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73화
‘은신 상태를 더 유지하는 건 의미가 없겠어.’
백서휘는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익화사를 제외한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술(瞳術)인가?”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예전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어떤 곳을 칠 때 본 거죠? 혈교? 사독곡? 아니면 사령교?”
익화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나 보군.”
“워낙 유명하셔서요.”
“내가 두렵지 않나?”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나요?”
“내가 한 짓을 아는 놈들은 날 두려워하거든.”
“그건 약한 놈들만 그런 거고요.”
“아무리 봐도 그쪽이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백서휘는 말을 하면서 악화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탄탄한 몸을 지녔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기엔 부족해.’
무인이 아닌데 자신만만하다는 건 다른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둘 중 하나지. 주술사나 도사처럼 주문을 읊어 능력을 발휘하는 자이거나 선천적으로 괴이한 힘을 타고난 자거나.’
드물게 둘 다 가진 자가 있긴 하지만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얜 어느 쪽일까.’
눈앞에 있는 익화사를 살펴보면 도사에게서 느껴지는 정순함은 확실히 없었다.
그렇다고 괴이한 힘을 타고난 자라기엔 마주쳤을 때 특유의 거북함을 느끼지를 못했다.
‘주술사다.’
주술사는 많은 ‘준비’를 할수록 강해진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적의 본거지.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해놨을 거다.
‘이곳에서 나간다.’
적이 유리한 전장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었다.
백서휘는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래서 제가 그쪽을 두려워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게 강하다는 수호문의 문주도 준비된 주술사는 못 이기니까.”
익화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들켜서 더는 눈치를 볼 필요 없어지자 백서휘는 전력으로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염천! 창천! 변천……!’
잔상까지 남기며 이동하는데 뒤에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삐이이익!
발바닥과 땅이 맞닿을 때마다 자신과 대문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백서휘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대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검강이 깃든 그의 검은 대문을 산산조각 냈다.
대문에 걸려 있던 주술이 풀리며 거리 차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백서휘는 전력으로 구천현현보를 밟아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익화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뭘 하는 거지?’
익화사가 부는 피리 소리에는 사이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기운은 밖에 나온 사람들에게로 조용히 흘러 들어갔다.
잠시 후, 사람들이 붉은빛을 띤 눈으로 백서휘를 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짐승 같은데?’
삐이익!
피리 소리가 나기 무섭게 짐승이 된 자들이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짜 준비한 거 맞나? 날 알고 있고 기다렸다는 것치고는 너무 허접하게 준비했는데?’
밖으로 벗어날 때 방해한 주술과 눈앞에 있는 짐승이 된 인간들로는 ‘준비된 주술사’를 자처하기엔 좀 부족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놈들부터 죽이자.’
백서휘는 무심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칼질에 달려들었던 모두의 목이 날아갔다.
그들의 목에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때 피리 소리가 잠시 들렸다가 멈추었다.
‘잔챙이들은 시간을 벌 미끼인가?’
백서휘는 멀찍이 서서 낡은 집의 내부를 살펴봤다.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사막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공간인가.’
이공간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가진 세계를 구축해 주술사가 상대를 압도할 수 있게 만드는 최고난도의 주술이었다.
“자신 있으면 들어오세요!”
익화사가 까르르 웃으며 도발했다.
‘이년을 지금 안 죽이면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어.’
문제는 익화사를 잡으려면 안으로 들어가 불리한 전장에서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백서휘는 굳은 얼굴로 사막에 진입했다.
그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부터 점검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호흡부터…….’
만독불침이 되기 이전에 숨을 쉴 때 독기도 같이 흡입하게 만드는 악랄한 이공간을 경험한 적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이후부터는 이공간에 들어오면 백서휘는 숨부터 먼저 쉬어봤다.
‘들이쉬고……. 내쉬고…….’
촌각이 지나니 폐 쪽에서 불쾌감이 느껴졌다.
만독불침을 무시하는 독인가 싶어 숨을 멈추고 몸을 관조했다.
한참 동안 들여다봤지만 작은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냥 불쾌감만 조성하는 건가?’
불쾌감을 무시하며 감각 상태를 점검했다.
‘감각에는 이상이 없군.’
그때 구슬픈 피리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내력을 귀에 보내 청각을 최대한으로 증폭시켰다.
백서휘는 익화사가 있을 거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모래를 밟고 도약할 때마다 피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찾았다.’
익화사는 녹주(綠州, 오아시스)에 있는 야자수 나무 아래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대화고 뭐고 필요 없었던 백서휘는 검부터 날리고 봤다.
때마침 익화사의 피리 연주가 끝나고 주술이 완성됐다.
그녀는 검이 날아오는데도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끝이…….”
모래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백서휘의 검을 쳐냈다.
심령으로 강하게 연결한 탓에 타격이 제법 컸다.
백서휘는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익화사 쪽을 바라봤다.
익화사의 곁에는 5층 전각만큼이나 크고 날개가 달린 뱀이 서 있었다.
“이무기인가?”
“명사라고 해요.”
“뱀이긴 한가 보군.”
백서휘는 기감으로 은근슬쩍 명사를 훑어봤다.
‘사람으로 치면 하백상보다 조금 약한 수준인가.’
상대할 맛이 나는 요괴겠단 생각이 들었다.
“호호호! 명사를 상대할 엄두가 안 나시나 보네요.”
“글쎄…….”
“솔직하게 무섭다고 고백하면 곱게 죽여줄 의향이 있어요.”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무섭다기보다는 재밌을 것 같아.”
“재미있을 것 같다고요?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명사는 사람으로 치면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로 강한 아이예요. 그런 애가 지금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천하제일? 그럼 내가 이기겠네. 나는 고금제일인일지도 모르는 놈이거든.”
“아! 알았다! 지금 무서워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죠?”
“무서울 리가 없잖아. 너보다 더한 놈들이 내 손에 죽었는데.”
“더한 놈들이라면 누굴 말하는 거예요?”
“당대 천마랑 사독곡의 곡주, 천지회의 회주, 흑철방의 방주…….”
“그 사람들은 주술사가 아니잖아요.”
“주술사도 많이 죽였어.”
“그건 그 사람들이 준비를 덜 했나 보죠.”
“활강시 수백 구가 덜 준비한 거야?”
“죽이지 못했으면 덜 준비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준비했으면 당신을 죽였을 테니까요.”
“너는 준비를 되게 잘했다고 생각하나 봐?”
“네.”
익화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한 놈들 다 나한테 죽었단 걸 알아둬.”
백서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며 검이 날아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모래에 처박혀 있던 검이 자석처럼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기대할게요.”
익화사는 명사의 등에 있는 안장에 올라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반투명한 막이 그녀 주위에 생겨났다.
등에 탄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용 주술 같았다.
삐이이익!
익화사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명사가 네 개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내가 죽인 주술사 중에 가장 준비를 잘했던 놈이 혈마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날 죽이려고 활강시 수백 구를 준비했거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계속 들어봐.”
“그때는 현경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안 돼서 어검술이 미숙했어.”
백서휘가 하늘에 있는 명사를 향해 검을 던졌다.
익화사가 명사의 고삐를 오른쪽을 당겨 검을 피했다.
백서휘의 검은 허공을 맥없이 찌르고 땅으로 추락했다.
“지금처럼요?”
“그래, 지금처럼 미숙했지. 그래서 손 말고 다른 수단으로는 검을 조종할 수가 없었어.”
백서휘가 검결지로 명사를 가리켰다.
추락하던 검이 허공에서 꼿꼿하게 서더니 명사를 향해 날아갔다.
처음에 그냥 던졌을 때보다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갑자기 이게 무슨…….”
뒤에서 날아온 공격 화들짝 놀란 익화사가 신기에 가까운 조종 솜씨로 회피 기동했다.
“한 손으로는 검을 조종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난화만천수란 무공을 펼치며 활강시들을 정신없이 죽였지. 근데 아무리 죽여도 끝이 안 보이는 거야.”
검의 움직임이 눈에 익자 익화사와 명사는 백서휘의 검을 여유롭게 피했다.
‘다시 주도권을 가져와야 돼.’
익화사가 고삐를 강하게 당겨 공격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명사가 날개를 몸에 바짝 붙도록 접고는 수직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백서휘는 고개를 치켜들고는 명사가 머리 위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익화사와 눈이 마주쳤다.
백서휘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구천현현보를 밟아 옆으로 피했다.
익화사와 명사는 다시 하늘 높이 날아갔다.
“체력은 떨어지고 내공은 점점 줄어갔어.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을 때 어검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거야.”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눈으로 검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심령과의 연결이 더 강력해진 덕에 검이 명령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종전보다 빨라졌다.
“아래, 우측, 우측, 위…….”
익화사와 명사는 백서휘의 공격을 피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검을 눈으로 조종하게 되니까 난화만천수를 양손으로 쓸 수 있게 돼서 활강시를 상대하는 게 좀 편해졌어. 문제는 여전히 수백 구의 활강시들한테 포위당한 상태였다는 거야. 죽을 길밖에 안 보였던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위기를 타개한 줄 알아?”
익화사와 명사를 공격하던 검이 다시 백서휘의 손으로 돌아갔다.
둘은 명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백서휘가 어검비행으로 빛살처럼 날아와 명사의 날개를 모두 잘라버렸다.
스걱!
익화사와 명사는 높다란 사구 위에 추락했다.
백서휘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는 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검비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덕에 활강시들을 다 물리칠 수 있었지. 다음에 할 얘기는 주술사와는 다른 의미로 준비를 많이 한 곳에 관한 이야기야.”
익화사가 도망가려고 몸을 돌렸다.
“어딜 가.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
백서휘는 검을 조종해 익화사 앞을 가로막았다.
“자, 다시 시작한다. 이놈들은 중원진출을 하려고 무려 백 년을 준비했어. 나는 그놈들이 백 년 동안 준비한 전력을 막으려고 십만대산의 입구를 일주일 동안 막았어. 그때 내가 그놈들 상대로 펼친 무공이 있는데……. 아! 이건 설명보다 보여주는 게 낫겠다. 잘 봐.”
백서휘가 명사의 거대한 몸을 향해 난화만천수를 전력으로 펼쳤다.
휙휙휙휙휙휙!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뻗어진 백서휘의 손이 명사의 몸을 터뜨리고, 꿰뚫고, 찢어발기고, 바스러뜨렸다.
“다음은 천지회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소환한 이계의 괴물을 죽인 일인데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으니, 이계의 괴물을 죽인 결정적인 한 방에 대해서만 말할게.”
“사, 살려…….”
“결정적인 한 방은 이거였어.”
백서휘는 포도송이처럼 많은 검환을 만들어 익화사에게 쏘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