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82화
“다 먹었어?”
“어? 어.”
“치워도 되지?”
“치우는 건 내가 할게.”
“아니,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거니까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
백서휘는 식탁에 올려진 그릇들을 빠르게 치웠다.
백은하가 그를 돕기 위해 행주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주저앉았다.
“흐윽!”
“누나! 괜찮아?”
백서휘가 후다닥 달려와 백은하를 살폈다.
“아무래도 진통이 시작된 것 같아.”
“산실로 가자.”
백서휘는 백은하를 번쩍 들어 산실에 있는 침상으로 옮겼다.
“산파랑 매형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으, 응.”
백서휘는 이를 악물고 달려가 산파와 정하진을 데려왔다.
“준비는 다 끝나신 거죠?”
산파가 백서휘와 정하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때 말했던 대로 다 준비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저만 산실로 들어갈게요.”
“자, 잘 부탁드립니다.”
정하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산파의 손을 붙잡았다.
백서휘 역시 허리를 꾸벅 숙여 산파에게 인사했다.
실제로는 두 시진 정도지만 체감상 열 시진은 더 지났다고 느꼈을 무렵에 산실에서 산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학사님!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요. 아이 탯줄을 자르시라고요.”
“아!”
정하진은 떨리는 마음으로 산실 안으로 들어갔다.
출산은 별문제 없이 마무리되는 것 같아지자 백서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잠시 후, 정하진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산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너무 크게 기뻐했기에 백서휘는 질문을 안 던질 수가 없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웃으시는 거죠?”
“아들이라네.”
정하진의 대답을 듣자마자 왜 그런지 이해했다.
후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게 정하진과 백은하 부부의 고민 중 하나였다.
그 고민을 이번에 해결했다는 것이 가족으로서 몹시 기뻤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자네도 보겠나?”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벌모세수(伐毛洗髓)도 하고 아이의 근골이 괜찮은지 확인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벌모세수라면 아이가 더 튼튼하고 무공을 더 잘 배울 수 있게 해준다는 그걸 말하는 건가?”
“네.”
“고수에게도 굉장히 고된 일이라고 들었는데…….”
“하하! 할만한 일이니 크게 걱정 않아셔도 됩니다.”
“고맙네.”
두 사람이 산실 안으로 들어가니 산파가 뒷정리하고 있었다.
정하진이 그녀를 돕는 사이, 백서휘는 새로 태어난 조카의 몸을 조심스럽게 만져 근골을 확인했다.
‘근골은 평범하네.’
정수련이 백은하를 닮아 근골이 좋았다면, 이번에 조카의 근골은 정하진을 닮았는지 평범했다.
‘무공을 대성할 팔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벌모세수는 해줘야지.’
체질이 크게 개선되는 만큼 지금 수준보다는 나아지리라 예상됐다.
백서휘는 대해와 같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다음 조카의 명문혈에 장심을 가져다 댔다.
‘건강하게 자라거라.’
백서휘는 강렬한 염원이 담긴 내공을 조카의 몸에 주입했다.
혈도를 튼튼하게 하고, 혈맥을 부드럽게 넓게 만들려는 와중에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맥이 왜 이렇게 양기로 꽉꽉 막혀 있지?’
백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기맥도 그런지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구양절맥(九陽絶脈)?’
아홉 개의 혈맥이 막혀 생기는 병으로 얼마나 막혔느냐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
문제는 조카의 상태가 석 달을 넘기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백서휘는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그때 뒷정리를 다 끝낸 정하진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백서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나?”
“그게…….”
구양절맥에 관한 이야기는 아기를 막 낳은 산모가 있는 방에서 할 수 없었다.
일단은 아버지인 정하진에게만이라도 말해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백서휘는 슬쩍 백은하의 눈치를 보고는 정하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매형, 저랑 밖에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정하진은 처남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은 문제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지.”
두 사람은 사합원을 나와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카가 구양절맥에 걸린 것 같습니다.”
“설마 그 지학(志學)이 되기 전에 열에 아홉은 죽는다는 그 구양절맥을 말하는 겐가?”
“상태가 심각합니다. 지학은커녕 석 달도 못 버틸지 몰라요.”
“아…….”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정하진의 다리가 풀려버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그가 백서휘를 바라보며 물었다.
“치료할 방법은 없는 건가?”
“음기가 강한 영물의 내단이나 영초, 대환단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영단 중 하나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영물과 영초는 쉽게 발견할 수 없지 않나.”
영물과 영초는 인연이 닿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무림인들에게 정설이고 불변의 진리였다.
‘나는 달라.’
영물과 영초를 발견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 백서휘에겐 있었다.
그 방법과 오룡단과 함께라면 영물을 반드시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만, 저는 다릅니다. 제가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을 구해오겠습니다. 그러니 매형은 누나한테 이 일에 대해 절대 말씀하지 마세요.”
“알겠네.”
백서휘는 짐을 챙기면서 수호문의 비고에 있는 영단들을 떠올렸다.
‘영단이 아니라 그 영단을 만들 재료가 있으면 그걸 가져다 조카를 먹이면 될 텐데…….’
암중단체를 털면서 모은 재료들은 모두 후대의 수호문주를 위해 영단으로 만들어놨다.
그 영단은 안타깝게도 수호문 문주의 내공심법인 천의일기공(天意一氣功)과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무공을 익힌 사람이 먹으면 단전이 꼬여 죽게 된다.
‘천의일기공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불가능하고…….’
지금은 나이가 너무 어려 불가능했다.
그리고 설사 나이를 더 먹은다고 하더라도 무골이 평범해 천의일기공의 기초조차 뗄 수 없으리라 예상됐다.
“제기랄!”
백서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는 하오문으로 향했다.
“영물과 영초가 발견된 곳 있나?”
“그건 왜 찾으시는 건지…….”
“닥치고 정보나 가져와.”
백서휘의 날카로운 말투에 깜짝 놀란 유소화는 관련된 모든 정보를 가져왔다.
광동성의 남곤산.
강소성의 운태산(雲台山).
운남성의 애뇌산(哀牢山).
‘한곳에 자리한 영초보다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영물이 발견하기 쉽겠지.’
백서휘는 세 곳 중 유일하게 영물이 확실하게 목격된 광동성의 남곤산을 목적지로 골랐다.
그는 오룡단과 함께 장사를 떠나 남곤산으로 향했다.
* * *
남곤산 근처에 있는 용문(龍門)에 여섯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더 많네요?”
“우리가 출발할 때쯤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으니, 지금쯤이면 이렇게 사람이 많아도 이상하지 않지.”
“이 사람들과 경쟁해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남궁민과 제갈선우의 시선이 백서휘에게로 향했다.
백서휘는 인상을 찡그린 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서 하오문의 표식이 그려진 걸 발견했다.
‘뭐 하는 곳이지?’
시선을 밑으로 내리니 ‘용문제일객잔’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 건물도 크고 1층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다른 곳보다 많았다.
‘하오문이 아니더라도 정보가 모이는 곳 같군.’
백서휘가 객잔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잡담을 나누던 오룡단이 한 박자 늦게 그를 쫓아갔다.
점소이가 밖으로 뛰어나와 여섯 명을 반겨주었다.
“어서 옵쇼!”
“한 명이랑 다섯 명 묵을 방을 내주고, 식사는 이곳에서 제일 잘하는 거로 여섯 명이 먹을 수 있게 차려놔.”
“방부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백서휘와 오룡단은 점소이를 따라 윗층으로 올라갔다.
“이 방과 저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이 방은…….”
“방 설명은 됐고……. 너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예?”
“호남성 지부에서 정보를 모아놓으라고 의뢰했는데 연락 못 받은 건가?”
“아! 귀빈님이셨군요. 연락받았습니다. 정보도 모아놨고요.”
점소이가 ‘정보’란 단어를 말하며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외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들을 수 있겠군.”
“지금 들려드릴까요?”
“그래.”
점소이는 백서휘에게 영물을 찾아 나선 단체와 주요 인물, 영물이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 등을 알려주었다.
“……영물이 영물이긴 한가 봅니다. 생전 처음 보는 고수들도 나타나는 걸 보면요.”
“그건 추가 정보인가?”
“네.”
“그건 얼마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정보이니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정체불명의 여섯 고수들이 함께 몰려다니면서 영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만난 놈 중에 살아 있는 놈이 둘이었는데, 하나는 엊그제 죽었고, 다른 하나는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자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겠군.”
“여섯 명이 남궁세가의 섬전단(閃電團)을 전멸시킨 걸 보면 엄청나게 강한 수준 아니겠습니까?”
점소이의 입에서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남궁민이 움찔했다.
“정보는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백서휘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 점소이에게 주었다.
“식사 맛있게 준비해라.”
“네!”
점소이가 사라지자 제갈선우와 모용진이 백서휘에게 득달같이 말을 걸었다.
“괘, 괜찮겠습니까? 섬전단을 전멸시킨 수준이면 저희는 그자들에게 학살당할 겁니다.”
“과, 관주님, 돈으로 영물의 내단을 사는 게 더 안전하고 확실할 것 같은데요?”
“뭐하는 거지?”
“예?”
“너희는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면 돼.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말이야.”
백서휘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제갈선우와 모용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사, 살려…….”
“식사 시간이니까 이 정도에서 넘어가는 줄 알아.”
백서휘가 살기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모용진과 제갈선우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내려가서 식사나 해.”
“관주님은?”
“나는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잠시 나갔다 오겠다.”
백서휘는 밖으로 나와 객잔과 주루 근처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괜한 짓을 했군.’
모은 정보의 양과 질이 하오문에서 준 것보다 훨씬 떨어졌다.
거기다 기감에 걸리는 무인들의 수준도 너무 낮았다.
용문에는 잔챙이들만 있고 진짜는 남곤산에서 영물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용문에서 하루만 묵고 바로 남곤산으로 떠나야겠어.’
다음 날.
백서휘와 오룡단은 육포와 각종 건식을 챙겨 남곤산으로 떠났다.
전투가 있을지 몰라 체력을 아끼며 갔더니 도착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다행히도 영물을 발견한 사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영물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으로 간다.”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상.”
제갈선우가 백서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의견을 제시했다.
“정상이면 다른 사람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있는 상태에서 영물을 탐색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아! 참고로 이건 의심이나 의문이 아니라 관주님께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모두 죽이면 된다.”
백서휘가 살벌한 말을 남긴 후 성큼성큼 남곤산을 오르자 오룡단이 그의 뒤를 바쁘게 따라갔다.
“헉헉!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에요?”
“모용 동생, 그 말을 지금 일흔두 번 한 건 알고 있나?”
“……너무 힘들어서.”
“입 닫고 그냥 오르기나 하게. 정상에 도착하면 알아서 멈출 테니까.”
제갈선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두에 있던 백서휘가 멈추었다.
2열에서 바쁘게 따라가던 당기준과 황보정석이 무기를 손에 드는 게 보였다.
3열에 있던 제갈선우가 양쪽에 있는 모용진과 남궁민의 팔뚝을 툭툭 쳤다.
“왜요?”
“닥치고 무기 들어.”
“예?”
모용진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무기 들라고!”
제갈선우와 남궁민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뛰어갔다.
“어? 어? 같이 가요!”
모용진이 무기를 뽑는 둥 마는 둥 하며 두 사람을 쫓아갔다.
“멈추시오! 이곳은 우리 유향문(流香門)의 영역이오. 더 가까이 오면 그대들에게 무력을 쓸 수밖에 없으니 속히 물러나시오!”
유향문의 문주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영역이라고? 언제부터 남곤산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었던 거지?”
“그저께 남곤산에 있던 인원 대다수와 합의한 일이오.”
용문의 객잔에 있는 동안 무언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대다수와 합의했으니 이 근방이 당신네 영역이다?”
“그렇소.”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평소라면 웃어줬을 텐데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백서휘의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서 검이 저절로 뽑혀 나오더니 유향문의 문주를 향해 날아갔다.
“어, 어…….”
유향문의 문주가 문도들이 있는 곳으로 피하려 했지만 이미 검이 목에 겨눠진 후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길 비켜.”
“비, 비키겠소.”
“왜 문도들이 그대로 있지?”
“유, 유향문의 문도들은 속히 본문으로 귀환하라!”
유향문 문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유향문의 문도들이 짐을 챙겨 밑으로 내려갔다.
“저, 전부 내려갔으니 이 검을 치워주시는 게…….”
“너 같은 놈들이 정상까지 얼마나 있지?”
“나, 나 같은 놈이라면?”
“병신 같은 합의를 한 놈들 말이야.”
“이, 일곱 곳 정도 되오.”
“머릿수는 얼마나 되지?”
“화, 확실하지는 않지만 100명은 넘고 200명은 안 되오.”
백서휘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유향문 문주의 목에 겨누어졌던 검이 다시 검집으로 되돌아왔다.
“다 죽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백서휘가 중얼거리는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걸 유향문의 문주는 조금 전의 경험으로 알았다.
‘남곤산에 혈겁이 일어나겠구나.’
유향문의 문주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산 밑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