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0화
백서휘는 침착하게 상제의 무위를 가늠해보았다.
‘나와 동급이거나 한두 수 위다.’
상제는 못 이길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한 적이 아니었다.
열 번 싸우면 서너 번 정도는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최근 무공의 화후가 깊어진 걸 생각한다면 충분히 싸워볼 만했다.
백서휘가 몸의 중심을 낮추며 검병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상제는 쌍검을 들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두 사람만이 아니라 멀찍이서 지켜보는 명성교도들도 숨을 죽였다.
벽에 걸려 있는 유등 중의 하나가 기름이 소진되어 꺼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서휘는 최대한 빠르게 검강이 휘감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천만일(廻天挽日)의 초식.
검에는 하늘을 돌리고 지는 해를 잡아당기는 듯한 괴력이 담겨 있었다.
상제는 거리가 가까워져 오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대비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대로 계속 가는 수밖에 없어!
기이익!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상제를 향해 날아가던 검의 방향이 휘었다.
가슴이 그대로 상제 쪽으로 열리며 죽기 딱 좋은 자세가 되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제의 강기가 깃든 쌍검이 양쪽 갈비뼈 사이의 틈을 찌르려 했다.
허초나 변초도 없는 정직한 일격.
백서휘의 눈이 커다래졌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발은 바쁘게 구천현현보를 밟고 있었다.
쐐애애액!
상제의 쌍검이 허공을 베며 닭살 돋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한 백서휘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회피하지 않았다면 고혼(孤魂)이 될 뻔했다.
상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백서휘는 양손으로 검을 꽉 쥔 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그건 뭐였지?’
천하에 있는 모든 무공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원에 있는 무인 중에 가장 다양한 무공을 견식해봤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겐 경험이 많았다.
그러한 자신이 보기에 조금 전 상제가 보여준 건 일반적인 무공이라기엔 이질적인 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술법이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백서휘는 상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계속 그렇게 거리를 두고 빙글빙글 돌기만 할 건가?”
“당장은.”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상제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백서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이익!
일렁이는 공간을 향해 상제가 쌍검을 빠르게 내뻗었다.
갑자기 우하단과 좌중단에서 상제의 검이 튀어나와 백서휘를 공격했다.
“흡!”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밟으며 두 곳에서 동시에 들어온 검격을 쳐냈다.
채챙!
용의 피로 인해 상승된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피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상제의 공격은 재빨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기이익!
다시 한번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아무것도 없는 좌측에서 검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옆구리를 노렸다.
백서휘는 황급히 강기가 둘린 손으로 난화만천수를 펼쳐 공격을 쳐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었다.
시차를 두고 은밀하게 들어온 공격이 다리가 접히는 부분을 노렸다.
이번 공격을 막지 못하면 외다리가 된다.
백서휘는 몸을 돌리며 황급히 검을 땅에 내리찍었다.
검이 땅에 깊숙이 박히며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이제는 반격해야……. 제기랄!’
기이익!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좌중단에서 꺾어져 들어온 공격이 오른쪽 팔뚝을, 우중단에서 꺾어져 들어온 공격이 왼쪽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서걱!
백서휘는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하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괜히 물은 줄 알았나?”
상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짐짓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처음 당하는 공격일 텐데 막아내다니……. 나보다 전투 경험이 많은 것 같군. 오육십 초식 이내에 끝내지 못하면 어쩌면 내가 밀릴지도 모르겠어.’
공간을 격해 공격하고 굴절해 방어하는 능력은 술법, 초능력이 합쳐진 힘이었다.
중단전과 상단전 두 가지를 쓰는 힘이라 오래 쓰기도 힘들고 체력에도 많은 부담을 주었다.
지금만 해도 백서휘가 강적이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다른 허접한 적이었으면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백서휘는 어떻게 상제를 공략해야 할지 몰라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계속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공격해야 돼.’
백서휘가 공격하기 위해 구천현현보를 밟으며 전진했다.
상제는 그가 이동한 만큼 뒤로 물러나며 공간을 격해 쌍검을 휘두르고 찔렀다.
‘자꾸 뒤로 이동하잖아?’
처음 자신이 힘이 가진 특성을 몰랐을 때만 거리를 주고, 그 이후로 상제는 거리를 주지 않고 있었다.
뭔가 있다.
백서휘는 치명적이지 않은 공격은 맞아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탓에 옷이 피로 검붉게 물들었지만 괜찮았다.
상제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으니까.
한 발자국만 더!
기이익!
상제는 일렁이는 공간에 대고 쌍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어떤 방향으로 휠지 몰라 백서휘는 신중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공간을 격하면서 지연되는 시간이 없다 보니 상제의 공격이 더 빨라졌다.
‘어느 방향으로 오는……. 가로로!’
챙!
공격을 막아낸 백서휘는 전력을 다해 경천신뢰 초식을 펼쳤다.
초식의 이름에 걸맞은 극쾌의 검이 상제를 향해 날아갔다.
상제는 뒤늦게 공격을 알아차리고 뒤로 보법을 밟았다.
스각!
검첨이 상제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자 옷이 잘리며 실금이 그어졌다.
그 실금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주르륵.
공간 굴절을 뚫고 처음으로 상제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백서휘는 기세를 몰아 다시 한번 경천신뢰 초식을 날렸다.
상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기이익!
공간이 일렁거리며 상제를 향해 잘 가던 검의 방향이 이전처럼 휘었다.
마음의 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에 백서휘는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바로 몸을 날렸다.
상제의 쌍검이 허공에 붉은빛 궤적을 두 개 그렸다.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셀 수없이 많은 적과 싸우며 차곡차곡 쌓인 전투 경험은 상제의 힘에 담긴 비밀 중 하나를 알게 해주었다.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굴절시키는 게 불가능해.’
백서휘는 이번에 알아낸 사실이 확실한지 실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제발 맞기를……!
서휘는 다시 거리를 좁혀서는 상제를 향해 천탈기백 초식을 펼쳤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환검의 극의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스각!
상제는 왼쪽 팔뚝을 베이고 난 이후에 뒤늦게 공간을 굴절시켰다.
백서휘가 뒤로 몸을 날리며 입 모양만 움직여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걸 본 상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잡기는 이제 내게 통하지 않아.”
“잡기라…….”
공간의 힘을 완성한 이후에 무공 수련을 덜 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백서휘의 말은 비도처럼 날아와 상제의 가슴에 쿡 하고 박혔다.
‘본신의 실력만으로도 내가 한 수 위라는 걸 보여주마.’
자존심이 상한 상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후 검강이 휘감긴 쌍검을 내리쳤다.
백서휘는 발지의천 초식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지하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대결을 지켜보는 명성교도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채채채채채챙!
초근접전에 돌입한 두 사람은 십수 합을 빠르게 교환했다가 서로와의 거리를 벌렸다.
“하아앗!”
상제는 순식간에 검환을 여러 개 만들어 쏘아 보냈다.
백서휘도 반격할 목적으로 검환을 만들어 흩뿌렸다.
콰콰콰쾅!
천장에 구멍이 커다랗게 뚫리며 천극문의 경내 풍경이 보였다.
답답한 지하보다는 지상에서 싸우는 게 낫기에 백서휘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와버렸다.
상제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곧바로 힘껏 땅을 박차며 높이 도약했다.
백서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검을 던졌다.
그의 검이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상제를 향해 날아갔다.
카앙!
상제는 반격했으나 백서휘가 날린 검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했다.
입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날아간 그는 천극문의 전각 중 하나의 벽을 뚫고 들어가 처박혔다.
‘승기를 잡으려면 몰아쳐야 돼.’
지금처럼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을 때 최대한 상제의 몸에 상처를 입혀야만 했다.
백서휘는 허벅지에 힘을 강하게 주며 땅을 박찼다.
상제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박힌 벽에서 빠져나오려는 게 보였다.
빛살처럼 쏘아진 백서휘는 강기가 휘감긴 손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셀 수없이 많은 보랏빛 손그림자가 노도처럼 상제를 덮쳐갔다.
상제는 다급한 얼굴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콰콰콰콰콰쾅!
백서휘의 손에서 만들어진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지만, 상제는 이를 악물어서 억지로 참아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백서휘가 주도하는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했다.
상제는 검강이 깃든 쌍검으로 백서휘의 목을 노렸다.
양쪽에서 공격이 들어오자 백서휘는 아쉽다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겨우 한숨을 돌린 상제는 쌍검을 손에서 놓았다.
쌍검이 떨어지다 말고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보통 상제는 무공만 쓰거나 공간을 조작시키는 힘만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둘 모두를 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 정도로 백서휘는 강적이었다.
‘자존심은 잠시 접어두고 전력을 다해야겠군.’
기이익!
공간이 일렁거리자 상제는 검을 조종해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이미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기에 첫 번째 공격은 금방 막아냈다.
그런데 두 번째 공격부터는 달랐다.
상제는 한 번만 꺾는 게 아니라 두 번을 더 꺾어서 공격했다.
사선으로 휘둘러진 검이 우측에서 횡으로 베어지더니 마지막엔 왼쪽에서 튀어나왔다.
일도양단할 기세로 떨어지는 검이 백서휘를 스치고 지나갔다.
“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로 그은 상제의 검이 위에 들렀다가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튀어나왔다.
한 일 자로 배에 외상이 나자 백서휘는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했다.
“승리는 내 차지가 되겠군.”
상제가 연이어 공간의 힘을 쓰면서 백서휘를 향해 보법을 밟아나갔다.
채채채채챙!
공간을 격해 날아온 쌍검을 쳐내는 와중에 상제의 주먹이 백서휘의 가슴 정중앙을 노렸다.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백서휘는 황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뒤로 밀려나는 그의 턱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쌍검에 권(拳), 장(掌), 지(指), 각(脚), 퇴(腿)까지 합쳐진 상제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공격 중에서 치명적인 건 다 피하고 막아낸 덕에 피투성이인 외견과 다르게 백서휘는 멀쩡했다.
그런 백서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헉헉헉!”
상제는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지쳤군.’
백서휘도 지친 건 똑같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심즉동의 경지에 오르면서 내공이 정순해진 덕분에 적은 내공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것과 용의 피를 먹은 덕에 체력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적은 내공으로 큰 힘을 내고, 체력도 충분하니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공격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어.’
날아오는 상제의 주먹을 잽싸게 피했다.
쾅!
바닥에 구멍이 나며 지하에 있는 명성교의 본단이 무너져 내렸다.
“도망쳐!”
“피해라!”
두 고수의 싸움에 명성교도들이 죽어 나갔다.
“으음?”
상제의 주먹이 땅에 깊숙이 박혀 빠지지를 않았다.
‘기회다!’
백서휘의 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상제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걱!
옆구리에서 피가 나와 상제가 입은 옷을 검붉게 물들였다.
상제는 겨우 주먹을 빼내고는 다시 쇄도해갔다.
백서휘는 거북이처럼 계속 방어만 하며 반격의 기회를 엿봤다.
‘더 버티자.’
상제의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집중력이 떨어지는지 실수도 잦아지고 빈틈을 쉽게 노출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상제는 처음 싸웠을 때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공격을 허용했다.
푸욱!
백서휘의 검첨이 상제의 오른쪽 허벅지를 뚫고 들어갔다.
상제는 황급히 뒤로 몸을 뺐지만 이미 상처를 입은 후였다.
일안이족삼담사력(一眼二足三膽四力)이란 말이 있었다.
눈으로 상대를 보고, 발로 거리를 맞추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과감하게 기술을 내야 한다는 뜻을 가진 격언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발을 꼽은 건 무인에게 눈 다음으로 발이 중요하단 뜻이었다.
지금 상제는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그 발을 제대로 못 쓰게 됐다.
간격을 재는 것부터 이동하는 것까지 엉망이 됐으니 싸움의 주도권은 백서휘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움직임이 따라주질 않으니 직접 공격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백서휘는 다 피했다.
내공이 부족하여 쌍검으로 견제하는 것도 중단해야 할 상황에서 그랬으니 상제로서는 통탄할 노릇이었다.
‘한 번의 실수로 한두 수 아래의 상대에게 이렇게 밀릴 줄이야.’
패색이 완연함을 느낀 상제는 생각에 잠겼다.
‘온 힘을 다해 부딪혀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건가?’
상제는 한계까지 몰렸다는 사실에 깊은 패배감을 느끼며 쌍검을 손에 쥐었다.
그다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더니 백서휘를 향해 쩔뚝거리며 달려갔다.
‘죽을 각오를 했군.’
백서휘는 눈에 힘을 주고 진지하게 싸움에 임했다.
“하아아앗!”
상제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펼쳤다.
백서휘는 막고, 피하고, 반격하며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분쇄해갔다.
“헉헉헉!”
모든 것을 쏟아부은 상제가 지친 얼굴로 백서휘를 쳐다봤다.
“잘 가라.”
백서휘는 마지막이라는 일념으로 일검관천(一劍貫天)의 초식을 펼쳤다.
하늘을 꿰뚫는 검이 상제의 목에 구멍을 만들었다.
푸욱!
백서휘는 검을 회수하며 허공에 피를 털어냈다.
명성교에 속한 자들이 두려움 어린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긴장이 풀린 백서휘가 휘청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명성교에 속한 자들의 눈에 광채가 깃들었다.
‘지친 건가?’
만약 지쳤다면…….
상제와의 싸움이 그에게 깊은 내상을 남긴 거라면…….
그래서 하나로는 부족해도 명성교도 모두가 차륜전을 펼친다면…….
백서휘가 고개를 든 것은 그때였다.
그의 눈은 무감정했다.
결코 적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생물을 보는 듯한 눈.
추수해야 할 논을 바라보는 농부의 고단함이 담긴 눈에 가까웠다.
‘고단함……. 고단함이라고?’
섬뜩함을 느낀 누군가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다들 도망쳐!”
“나는 백서휘.”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았다는 듯, 지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은 백서휘가 중얼거렸다.
“너희 같은 자들로부터 중원을 지키는 수호문의 문주다.”
그 순간 벼락이 쳤다.
검이 허공을 노닐며 명성교도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농부의 낫질에 속절없이 허리가 베어지는 벼처럼.
농부로 치자면 백서휘는 처음 밭일에 나선 무지렁이라기보다는 수십 년을 밭을 갈아온 능숙하고 노련한 농부라 할 수 있다.
그의 검은 착실했고, 성실했고, 효율적이었다.
다섯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시체들 틈에서 백서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 죽겠네.”
마지막에 남은 명성교의 교인들과 천극문의 문도들까지 죽인 이후에 백서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장사로 떠났다.
가는 동안 여의주로 몸을 치료한 덕에 신법을 쓸 수 있게 되어 장사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