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3화
젊은 관리는 관에서 온 무사가 아니란 사실에 실망했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자하무관의 관주님이셨군요.”
“장계에 꼭 적으라고. 호남성 장사에 있는 자하무관의 관주가 큰 도움을 줬다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수주에 있는 전부인가?”
“무인이라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겁니다.”
“양민들은?”
“양민들은…….”
젊은 관리는 씁쓸한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좋아, 양민들은 다 죽었거나 소수만 살아남았다고 치자고. 수주를 다스리는 고위 관리들은 어디 있지? 다 도망간 건가?”
백서휘는 말을 하면서 관청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젊은 관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지적하는 게 아니라 정보 수집차 물어보는 거니까 빨리 대답해.”
“……관리 중에 남은 건 저뿐입니다.”
“그럼 네가 책임자란 소리네?”
“예?”
“수주에 남은 관리는 너뿐이라며?”
“그, 그렇죠. 근데 책임자라니 그런 무거운 짐은 짊어질 수가…….”
“지낭당의 지자들! 이놈이 책임자란다! 이놈한테 이번 일에 대한 정보 뽑아낸 다음에 요약해서 나한테 보고해.”
백서휘가 소리치자 학창의를 입은 지자들이 젊은 관리를 향해 달려왔다.
젊은 관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지자들과 백서휘를 번갈아 바라봤다.
“지금 이리로 오는 놈들한테 협조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백서휘는 심드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지자들의 일이 끝나길 기다렸다.
‘언제 끝나려나.’
확실히 지자들이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그들은 젊은 관리와 다른 생존자들에게서 정보를 순식간에 뽑아내 백서휘에게 가져왔다.
“역귀(疫鬼)에 물리면 괴질에 걸린답니다.”
“그니까 그 역귀란 놈들에게 물리면 괴질에 걸린다는 거지?”
“……네.”
“물리기만 하면 무조건 감염되는 거야?”
“저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역귀란 것에 관한 정보는 그게 끝이야?”
“밤이 되면 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습격도 잦아지고요.”
“여기서 더 강해져도 우리가 상대하는 데 문제는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습격은 그냥 내가 경계를 서면 되는 문제고. 이것 외에는 딱히 문제 있을 건 없을……. 하나 남았군. 조사단에 물린 놈들은 얼마나 있어?”
“겉으로 보이는 건 셋인데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래?”
“몰래 조사하는 건 힘들겠지?”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조사하는 것엔 한계가 있습니다. 물린 부위를 숨기려고 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는 없잖아.”
“확실히 공개적으로 조사하면 왜 물린 자를 찾는지 바로 눈치챌 겁니다. 그리고 눈치채면 물렸다는 사실을 숨기겠죠.”
“어쩌지?”
그때 지자 중 가장 젊은 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말해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 정보를 밝혀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공개적으로 조사하는 게 낫습니다.”
“물린 걸 숨기려는 놈들은 어떻게 하고?”
“알몸을 보면 됩니다.”
상식적인 명령이 아닌 만큼 무사들의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백서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말대로 진행한다.”
“반발이 거셀 겁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 거라고 설득하고, 그래도 안 되면 물린 거라고 가정하고 죽이면 돼.”
가장 젊은 지자는 자기 의견이 채택되어 좋아하는 반면, 다른 늙은 지자들은 신음을 흘렸다.
“우보랑 용호단의 단장에게 협조를 얻어서 일을 진행해. 말 안 듣는 놈 나오면 나한테 말하고.”
“네!”
백서휘는 의자에 앉아 반발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나오길 바랐다.
‘본보기 삼을 놈이 있어야 나중에 편한데…….’
염원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알몸을 보이는 걸 거부하는 무사가 둘이나 나왔다.
“왜 옷을 벗길 거부하는 거지?”
“그건…….”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목을 자를 거니까 잘 생각해서 말하는 게 좋아.”
백서휘는 살기 어린 눈으로 무사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지, 지금이라도 벗으면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
“그럼 저는 벗겠습니다.”
알몸을 보이길 원하는 무사 중 하나가 관청 내에 있는 건물로 후다닥 뛰어갔다.
백서휘는 무심한 눈으로 나머지 하나인 제갈혜진을 바라봤다.
“너는?”
“저는 옷을 벗길 거부한 적이 없어요.”
“그럼 왜 여기 있는 건데?”
“아녀자가 어찌 지아비도 아닌 자에게 몸을 보이겠어요.”
“그러니까 너는 무인이 아니라 여자다 이건가?”
“그, 그게 아니라…….”
“내 칼에 목이 달아날래? 아니면 옷 벗고 물린 자국 있는지 보여줄래?”
“저는…….”
제갈혜진은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여자 생존자 중 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 물린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남자 말고 여자가 확인해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
“여자면 보이겠다?”
“네.”
백서휘는 여성 생존자 중 하나를 시켜 제갈혜진의 알몸을 확인하게 했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역귀에게 물린 자국이 없었다.
백서휘는 다시 원래 있던 의자에 앉아 지자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지자 중에서 가장 젊은 자가 조사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지게 한 자라 대표로 보고를 맡은 거로 보였다.
“얼마나 나왔어?”
“확실히 물린 자는 넷, 물린 거로 의심되는 자는 둘입니다.”
“의심되는 건 또 뭐야.”
“물린 자국은 있는데 상처가 없습니다.”
“전자는 상처가 있고?”
“네.”
백서휘는 잠시 고민하다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두 집단으로 분리해서 방에 가두는데, 확실히 물린 자 쪽엔 혹시 모르니까 못 움직이게 족쇄 같은 거 채워놔.”
“보안은 어떻게 할까요?”
“사적인 친분보다 명령을 우선시하는 놈들로 두 쪽 다 지키게 해.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의원들한테 상시 확인하게 해서 괴질에 대한 자료를 모아.”
“갇힌 자들이 변하면 의원들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들어갈 때 용호단을 동행시켜.”
“그것 말고 더 지시하실 사항은…….”
“여기서 하룻밤 묵을 거니까 숙영 준비를 하려거든 여기서 해.”
“알겠습니다.”
숙영 준비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관청의 건물 중 하나에서 비명이 들렸다.
‘저긴 물린 게 확실한 놈들이 있는 곳인데?’
백서휘는 질풍처럼 빠르게 달려가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가장 상태가 심각했던 자가 역귀로 변해 의원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의원의 호위 무사가 그의 어깨를 잡고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크어억!”
“젠장! 젠장! 젠장!”
의원의 호위 무사는 욕만 계속 내뱉을 뿐, 역귀로 변한 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백서휘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했다.
‘내가 나서는 수밖에.’
스각!
역귀로 변한 자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더니 방구석 한쪽으로 굴러갔다.
그쪽에는 확실하게 물린 셋이 공포에 떨며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안 돼.”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건 유서 쓸 시간뿐이야.”
“아…….”
백서휘는 진짜로 유서 쓸 시간만 주고 확실히 물린 자들을 죽였다.
‘그냥 물린 자국만 있는 놈들은 어쩌지?’
경과를 좀 더 지켜보고 변화가 없으면 바로 복귀시켜도 될 듯싶었다.
“고비는 오늘 밤인가.”
백서휘는 민가가 있는 쪽을 잠시간 바라보다 관청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이 되었다.
백서휘는 지붕 위에 앉아 주변에 있는 역귀 무리를 예의주시했다.
‘무사히 넘기려……. 그럴 리가 없지.’
민가들이 모여 있는 쪽에 있던 역귀들이 이리로 몰려왔다.
“습격이다!”
잠을 자던 용호단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에 반해 뒤늦게 나온 수주 쪽 인원은 허둥지둥하며 실수를 연발했다.
“위치로!”
“위치로!”
용호단은 복명복창하며 미리 수비하기로 한 곳으로 달려갔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침착하게 행동해!”
“아, 알겠습니다!”
젊은 관리가 몇 안 되는 인원을 데리고 후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들 전투 준비!”
스릉!
용호단이 검을 뽑아 들고 백서휘를 바라봤다.
백서휘는 역귀 무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검을 쏘아 보내며 소리쳤다.
“온다!”
검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역귀들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수박 터지는 소리가 담 너머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용호단은 이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리지 않게 조심해라.”
“네!”
잠시 후, 몇몇 역귀들이 담을 넘어와 오룡단과 용호단을 공격했다.
슬쩍 보니 낮에 상대할 때보다 역귀들의 힘이며 민첩성 등이 상승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지.’
양민은 몰라도 무인은 많이 살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수의 역귀가 후문 근방에 나타났다.
역귀들은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정병처럼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후문에 있는 이들이 이제껏 보여준 것과 다른 역귀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가장 후위에 있는 붉은빛 역귀가 주변 환경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잠시 후, 그 붉은빛 역귀가 나타난 건 젊은 관리의 바로 뒤편이었다.
푸욱!
붉은빛 역귀는 젊은 관리의 등을 관수로 뚫고 손에 잡히는 심장을 터뜨렸다.
그다음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붉은빛 역귀가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 꼭 죽어 나갔다.
순식간에 수주 쪽 전투원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붉은빛 역귀가 후문을 박살내자 다른 역귀들이 기다렸다는 듯 관청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어느 정도 모인 그들은 대문에 있는 조사단을 습격했다.
“후문이 뚫렸다! 용호단은 호거용반(虎踞龍盤)의 식을 펼쳐서 다른 조사단원을 지켜라.”
용호단은 오룡단과 지자들, 의원들을 중심에 두고 방어 진형을 펼쳤다.
백서휘는 착실하게 밖에 있는 역귀들을 이기어검으로 죽여나갔다.
붉은빛 역귀가 볼 때 그는 쉬운 상대였다.
외따로 있고 무기도 없으며 무엇보다 무공을 익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붉은빛 역귀는 주변 환경에 녹아든 후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천천히 백서휘를 향해 걸어갔다.
백서휘는 용의 심장을 먹었을 때처럼 왼쪽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제기랄, 왜 이러는 거지?”
그때 뒤에서 느껴지면 안 되는 역귀의 기척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아픈데 역귀까지 자신을 짜증 나게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주먹에 강기를 담아 붉은빛 역귀를 때리려는데 왼쪽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붉은빛 역귀의 이마 쪽에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보니 역귀의 미간 쪽에 있는 반짝임이 점점 밝아졌다.
‘이마를 쪼개보면 뭔지 알 수 있겠지.’
붉은빛 역귀가 젊은 관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있는 힘껏 관수를 내질렀다.
백서휘는 몸을 젖혀 손쉽게 피한 후, 강기가 감긴 주먹을 빠르게 네 번 내질렀다.
붉은빛 역귀의 팔다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크허헉!”
“기와 밟는 소리를 내고 다니지 말았어야지.”
백서휘는 중얼거리며 붉은빛 역귀의 목을 세게 지르밟았다.
퍼어어억!
붉은빛 역귀의 목이 짓이겨지면서 끝내 완전히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