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83화
백서휘와 오룡단을 만난 적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싸우거나 물러나거나.
유향문의 문주가 말한 곳 중에서 물러나는 걸 택한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다섯 곳은 맞서 싸우는 걸 택했고 예외 없이 백서휘의 검에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혈로를 만들며 도착한 정상에는 유향문의 문주가 말한 일곱 번째인 보천검문(補天劍門)이 기다리고 있었다.
“멈춰라! 이곳은 보천검문의……. 크헉!”
검문을 자처한 곳 치고는 검술이 너무 허접했다.
백서휘가 조종하는 이기어검을 막아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눈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다니……!’
살성인 당기준도 놀랄 정도로 백서휘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확인 사살 다 끝나면 말해라.”
“네!”
오룡단이 돌아다니면서 숨통이 붙어 있는 이들을 죽였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제갈선우가 백서휘에게 다가갔다.
“다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 호법을 서라.”
“호법을 왜……?”
“아무 방해 없이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
“이곳으로 오는 자를 막고 소란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면 됩니까?”
“그래.”
제갈선우는 오룡단이 백서휘의 주위를 둘러싼 형태로 오행진을 구성했다.
백서휘는 혁대에 달린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약병을 꺼냈다.
‘이걸 다시 먹게 될 줄은 몰랐군.’
약병에 든 건 감각을 극한까지 증폭시키는 약이었다.
원래는 강자와의 싸움을 앞두었을 때 먹거나 지금처럼 무언가를 찾을 때 먹는 약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강자를 만난 적도 없고, 이렇게 뭔가를 찾을 일이 없어 고문할 상대에게만 약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런 건지 혓바닥에 약을 떨어뜨리는데 이상야릇한 감정이 느껴졌다.
‘시작됐군.’
감각이 점차 증폭되며 남곤산에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근처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때 영물을 찾아야 돼.’
동물이 영물이라고 불릴 정도면 웬만한 무림인보다 훨씬 더 많은 내력을 보유했다고 봐야 한다.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아는 백서휘는 남곤산에 있는 생물 중에 내력이 많은 것 위주로 찾았다.
‘아니고, 아니고, 얘도 아니고……. 뭐지? 얘네?’
심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놈들이 몰려다녔다.
‘이놈들 도대체 정체가……. 아! 그놈들이군.’
여섯 명이란 머릿수와 가진 무력 수준을 생각하면 이놈들은 남궁세가의 섬전단을 전멸시켰던 이들인 게 분명했다.
‘이놈들보다 먼저 영물을 찾아야 돼.’
초집중해서 찾으니 엄청나게 많은 내력을 가진 ‘사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슴이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이동하려는 경로에 자리하고 있다는 거였다.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사슴의 내단을 취하는 걸 막으려면 최대한 빨리 달려가야만 했다.
백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사슴이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그의 행동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오룡단이 눈치껏 따라붙었다.
‘빨리! 더 빨리!’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절경이 뒤로 휙휙 지나갔다.
마음이 급한 백서휘에겐 그 절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백서휘 일행보다 먼저 사슴을 발견했다.
그들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사슴을 계속 압박해갔다.
‘이상하다. 왜 살초를 쓰지 않는 거지?’
정체불명의 고수들에게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사로잡으려 하나?’
왜 사로잡으려고 하는지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이 유리했다.
평범한 짐승들이 그렇듯 영물도 생포하는 쪽보다 죽이는 편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었다.
‘저놈들이 사슴의 힘을 빼놓을 때까지 기다리자.’
백서휘는 거리를 두고 숨어서 정체불명인 고수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때’가 오길 기다렸다.
『여기서 계속 숨어 있다가 ‘하나’에 저쪽을 향해 달려든다. 적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사슴을 죽여. 알아들었어?』
전음을 들은 오룡단의 모두가 전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백서휘와 오룡단을 찾아왔다.
『셋, 둘, 하나!』
백서휘는 빠르게 뛰어가면서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향해 검을 날려 보냈다.
오룡단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의 뒤를 쫓았다.
검강이 휘감긴 검이 빠르게 날아가 정체불명의 고수 중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나머지 다섯의 고수 중 하나가 달려가 생사를 확인했다.
“수인아! 제기랄!”
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는 다른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향해 악귀와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수인이가 죽었어!”
“이 개자식! 가만두지 않겠어!”
나머지 다섯이 무기를 치켜들고 백서휘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수 하나를 죽이고 허공을 떠다녔던 검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쐐애애애액!
나머지 다섯 고수는 백서휘의 검에 대항하기 위해 성명절기를 펼쳤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온 검에 목이 꿰뚫려 죽었다.
두 번째로 가까운 적은 지상에 남을 백(魄)마저 죽일 기세로 목을 베어버렸다.
세 번째로 가까운 적은 다섯 번의 연속 공격에 사지와 목이 분리되어 죽었다.
네 번째로 가까운 적은 힘으로 도를 부수고 난화만천수를 펼쳐 머리를 터뜨려 죽였다.
다섯 번째로 가까운 적은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묘리로 공격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뒤에서 백서휘의 싸움을 지켜보던 오룡단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오룡단! 뭐해!”
“아!”
제갈선우가 다른 이들을 이끌고 사슴이 도망 못 치게 했다.
그다음 오행진을 이용한 합격(合擊)으로 사슴을 죽였다.
‘내단을 취해볼까.’
백서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앞으로 걸어가서는 사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다음 심장이 있을 만한 곳을 빠르게 도려냈다.
심장 근처에 결정이 있었는데, 그 결정에서 엄청난 양의 음기와 양기가 뭉쳐 있는 게 느껴졌다.
‘음기랑 양기를 나눠 볼까.’
백서휘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결정을 붙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양기를, 오른손으로는 음기를 흡기했다.
처음에는 뒤섞여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던 기운들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양기는 왼쪽으로 갔고, 음기는 오른쪽으로 갔다.
덕분에 결정의 왼쪽은 뜨거워지고, 오른쪽은 차가워졌다.
‘됐다.’
백서휘는 정확히 결정의 반을 갈라 음기가 모인 쪽은 품속에 넣었고, 양기가 모인 쪽은 주머니에 넣었다.
“다들 몸은 괜찮지?”
“네.”
“그럼 장사로 돌아가자고.”
* * *
옷을 만드는 천들이 쌓인 작은 창고 안에서 축융과 매부리코 모양의 코를 가진 사내가 마주 보고 앉았다.
두 남녀는 촛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토복의 수하면 백서휘가 어딨는지 알겠군.”
“백서휘는 며칠 전에 호남성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정확히 어디로 간지는 모르겠지만 부하들과 함께 광동성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광동성이라고? 설마…….”
명성교의 교단에서 호남성으로 오는 내내 영물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들려왔었다.
‘백서휘도 그 소문을 듣고 광동성으로 간 게 틀림없어.’
수하들이 백서휘와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축융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한 얼굴로 포목상을 나왔다.
‘광동성으로 가야 한다.’
축융은 홍염(紅焰)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치고 남곤산으로 날아갔다.
긴 비행으로 인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땅에 착지하지 않았다.
‘제발 아무 일 없길…….’
익화사를 백서휘에게 잃은 기억이 있어 더욱 걱정하게 됐다.
불안이 현실화하지 않기를 바라며 수하들을 찾는데 축융의 눈에 여섯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땅에 착지해 시체들이 수하가 맞다는 걸 확인한 순간, 축융은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참을 흐느껴 울던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흉수를 찾겠다는 결심을 했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눈으로 죽은 수하들의 상처를 살폈다.
‘강기에 의한 상처다.’
현 무림에서 검강을 쓸 줄 아는 이를 암중단체까지 따져서 모으면 인원이 꽤 됐다.
그 인원들은 대체로 혼천회와 동맹을 맺은 곳이 거나 아예 소속이 혼천회 그 자체인 자들이 대부분이라 같은 편을 죽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둘 중 하나였다.
백서휘 혹은 종리혁.
‘종리혁이 사도련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어. 백서휘는 광동성 방향으로 떠났다고 했고 그렇다면…….’
축융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호남성 쪽을 바라봤다.
* * *
백서휘와 오룡단은 마차를 타고 장사로 돌아왔다.
“나는 사합원으로 가볼 테니까 너희들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의원에 가. 알았어?”
“네.”
백서휘는 당찬 걸음으로 사합원에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
“처남! 잘 왔네!”
“무슨 일 있습니까?”
“의원에게 데려가 침도 쓰고 약도 먹였는데 열이 내리지를 않네.”
“아이는 어딨습니까?”
“저 방에 아이 엄마랑 같이 있네.”
백서휘는 정하진과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백은하는 훌쩍거리면서 찬물에 적신 천으로 아이를 닦고 있었다.
“그거 잠깐만 멈추고 이리로 나와봐.”
“서휘야, 계속 열이 안 떨어져. 침도 안 통하고 약도 효과가 없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백은하가 뭉개진 발음으로 엉엉 울면서 말했다.
백서휘는 누나를 진정시키고 아이 앞에 섰다.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아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침착하자.’
백서휘는 아이의 기해혈에 손을 대고 장심을 통해 약간의 내공을 주입했다.
아이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백서휘가 품속에서 음의 결정을 가루로 만들어 아이에게 먹였다.
이제 음기를 잘 유도해서 혈맥을 틀어막고 몸에 열을 끓어오르게 하는 양기를 제거하면 됐다.
아이의 몸에 흡수된 음기를 조종하려는데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충격파는 사합원의 건물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주변에 있는 방들의 문짝이 날아가고 창틀이 부서졌다.
백서휘는 난화만천수를 펼쳐 아이 쪽으로 날아오는 문짝과 창틀을 쳐냈다.
외부의 위협에서 아이를 안전히 지키는데 성공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법.
백서휘는 원인을 찾기 위해 바깥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원자의 중심에서 검붉은 화염의 날개를 펼친 축융이 백서휘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백서휘!”
“누구…….”
정체를 물으려는 말을 꺼내는 와중에 축융은 화염구를 다섯 개 만들어 던졌다.
다섯 개 중 세 개는 가족들에게, 나머지 두 개가 백서휘에게 갔다.
백은하와 정하진의 얼굴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드리워졌다.
백서휘의 검집에서 검이 저절로 나오더니 축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쐐애애애액!
두 사람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백서휘의 검이 화염구를 꿰뚫고 지나갔다.
“다들 내 뒤에 서.”
정하진과 백은하가 달려와 백서휘의 뒤에 섰다.
“감히 가족이 사는 곳을……. 그것도 가장 중요한 때에…….”
“먼저 가족을 건드린 건 너다. 정목안! 귀금양! 유토장! 성일마! 장월록! 익화사! 진수인! 기억 안 나느냐?”
다른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익화사와 진수인은 백서휘가 친히 저승으로 보낸 기억이 있었다.
“그것들이 있는 곳으로 너도 보내주마.”
백서휘의 전신에서 유형화된 살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