄!’
불사림주를 견제를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공격이 들어와 틈이 나질 않았다.
‘다 죽이는 수밖에 없겠어.’
광풍번천 초식을 중점적으로 써서 야차들을 죽여나갔다.
마지막 야차를 죽이고 불사림주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멀리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난도질당해 너덜너덜해졌던 야차들의 몸이 금방 회복되었다.
야차들이 다시 일어나 백서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백서휘가 얼굴을 굳히며 야차들의 공격을 다시 죽여나갔다.
잠시 후, 술법을 완성한 불사림주가 려강이 떠나가라 웃었다.
“하하하하! 네게 준비된 주술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