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5화
백서휘는 노인에게서 정보를 모두 뽑아내고 마지막 질문 하나를 남겨두었다.
“자, 마지막으로 물을게. 수주 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곳이 또 어디야?”
“마, 마지막이라면…….”
“빨리 말 안 해?”
백서휘가 노인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려 했다.
겁을 먹은 노인이 움찔하며 정보를 토해냈다.
“혀, 형문(荊門)이오.”
“그게 끝이야?”
“저, 정말 끝이오. 믿어…….”
서걱!
백서휘는 깔끔하게 노인의 목을 베고는 형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형문이면 오고 가는 나흘쯤 걸리는데…….”
오룡단 없이 혼자 형문으로 갈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간다면 최대한 빨리 가도 2주 이상 걸린다.
‘결정은 다 부수고 가는 게 좋겠지.’
하백상과 혈루회를 처리할 때 오대세가가 중원의 안녕보다는 가문의 이득을 더 중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이 결정의 존재와 쓰임새에 대해 알게 되면 백이면 백 이용하려고 들 테니 부수고 가는 게 맞았다.
‘가문을 지워버리는 게 더 귀찮으니 확실하게 처리해야겠어.’
백서휘는 오대세가 사람들이 들으면 섬뜩해할 만한 생각을 하며 결정을 일일이 다 부쉈다.
결정에 담겨있던 정기가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 되돌아갔다.
“오룡단한테 말하고 바로 떠나자.”
백서휘는 오룡단과 조사단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조사단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쉿!”
“왜?”
백서휘가 왔다는 사실이 모여있는 모두에게 전음으로 전파되었다.
장내가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숙연해졌다.
어제 결정을 빼돌린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백서휘는 그때 당시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었다.
‘용건이나 꺼내자.’
형주에 가겠다는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갑자기 수주 쪽 비전투원들이 튀어나오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무사님! 저희 마을을 구해주십시오!”
“저희 마을도 구해주세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면서 이러는 걸 보면 친인척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되게 큰 모양이었다.
그때 우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뛰어나와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눈치를 계속 보는 걸 보면 학살극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서휘는 바짓가랑이를 잡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못 구해.’
지금 이 시각에도 근방의 마을에서 자강시에게 당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형문의 일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절대다수를 구하는 게 맞아. 결정이 불사림에 들어가는 것도 막아야 하고…….’
백서휘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히기로 했다.
“형문으로 가야 해서 다른 마을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요청할 거면 나 같은 놈 말고 우보한테 해.”
우보는 조사단의 단장으로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었다.
“갑자기 형문은 왜?”
“형문도 이 지경이라고 하더군.”
“형문이라면 여기서 꽤 떨어진 곳 아닙니까?”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어. 이 사태를 만든 놈들이 결정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하면 사람들이 고통받을 텐데.”
“그럼 저희는 어떡합니까?”
“조사를 여기서 끝마치고 돌아가도 되고 다른 마을을 구원하러 가도 돼. 참고로 후자를 선택한다면 본가에 지원요청을 한 후에 가는 게 좋을 거야. 일반적인 자강시와 다른 놈이 무리에 섞여 있을 수 있거든.”
“다른 놈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기본적인 신체가 뛰어난 데다가 특수한 능력까지 쓰는 것들.”
“그래 봤자 역귀 아닙니까?”
“역귀가 아니라 자강시야. 그리고 뒷문에 있는 놈들처럼 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생각해도 상관없어.”
우보는 백서휘의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판단을 내릴 정보는 충분히 주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본가에 지원요청을 한 후에 마을들을 구원하러 가야겠습니다.”
“오룡단을 두고 갈게.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작은 도움은 될 거야.”
백서휘는 어쩔 수 없이 놓고 가는 거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오룡단을 두고 간다는 식으로 포장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백서휘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형문으로 향했다.
* * *
백서휘가 형문으로 막 출발했을 무렵, 노인의 부인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나, 낭군이 죽었다고……?”
노파는 검게 변색된 은반지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럴 리 없어! 반지에 담긴 술법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해!”
사람의 생사를 알려주는 술법을 노파 본인이 직접 담았다.
그렇기에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도 현실도피를 하는 건 그만큼 낭군의 죽음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리라.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노파가 제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누가 낭군을…….”
강호에서 낭군을 죽일 자는 소수였고, 그 소수마저도 ‘수주’엔 없었다.
“수주! 수주로 가야 돼!”
노파는 꽃가마에 올라탄 후 네 구의 자강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앞으로 가라.”
자강시는 인간이 아니라 밤새 움직여도 지치지 않았다.
그 장점을 이용해 노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했다.
엿새 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노파는 수주에 이르렀다.
그녀는 낭군의 시신이라도 찾을 생각으로 술법을 펼쳤다.
“여기로 가면……. 저놈들은?”
그때 오룡단과, 용호단, 다른 마을의 생존자들이 수주로 들어가는 모습이 노파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어야 할 수주에 사람이 생존해 있는 것부터 이상했다.
‘어떻게 사람이 있는 거지? 설마 이놈들이 낭군과 자강시를 모두 죽인 건가?’
진법의 존재로 인해 제갈세가는 모이면 모일수록 강했다.
그런 그들이 가문의 힘을 모아 수주를 지키려고 했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정 지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제갈세가 사람들이 범인으로 느껴졌다.
설사 범인이 아니더라도 낭군의 죽음과 연관이 어느 정도 있는 건 확실했다.
노파는 냉혹한 눈으로 제갈세가 사람들을 바라봤다.
‘가만두지 않겠어!’
노파는 자강시들에게 수주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안전을 위해 몸을 숨겼다.
“크르르르르!”
자강시들이 빠른 속도로 수주를 향해 달려갔다.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놀라 바로 몸을 돌렸다.
“저, 저건…….”
“자, 자강시다! 자강시가 나타났다!”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제갈세가의 무사는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용호단! 양민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진법을 펼칠까요?”
“버티는 게 중요하니 용호진에서도 호거용반의 식을 펼친다!”
“네!”
용호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진법을 펼쳤다.
“제갈형! 우리는 어떡해?”
모용진이 울먹이는 얼굴로 물었다.
“제갈 씨 천지니까 여기서는 선우형이라고 불러.”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져야 돼.”
“제갈선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말해!”
당기준이 단검을 양손에 쥐며 소리쳤다.
“우리 힘으로는 저놈들 공격을 막아내기 힘든 만큼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리로 흘려보내야 돼.”
“그래서 뭐냐고!”
“수(水)의 식을 펼친다!”
“알았어!”
오룡단은 용호단처럼 한 몸처럼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신속하게 진법을 펼쳤다.
“크르르르르!”
갑자기 자강시들이 달려오는 걸 멈췄다.
“왜 저러는 거지?”
다들 자강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당기준만이 알아차렸다.
“제기랄! 가운데에 있는 자강시 독을 쓰는 놈이다.”
“독이면 당 동생밖에 상대할 사람이 없잖아.”
“피독주(避毒珠)가 없다면 그렇겠지.”
당기준은 무척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독을 막을 수 있게 해주는 피독주를 오룡단에게 빠르게 나눠줬다.
“그리 좋은 피독주가 아니라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그래도 없는 거보단 나으니까 계속 목에 차고 있어.”
그때 세 구의 자강시가 삼재진을 펼치고, 한 구의 자강시가 그 사이로 쏙 들어갔다.
가운데 있는 자강시가 괴성을 내지르더니 독기가 가득 담긴 격공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휙휙휙휙휙!
“으어억!”
격공장을 쳐내지 못한 몇몇 이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한 바가지 쏟으며 쓰러졌다.
“가만히 있다가는 당한다! 무조건 공격해야 돼! 놈들에게 가까이 붙어서 호척용나(虎擲龍拏)의 식을 펼쳐라!”
용호단이 네 구의 자강시와 거리를 좁힌 후에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진형을 펼쳤다.
“저들을 도와야 돼!”
“저러고 있을 때 우리만 도망가면…….”
“모용진! 겁쟁이 같은 소리 하지 마! 여기서 도망가면 우리는 관주한테 죽어!”
“끄응.”
“피독주 효과가 있을 때 거리를 좁혀!”
제갈선우의 말에 오룡단도 네 구의 자강시에게 달려가 공격했다.
문제는 격공장을 쳐내도 바람을 타고 독기가 몸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호단 내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오룡단은 피독주의 빛이 점점 흐려지는 걸 보며 절망했다.
“저 독장을 쓰는 놈을 집중 공격해!”
“씨바아알! 누군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 앞에 놈들이 막아서 칼이 앞으로 안 나아가진다고!”
인격이 남궁혁으로 바뀐 남궁민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당기준! 암기 좀 써!”
“한 시진 전부터 쓰고 있다!”
“근데 왜 아무런 효과가…….”
“앞에 놈들한테 차단당하…….”
앞에 있는 자강시의 권사가 감긴 주먹에 당기준이 복부를 공격당했다.
당기준이 피화살을 내뿜으며 저 멀리 날아갔다.
“그냥 모용진 말을 들었어야 했어! 지금이라도 빼자!”
“지금 빼면 이도 저도 안 돼!”
“다들 피독주 효과도 끝나가잖아!”
“계속 공격해야 한다니까!”
“아니! 가장 강한 당기준도 저렇게 되고 피독주도 다……. 우엑!”
남궁혁이 몸 안으로 들어온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선우형! 우리 셋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황보정석 마저 후퇴를 권하자 제갈선우는 고뇌에 빠졌다.
그의 계산으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 싸워야만 했다.
“오행진 말고 삼재진을 펼쳐!”
“선우형!”
“내 말 들어! 조금이라도 오래 살려면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어! 저놈들 피해서 얼마나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제기랄! 좋아, 버텨보는데 나 혼자 남으면 그냥 도망갈 거란 거 알아둬.”
“그러든지.”
황보정석은 필사적으로 도를 휘둘렀지만,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세 구의 자강시는 금강불괴에 이른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피부가 질기고 단단했다.
‘제발 좀 베여라!’
스각!
혼자 힘으로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에 황보정석이 기뻐하는 사이.
양옆에 있는 자강시 두 구가 동시에 각사가 휘감긴 발차기를 날렸다.
담긴 힘을 보니 성벽도 그냥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뢰문의 문주한테도 살았는데 이놈들한테 죽겠구나.’
당기준이 힘겹게 일어나서는 흐릿한 눈으로 두 자강시에 암기를 겨누었다.
딸깍!
단추처럼 생긴 것을 누르자 암기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쐐애액! 쐐애액!
뒤에서 날아온 암기가 터지더니 자강시들의 발차기를 막아냈다.
쾅! 쾅!
황보정석은 당기준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슬쩍 뒤를 보니 당기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중이었다.
‘같이 살아 돌아가서 이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때였다.
앞에서 공격을 차단해야 하는 황보정석이 뒤로 빠지자 자강시가 본능적으로 제갈선우를 공격했다.
휙휙휙휙휙! 휙! 휙휙휙!
격공장이 펼쳐지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황보정석이 울부짖었다.
“아, 안 돼!”
제갈선우는 보법을 빠르게 밟아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을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시차를 두고 날아온 암격(暗擊)이 제갈선우를 때렸다.
“우웨웨엑!”
제갈선우는 무공의 경지가 낮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피를 토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독주가 작용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보 형! 나 죽어! 나 죽는다고!”
황보정석은 제갈선우와 모용진을 두고 고민했다.
“황보정석! 나 죽는다니까!”
모용진이 목청이 터지라 소리쳤다.
‘어쩌지.’
황보정석은 모용진과 기절한 제갈선우를 번갈아 가며 봤다.
기절해 전투력이 다한 제갈선우보다는 모용진을 구하는 게 맞았다.
“개자식아! 나 죽는다고!”
“젠장! 어떻게든 버텨!”
황보정석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 모용진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자강시의 차돌 같은 주먹이 모용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처, 천지신명님! 살게 해주시면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그러니 부디 저를 살려……!’
모용진은 죽음의 공포에 먹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왔다.
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황보정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질풍 같은 속도로 달려오는 백서휘가 있었다.
‘사, 살았다.’
황보정석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리는 걸 멈췄다.
그는 백서휘가 지금 처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이겼다…….’
비틀거리며 전장으로 복귀하려던 당기준 역시 지나쳐가는 백서휘를 보고는 안심했다는 얼굴로 쓰러졌다.
휙휙!
백서휘의 장난처럼 설렁설렁 펼친 격공장이 양옆에 있던 자강시들을 덮쳤다.
퍼억!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양옆에 있는 자강시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하, 한 방에 한 놈을 보내다니!’
황보정석은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겨우 생채기를 기뻐하던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서휘가 설렁설렁 날리는 격공장 두 방에 자강시들의 머리가 터졌다.
‘격차가 엄청나게 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차이를 보게 되니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적 존재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저놈이었구나!’
몰래 숨어서 지켜보던 노파는 낭군을 죽인 범인이 백서휘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백서휘의 검이 맨 앞에 있는 자강시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두, 두부를 뚫는 것보다 쉽게 자강시의 머리를 뚫다니!’
용호단의 단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우보와 소가주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을 들었고, 강기를 쓰는 모습도 봐서 강하다는 건 인지했다.
‘빙산의 일각이었구나.’
잠깐 본 걸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던 게 정말이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용호단원 전체가 그랬다.
“으으으!”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자 모용진은 눈을 살며시 떴다.
상대하던 자강시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모용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노파는 독장을 쓰던 자강시의 머리가 백서휘에 의해 터져나가는 것까지 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다들 괜찮냐?”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괜찮아지면 안 되는데.”
“에?”
“이딴 허접한 놈들한테 쩔쩔매놓고 아무렇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야? 짐승도 안 그런다.”
“끄응.”
“이딴 허접한 놈들한테 쩔쩔맨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자책하고, 괴로워 해라. 무림에서 무력이 부족하면 지금 같은 일이 생기는 거니까.”
백서휘는 황보정석을 비롯한 오룡단원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 끝나면 너희들 데리고 지옥 훈련할 거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들 하고 있어.”
“그 지옥 훈련 무슨 일이 있어도 할 테니까 단원들 상태 좀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기주와 제갈선우, 남궁민을 살폈다.
어떻게 될지 걱정이 좀 됐지만, 황보정석은 기도하지 않았다.
백서휘가 독장에 맞아 점점 죽어가는 것도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꽤 강력한 시독에 당했네.”
“많이 안 좋습니까?”
“많이 안 좋긴 한데, 추궁과혈 하면 괜찮아질 거야.”
“당기준은 어떡합니까?”
“이놈은……. 잠깐만.”
백서휘는 당기준의 체내에 기를 넣어 상세를 살폈다.
‘이건 또 뭐야.’
당기준의 단전에는 거대한 독기가 뭉쳐 있는 독령이 존재했다.
이거 때문에 당가의 소가주가 그때 이상야릇한 눈빛을 보낸 것 같았다.
‘다행히 내상이 깊지 않아 뭉친 독기가 발작할 일은 없어 보이는군.’
백서휘는 품에서 내상약을 꺼내 당기준의 입에 털어 넣었다.
“호법을 서라.”
“네!”
백서휘는 제갈선우만이 아니라 남궁민을 동시에 앉혔다.
황보정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동시에 앉힌 거지? 상태가 안 좋은 제갈 형만……. 헉! 두, 두 명을 동시에 추궁과혈한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야?’
천하제일인도 불가능할 것 같은 기예를 백서휘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황보정석은 호법을 서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용호단과 오룡단은 한 시진 넘도록 자강시들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런 자강시를 백서휘는 일 합 만에 해치웠다.
‘관주님이 진짜 별이었어.’
어린 시절,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비무에서 패배한 후, 지붕 위에서 몰래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그때 밤하늘에 흐드러지게 별들이 떠 있는 걸 보게 됐다.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별들을 잡아보려고 손을 힘껏 뻗었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처럼 빛나는 존재는 따로 있고 무슨 수를 써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보니 남궁세가의 소가주 따위보다는 백서휘가 더 ‘별’처럼 느껴졌다.
‘그냥 별도 아니지. 북극성……. 아니, 북극성도 모자라겠군. 태양! 그래, 관주님은 태양 같은 존재야.’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으며 압도적으로 강하기까지 하다.
‘지금 천하제일인이라고 설치는 사도련주보다 관주님이 훨씬 더 강하겠지.’
둘 사이에 있는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지만 황보정석은 정확하게 백서휘가 더 강하다는 걸 알아맞혔다.
그때 백서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용호단 쪽으로 갔다.
황보정석은 따라가려다 남궁민과 제갈선우, 당기준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오룡단원을 돌보며 백서휘가 하는 일을 멀찍이서 바라봤다.
‘나도 관주님처럼 강자가 되고 싶다.’
소가주 후보를 그만두며 사라졌던 꿈이 황보정석의 마음속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