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6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제갈선우의 두 눈을 괴롭혔다.
햇살을 못 이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낯선 장소라 주위를 둘러보니 남궁민과 당기준이 옆에 누워 있었다.
여긴…….
그때 황보정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기분은 어때?”
“살아 있다고? 아!”
자강시들과 일전을 벌였던 기억이 제갈선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맞춰봐.”
“본가에서 지원군이라도 온 거야?”
“지원군은 맞는데 제갈세가에서 온 건 아니야.”
“그러면 누가? 황보세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누가 이곳에 오겠어.”
“좋은 머리 놔두고 뭐 하는 거야. 우릴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하잖아.”
“설마 관주님이?”
“그래, 관주님이 시기적절하게 돌아와서 그놈들 다 죽였어.”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관주님은 어디에 있는데?”
“지금 제갈세가에서 온 소가주랑 얘기를 나누고 있을걸.”
황보정석의 말처럼 백서휘는 제갈진천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만, 사천성의 미산(眉山)과 인수(仁壽), 청해성의 합작(合作)에서도 이곳처럼 사람들이 자강시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예.”
“수주에서 잡은 노인이랑 형문에서 잡은 놈은 작전이 진행되는 곳이 더는 없다고 했는데?”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놈들이 호북성 대해서만 알고 있었거나, 잡히면 거짓 정보를 흘리라고 했거나.”
“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제가 직접 정보를 빼낸 게 아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놈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거짓은 아니었어.”
“그러면 그놈들이 호북성에 대해서만 알았나 봅니다.”
“음…….”
백서휘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박자감 있게 두드렸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사천성이나 청해성에서 작전을 진행하는 놈들을 못 잡는다.
두 놈이 호북성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놈 모두 려강에 근거지가 있다고 한 걸 보면 뭐가 있기는 하겠지. 함정이든, 본거지든…….’
뭐가 됐든 부숴버리면 되리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진천도 황급히 따라 일어나서는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뭔데?”
“은인께서 부탁하셨던 집의 설계도입니다. 가지고 계신 땅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크기 별로 따로 설계했습니다.”
“내가 중간에 형문으로 떠났다는 이야기 들었잖아?”
“떠나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같이 들었습니다.”
제갈진천이 소가주 자리를 두고 동생과 싸울 때까지 포함하면 제갈세가의 무사가 꽤 많이 자신의 손에 죽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챙겨준다는 걸 보면 역시 무림에선 강한 게 최고인 것 같았다.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지.”
“하하.”
“잘 있으라고.”
“장사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려강.”
“려강이면 여기서 못해도 석 달은 걸리는 곳인데……. 혹시 그곳에 놈들의 근거지가 있는 겁니까?”
백서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려강에 근거지가 있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알아맞힌 걸 보면 제갈진천은 확실히 머리가 좋긴 한 놈이었다.
“그래.”
“혼자서 가시는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본거지라면 자강시들의 숫자가 수주보다 더 많을 거예요.”
“알아.”
“알면서 왜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공론화를 해서 힘을 하나로 모아서 그놈들을 치는 게 더…….”
“나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야 싶지. 근데 지금 시간이 없어. 하루라도 빨리 가서 놈들의 목을 쳐야 돼.”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불사림의 림주가 결정을 이용해 불사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고 말하면 제갈세가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서 백서휘는 제갈진천에게 지어낸 이유를 댔다.
“결정의 수가 일정 숫자 이상 모이면, 북경과 성마다 있는 성도에 대단위 공격 술법을 쓰겠다는 말을 두 놈 중 한 놈에게서 들었다.”
제갈진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확실히 그러면 지금 출발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지금 갈 수밖에 없지.”
“그런데 오룡단도 려강에 데려가지 않으실 겁니까?”
“그건 생각 못 했던 문제인데.”
운남성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말을 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오룡단의 보신경 실력과 관계없이 같이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오룡단 무력 수준이야.’
오룡단은 지옥 훈련을 수년 동안 진행해야 할 정도로 약했다.
아마 불사림에 데려가면 몇몇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가 있었다.
‘무인으로서 제대로 성장하려면 실전을 많이 겪는 게 좋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될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니…….’
백서휘는 오룡단을 데려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룡단은 장사로 복귀하라고 하고 려강은 나 혼자 가려고.”
“음…….”
제갈세가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제갈진천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다.
“난 간다.”
백서휘는 방을 나오자마자 곧장 오룡단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오룡단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몸은 괜찮나?”
백서휘는 제갈선우를 보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거동은?”
“일어나서 확인해봤는데 문제없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장사로 돌아가도 되겠네. 짐 싸.”
“관주님도 가십니까?”
“아니, 나는 려강으로 가야 돼.”
“려강은 왜…….”
“자강시 만든 놈들의 근거지가 거기 있거든.”
피는 못 속인다고 제갈선우는 제갈진천과 똑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백서휘는 오룡단에게는 솔직하게 바로 가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죽지 않는 게 가능합니까?”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근데 또 모르지. 세상에 ‘절대’란 건 없으니 어쩌면 성공할 수도…….”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황보정석과 당기준이 동시에 손을 들어 올렸고, 제갈선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어…….”
남궁민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먼저 거수한 세 사람을 바라봤다.
황보정석이 그에게 소신대로 선택하라고 전음을 보냈다.
“으으으으! 저도 갈게요!”
“이, 이러면 나도 갈 수밖에 없잖아!”
모용진이 울상을 지었다.
“가겠다는 용기를 내준 건 고마운데 같이 가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다. 일단 너희들 너무 약해. 려강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너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황보정석이나 당기준 정도고. 이놈들도 사지 중에 하나를 잃어서 불구가 될 거야.”
“그래도 가겠습니다.”
“왜?”
“그래야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살아남아야 강해진다는 얘기 못 들었어?”
“조금 전에 관주님 본인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저나 당기준 정도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그게……. 하, 됐다. 내가 가자고 한 거 아니니까 죽으면서 내 원망은 하지 말아라.”
“네.”
백서휘는 제갈세가에서 말을 빌려 오룡단과 함께 운남성에 있는 려강으로 향했다.
* * *
“다들 몸은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제갈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상태 안 좋으면 그냥 지금 말해. 나중에 발목 잡지 말고.”
“저, 정말 괜찮습니다. 한 시진 아니, 두 시진만 쉬면…….”
“그럼 그렇지.”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어차피 말 맡기려면 객잔을 잡아야 하니까.”
여섯 명은 객잔에 방을 잡고 한 시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여독을 푸는 데 집중했다.
“둘씩 짝지어서 근거지를 찾는데 불사림 놈들에게 찾는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돼. 알았어?”
“네.”
“빨리 조를 짜.”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오룡단은 장사에서 같이 움직이던 사람끼리 조를 짰다.
똥 푸느라 혼자 다녔던 모용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넌 나랑 다니면 되겠다.”
“……네.”
“나가자.”
여섯 사람은 시간 차이를 두고 객잔을 나섰다.
“어디서부터 찾으실 건지 물어봐도 돼요?”
“우리는 옥룡설산으로 간다.”
“그, 그런 힘든 건 다른 사람들 시켜도 되지 않을까요?”
“자꾸 초 치는 얘기하지 마라.”
“……네.”
백서휘와 모용진은 말을 타고 려강 근처에 있는 옥룡설산으로 향했다.
거리가 꽤 멀다 보니 도착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봉우리 열세 개를 다 뒤질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백서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산을 올라가버렸다.
“가, 같이 가요!”
모용진이 백서휘의 뒤를 다급하게 쫓아갔다.
한참을 뒤졌는데도 불사림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백서휘는 바위에 앉아 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맞긴 한 것 같은데 왜 흔적이 안 보이는 거지? 따로 자기들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라도 한 건가?’
그때 모용진이 헐레벌떡 뛰어오다가 돌에 낀 이끼에 미끄러졌다.
“이놈을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백서휘는 답답함에 땅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얜 또 어디 간 거야…….”
어디를 봐도 모용진이 보이지를 않았다.
백서휘는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굴러간 흔적을 쫓으면 되니 모용진을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라?”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니고,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닌데 흔적이 갑자기 끊겨버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왼쪽 눈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몇 번 겪어봤던 고통이라 익숙해져 이전처럼 욕설은 안 내뱉었다.
이제는 어금니를 악무는 것으로 충분했다.
왼쪽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빠르게 훑어봤다.
오솔길 옆에 있는 연리지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강렬하게 반짝거렸다.
백서휘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불사림으로 가는 입구임을 알아차렸다.
‘모용진을 구한 후에 빠르게 려강으로 돌아간다.’
심호흡을 수차례 한 후에 연리지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기랄.’
어지러울 정도로 계속 반짝이는 것들이 왼쪽 눈에 보였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걸어가니 기절해 있는 모용진과 불사림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철문이 보였다.
철문 쪽을 계속 경계하며 모용진의 뺨을 살살 때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새끼 기절한 척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연기를 하는 것 같아 맥을 짚어보니 진짜로 기절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백서휘는 모용진을 둘러업고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왔다.
‘다음에 올 때 길을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표시를 좀 해야겠군.’
백서휘는 옥룡설산을 내려오는 동안 보이는 나무와 바위에 연리지가 있는 곳의 방향을 표시해놨다.
자신처럼 모든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발견 못 하게 세심히 표시한 터라 발견될 걱정은 없었다.
‘이제 려강으로 가기만 하면 돼.’
말을 타고 가는데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깼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려강으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했다.
일부러 관심을 끊고 모용진의 말과 자신의 말을 번갈아 타며 계속 달렸다.
말이 거품을 물 정도로 혹사시킨 덕에 반나절 만에 려강에 도착했다.
“야! 일어나!”
처음 기절했을 때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 모용진은 깨어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일어나는 게 좋을 거다.”
“여, 여긴 어디……?”
모용진은 어설프게 연기했다.
“거지 같은 연기 그만하고 나머지 단원들 찾아와.”
“……네.”
모용진이 단원들을 찾는 동안, 백서휘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신선이 되는 의식을 아직 못 했길 바라야겠네.’
의식이 끝났다면 신선이 되지는 못했겠지만, 그와 근접하게 강해졌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데……. 제기랄!’
죽지 않을 거야.
가족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룡단이 객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여섯 사람은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먼저 눈 뜬 건 무공의 경지도 높고 일찍 운기조식에 들어갔던 백서휘였다.
오룡단은 당기준, 황보정석, 제갈선우, 남궁민, 모용진 순으로 회복을 끝냈다.
눈빛을 교환한 여섯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옥룡설산의 연리지로 향했다.
한나절이 걸려 도착한 그들은 연리지를 통해 불사림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반짝거림은 없군.’
최상의 상태로 전투를 치를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전에 봤던 철문이 나왔다.
백서휘는 기감을 넓혀 문 너머에 사람이 존재했는지 확인했다
‘없다.’
그는 검강이 휘감긴 검을 뽑아 철문을 베어버렸다.
쿵!
철문이 뒤로 넘어지며 통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백서휘는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한 후 먼저 진입했다.
기감을 최대한도로 넓히니 잡히는 존재가 생각보다 많았다.
오룡단이 그들 모두를 상대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 돌려보내야 하나? 음……. 아니다. 본인들이 한 선택이니 본인들이 알아서 잘 책임지겠지.’
백서휘는 앞으로 나아가며 오룡단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오룡단이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통로 끝에 있는 철문 너머에서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선이 되기 위한 의식이 시작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