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7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먼저 가볼 테니까 빠르게 뒤따라와라.”
“예!”
백서휘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앞으로 달려갔다.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오룡단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위급상황이라 그들을 신경 쓸 만한 여유가 백서휘에게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됐다.’
길이가 긴 통로인데도 이 악물고 발을 놀리니 끝에 다다르는 건 금방이었다.
백서휘는 검강이 휘감긴 검으로 통행을 막아놓은 철물을 자르고 눈을 잠시 감았다.
바깥에 있는 빛이 갑자기 들어왔지만 미리 대비한 덕에 시각이 마비되는 일은 없었다.
다시 눈을 뜨고 검병을 꽉 움켜쥔 채 밖으로 나왔다.
서 있는 곳의 지대가 높아 의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한눈에 보였다.
“나먁삼만다 이므 파즈타라…….”
두 눈을 감은 불사림의 주술사들이 결정을 손에 들고 진언을 읊었다.
그러자 결정에서 나온 기운이 중앙에 있는 불사림주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퍼서석!
불사림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결정이 가루가 되어버렸다.
결정에 담겼던 기운이 전부 그에게로 넘어간 탓이었다.
‘저놈이 모든 기운을 흡수하기 전에 결정을 때려 부숴야겠어.’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쓴 채로 10장(약 30m) 높이를 뛰어내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그의 몸이 멀쩡했다.
심지어 착지할 때 무조건 낼 수밖에 없는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보신경 중에서도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법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바깥에서부터 깎아 들어가면 되겠지.’
백서휘는 은밀히 돌아다니며 결정들을 부수고 주술사를 죽였다.
10명쯤 처리했을 때 자신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주술사들의 대응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
자강시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고 주술사들이 술법을 써가며 자신을 찾아다녔다.
‘완전히 들킬 때까지 최대한 많이 죽이고 싶은데…….’
그때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사림주가 백서휘의 눈에 들어왔다.
불사림주는 기운을 단전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놈이 죽으면 일이 훨씬 더 쉬워져.’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불사림주를 죽일 수 있는 곳까지 갔을 때였다.
안 보이게 숨어 있던 호위용 자강시 넷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백서휘를 공격했다.
‘제법인데?’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은형잠종술을 펼친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고 공격한 것도 놀라웠지만, 예민한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은신했던 점이 더 놀라웠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한다.’
백서휘는 난화만천수를 펼쳐 들어오는 공격을 침착히 쳐냈다.
손을 섞어 보니 알 수 있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호위용 자강시들의 은신 실력은 살왕(殺王)이니 흑암검수(黑暗劍手)니 하는 살수들보다 훨씬 뛰어난데 반해, 무력 수준은 그에 못 미쳤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놈들의 개체별 무력 수준은 잘 쳐줘야 초절정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신체 능력만을 고려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기술의 숙련도까지 따지면 운학이나 남궁유운의 수준에 불과했다.
하수에게 이놈들의 공격만큼 위력적인 게 없겠지만 모든 부분에서 훨씬 더 뛰어난 자신에겐 이보다 쉬운 상대가 없었다.
‘권사(拳絲)와 각사(脚絲)으로 어떻게 해보시겠다?’
백서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권각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직선적이고 단순해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가 다 예상됐다.
끝까지 지켜보다가 한 번씩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지금!’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로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평소와 다르게 그의 구천현현보는 화려하지도 않고 재빠르지도 않았다.
하수들이 보면 자기도 따라 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느렸다.
그런데도 자강시는 단 한 번의 공격도 적중시키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눈앞의 자강시들이 하수라 그런 것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건 심즉동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즉시 몸과 기운이 움직이니 움직임의 낭비가 없었고, 그 덕에 체력과 내력도 오랫동안 보존하니 지치지 않고 싸우는 게 가능했다.
이러한 전투 운영 방식은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어한다는 이정제동(以靜制動)의 묘리와 크게 맞닿아 있었다.
‘반격에 들어가 볼까.’
구천현현보를 밟아가며 호위용 자강시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빈틈!’
백서휘는 검강이 휘감긴 검을 호위용 자강시들이 보인 빈틈을 향해 찔렀다.
그때 모든 기운을 갈무리한 불사림주가 희미한 검강이 담긴 검으로 맞대응했다.
콰아앙!
불사림주가 검을 통해 오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참 멀리 날아갔다.
슬쩍 보니 검신을 타고 일렁이던 검강도 사라진 상태였다.
백서휘는 피가 섞인 침을 뱉는 불사림주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검강을 만들었다고 해서 다 같은 현경이 아니었다.
무(武)에 대한 사유나 고찰 없이 넘쳐나는 내공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아 만든 ‘가짜’로는 ‘진짜’를 이길 수 없었다.
‘무인이라기엔 힘도 너무 없었지.’
경지가 경지인지라 원래도 백서휘의 신체 능력은 뛰어났다.
그 상태에서 용의 피까지 먹으니 힘과 속도, 감각 등 모든 면에서 대적할 자가 사라지게 됐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단순히 휘두르는 검에도 산을 뽑아버릴 듯한 괴력이 담겨 있으니 평범한 자로서는 상대가 불가능했다.
‘너무 하수야. 결정을 다 흡수하게 놔뒀어도 신선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
불사림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검은 무리군.”
“……무인이 아니라 주술사였나?”
“그래.”
자연스럽게 강자의 기세가 불사림주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백서휘는 자세를 고치고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불사림주는 설렁설렁 상대할 만큼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모두 날 지켜라!”
호위용 자강시 넷이 불사림주를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 섰다.
어느 쪽에서 들어오든 무조건 공격을 막아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른 주술사들은 외곽에 서서 백서휘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옴 소마니 훔 바탁 하리 바아만 디나……!”
백서휘는 술법이 완성되는 걸 막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정순해진 내공과 극한까지 발달한 신체 능력은 순식간에 불사림주가 있는 곳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해주었다.
당황한 주술사가 자강시들에 명령을 내려 백서휘를 저지하려고 했다.
‘광풍번천!’
백서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미친 바람’이 자강시들을 분쇄해버렸다.
자강시들이 가진 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주술사들은 허공으로 흩날리는 자강시들의 육편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봤다.
“저놈을 까맣게 태워버려!”
주술사의 명령에 자강시 셋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더니 입에서 불길을 내뿜었다.
화르르륵!
백서휘는 빠른 속도로 검을 회전시켜 검막을 만들어냈다.
검막에 막힌 불길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러는 동안 불사림주와 일반 주술사들은 최대한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그때 자강시 셋은 그 자리에서 숨을 들이켰다.
다시 한번 불길을 입에서 내뿜으려는 것이다.
‘멍청한 것들! 누가 기다려준대?’
백서휘는 코웃음 치며 검강이 휘감긴 검이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자강시 셋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빈자리를 다른 자강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채웠다.
그들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독이 담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귀찮게 하는군.’
살짝 짜증이 난 백서휘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가 그의 공격으로 부서졌다.
쨍그랑!
‘한 번뿐이지만 내 공격을 막아내는 놈이 있을 줄이야. 확실히 본진이라 그런지 실력 있는 놈들이 꽤 있어.’
술법이 파괴된 반동을 이기지 못한 주술사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며 기절했다.
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희생 덕분에 자강시들은 공격할 기회를 얻었다.
‘경천신뢰를 펼쳐야…….’
그때 뒤에서 날아온 암기가 자강시들의 목에 꽂히더니 펑 하고 폭발했다.
자강시들의 목이 덜렁거리다가 일제히 땅에 떨어졌다.
뒤를 보니 당기준이 10장 높이에서 자강시들을 저격 중이었다.
“이 자식들아! 빨리 안 와?”
“갑니다!”
당기준을 포함한 오룡단이 밑으로 내려오는 동안 백서휘는 스무 구 이상의 자강시 목을 베었다.
“빨리!”
잠시 후, 오룡단이 무기를 빼 들고 백서휘의 옆에 오행진 형태로 섰다.
“앞을 뚫어!”
“네!”
오룡단이 전진하면서 자강시와 주술사들 상대하는 동안, 백서휘는 불사림주를 노렸다.
“흐아앗!”
백서휘는 강검(强劍)의 묘리가 담긴 회천만일의 초식을 펼쳤다.
호위용 자강시들이 앞으로 나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아아앙!
호위용 자강시 중에서도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놈의 몸이 공격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불사림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서휘를 보면서 진언을 계속 읊었다.
“……아나야혹 바리 제스 바탁 사바하!”
신선이 되는 의식을 치를 때만큼은 아니지만 기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 술법에 실패했나 싶었을 때, 갑자기 발아래의 땅이 늪처럼 바뀌었다.
“이놈들의 친구로 만들어주마.”
불사림주가 이제는 셋이 된 자강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쓰려는 술법이 무슨 술법인지는 모르겠다만, 네 부하가 될 일은 없을 거다”
“저놈들도 인간일 때는 그런 말을 했었지.”
검은 손이 수십 개 올라와서는 백서휘를 늪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검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은 강력했지만, 용의 피를 먹어 괴력을 발휘하게 된 백서휘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나찰수(羅刹手)를 버텨낼 줄이야.”
“쉽던데?”
“이것도 한번 버텨봐라.”
불사림주가 검은 손의 수를 늘리고 힘도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백서휘는 거목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게 내 차례인가?”
백서휘는 단전에서 한 줌의 내공을 일으킨 후 기합을 외치니 술법이 사라졌다.
천의일기공은 그 자체로 사악한 일을 물리치는 공능이 있었다.
내공이 정순해지면서 그 공능은 더 강력해졌고, 덕분에 지금처럼 한 줌의 진기로도 술법을 간단하게 해제할 수 있게 됐다.
백서휘가 불사림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두 이놈을 공격해라!”
오룡단의 견제를 버티며 주변에 있는 주술사들이 술법을 퍼부었지만 백서휘는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걸 본 불사림주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주술사들은 모든 자강시들의 명령권을 내게 넘기고 1번 집결지로 도망가라!”
주술사들이 허공에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어딘가로 도망을 갔다.
백서휘는 오룡단을 시켜 그들을 추적하게 했다.
“왜 혼자 남은 거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강시로 만들었다는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인가?”
“그럴 리가.”
“그럼 왜 다른 놈들을 대피시킨 거지?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나는 죽을 각오를 한 적이 없어.”
“그럼 왜 남은 거지?”
“그 이유는 지금 보여주도록 하지. 모두 돌격!”
수백 구의 자강시가 백서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꽉꽉 막혀 있어 구천현현보를 펼쳐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장난질로는 날 못 죽여.”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죽이려고.”
“기대되네.”
“불사림은 영원불멸하리라!”
불사림주의 말이 떨어지자 모든 자강시들의 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잘 가라.”
“잘 가라고?”
불사림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뭘 노리는 거지?”
그때 자강시가 벽력탄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이걸 노렸군.”
백서휘는 부서진 뼛조각이 암기가 되어 날아오는 걸 보자마자 바로 어검비행을 펼쳤다.
구름 밑까지 날아오른 그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불사림의 근거지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있었다.
“이 근방에 그 1번 집결지란 곳이 있을 것 같은데…….”
백서휘는 하늘 위에서 오룡단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불사림주는 오룡단에게 항복을 권했다.
“항복하면 깔끔하게 죽여주겠다.”
“우리가 왜 항복해야 하지?”
“너희들의 상관이 죽었으니까.”
“그럴 리 없어!”
남궁민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귀가 있으면 이 소리가 들릴 텐데?”
끊이지 않고 폭발음이 들려왔다.
오룡단의 마음은 바람 앞에 갈대처럼 흔들렸다.
콰콰콰쾅! 쐐애액! 콰쾅!
폭발음 사이에서 익숙한 소리를 듣자 제갈선우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왜 웃는 거지?”
“당신이 말했던 그 상관이 아직 살아 있거든.”
“그럴 리 없다!”
불사림주가 남궁민처럼 소리치자 제갈선우는 불사림주를 따라 말했다.
“귀가 있으면 이 소리가 들릴 텐데?”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지?”
불사림과 오룡단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쐐애애애애애액!
“이 소리는…….”
소리의 정체를 모르는 불사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오룡단은 죽었다 살았단 사실에 환호했다.
“어, 어검비행?”
불사림주는 어검비행으로 날아오는 백서휘를 확인하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답이다.”
백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