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67화
무한을 떠난 지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을 때, 백서휘와 우염상, 종리연을 태운 마차가 장사에 들어섰다.
“뭐해. 안 내리고?”
“예?”
“기숙사로 안 돌아갈 거야?”
“아, 돌아가야죠.”
종리연이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사도련 련주의 딸이라는 신분 덕택에 제갈세가 내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었다.
그렇게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다가 학무관의 조교로 신분이 한순간에 격하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중에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백서휘는 마차를 도화루 쪽으로 몰았다.
“집에 가는 거냐?”
“아니, 하오문.”
“하오문은 왜?”
“내가 없었을 때 벌어진 일에 대해 들으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탄 마차는 도화루에 도착했다.
쪼그려 앉아서 칡뿌리를 잘근잘근 씹던 점소이가 백서휘를 발견했다.
“어?”
“오랜만이야. 지부장은 잘 있지?”
“자, 잘 있습니다. 이리로 모셔올까요?”
“내가 안으로 들어갈 테니까 이쪽이나 돌봐줘.”
백서휘가 뒤쪽에 서 있는 우염상을 엄지로 가리켰다.
“최고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결제는 이따 내려와서 할게. 그래도 되지?”
“예, 됩니다.”
우염상을 점소이에게 맡기고 백서휘는 밀실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유소화가 밀실로 들어왔다.
“잘 지냈지?”
“저는 잘 지냈는데…….”
“잘 지냈는데? 왜 뒷말을 질질 끄는 거야. 다른 사람은 잘 못 지냈나 보지?”
“……다툼이 있었어요.”
“다툼?”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의 다툼이요.”
“박힌 돌? 굴러온 돌?”
“박힌 돌은 남궁유운과 장우량이고, 굴러온 돌은 귀빈님이 없을 때 고용된 이들이에요.”
“내가 없을 때 고용된 이들에 대해 말해봐.”
“십팔반무예와 기마술을 가르치기로 한 임철우 사범이 가르치고, 산법과 천문 같은 잡기는 구양진 사범이 가르치기로 되어 있어요.”
“그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의 다툼의 승자는 어느 쪽이야?”
“아직 결판은 안 났어요. 그런데 신세력 쪽이 무력 수준은 더 높아서 싸움이 나게 되면 임철우와 구양진 쪽이 이길 가능성이 커요.”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지는 알아?”
“처음에는 사소한 걸로 싸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이 커지더니, 이제는 사범으로서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로 싸우고 있어요.”
“사범으로서의 자격이라…….”
백서휘는 싸움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상상해봤다.
남궁유운과 장우량의 성정과 가진 능력을 생각하니 바로 그림이 그려졌다.
“굴러온 돌 쪽에서 남궁유운을 욕하는 형국인가? 장우량은 주도권 다툼이라고 생각해서 남궁유운을 밀어주는 중이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았어.”
‘화화공자’로서의 남궁유운은 확실히 남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게 더 어울렸다.
하지만 ‘화공’과 ‘악공’으로서의 남궁유운은 남을 가르칠 능력이 충분했다.
아마 임철우 쪽은 화화공자 시절의 남궁유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깃장을 부리는 것일 터였다.
“그것 말고는 별일 없지?”
“네, 이것 외에는 큰일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어요.”
“다행이네.”
백서휘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시게요?”
“가야지.”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무슨 질문?”
“학무관은 언제쯤 여실 거예요?”
“내가 서장에서 돌아오면 바로.”
“서장이요?!”
“그럴 만한 일이 있어.”
“그러면 학무관 여는 게 너무 늦어지지 않아요?”
“지금 열어도 관원 받는 건 힘들어.”
“왜요?”
“주변에 있는 성이며 도시들이 정파, 사파 가리지 않고 다들 초상집이잖아. 그런 분위기에서 애들을 학무관에 보내겠어? 나 같으면 안 보내.”
“전쟁은 언제쯤 멈출까요?”
“글쎄…….”
무림맹과 사도련 둘 다 내부 정리를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 협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종리혁이 딴맘 먹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백상이 죽으면서 무게추가 사도련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나면 정파 쪽엔 종리혁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모르겠다.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암중단체의 일도 아니고…….’
종리혁이 정파의 씨를 완전히 말리려고 한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흘러가는 대로 놔둘 생각이었다.
“언제가 됐든 멈추겠지.”
백서휘는 밀실을 빠져 나와 도화루로 갔다.
우염상이 입을 헤벌쭉하게 벌린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서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점소이에게 술값을 지불했다.
“우 노괴! 가자!”
“내 신경 쓰지 말고 일 더 보아라.”
“일 다 봐서 다시 나온 거야.”
“생각 좀 한번 다시 해봐라. 분명 빠뜨린 일이 있을 게다.”
“이러면 서장까지 못 가.”
“알았다. 알았어. 간다! 가!”
우염상이 훌쩍 뛰어올라 짐칸에 탔다.
“앉았어?”
“그래.”
“그럼 출발한다.”
백서휘는 마차를 몰고 사합원으로 향했다.
채찍질을 열심히 한 덕분에 도착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누나!”
사합원 안쪽에서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벼운 걸 보면 백은하는 아닌 듯싶었다.
대문이 열리고 나온 것은 정수련이었다.
“삼촌!”
“어? 수련아!”
정수련은 키가 한 뼘 정도 더 자라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봐서 이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 있던 우염상이 이유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는 정수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백서휘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는 다시 정수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요?”
“그게…….”
백서휘는 말을 꺼내면서 지난 행적을 뒤돌아봤다.
슬프게도 아이에겐 말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일이 있었어.”
“언제까지 그 일이 있는 건데요?”
“그게 왜 궁금한데?”
정수련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해 봐.”
“……내일 장터에서 인형 사주면 안 돼요?”
“내일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모레요.”
“모레엔 내가 여기 없을 거야.”
“또 어디 가요?”
“응. 여기서 엄청나게 먼 곳으로 가야 돼.”
“왜요?”
“여기 있는 이 할아버지를 데려다주고 와야 해서 그래.”
“안 가면 안 돼요?”
정수련은 눈물을 글썽이며 백서휘를 올려다봤다.
“미안한데 그건 안 되겠다. 이 할아버지한테도 사정이 있거든.”
그때 등 뒤에서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안 떠난다.”
“뭐?”
백서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돌아봤다.
“내일 안 떠난다고.”
“갑자기 왜? 아! 혹시 수련이 때문이야? 그러면 그러지 않아도 돼.”
“그 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다.”
“다른 이유? 어떤 이유?”
“그건 알 거 없다.”
“그럼 언제 떠날 건데?”
“영원히 안 떠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정수련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우염상을 빤히 바라봤다.
‘서장까지 안 가서 좋긴 한데, 이러면 셈을 치르는 건 어떻게 되는 거지?’
만년한철로 만든 갑옷인 묵룡갑을 제작해주는 대가로 백서휘는 우염상의 도주를 도와주기로 했다.
근데 그 우염상이 지금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심지어 왜 이러는 건지 그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고 있었다.
‘나보고 어떡하란 거지?’
다시 합의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셈을 다 치른 거로 해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하면서 골머리 썩지 말고 그냥 직통으로 물어보자.’
백서휘는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않고 시원하게 말을 했다.
“이러면 셈 치르는 건 어떻게 되는 거야?”
“셈? 아! 갑옷?”
“어.”
“내가 포기하는 것이니 너는 대가를 다 치른 거나 다름없지.”
“진짜?”
“그래.”
“그럼 나중에 가서 물러달라느니 그런 말 하지 마. 이걸로 끝난 거니까.”
“그러마.”
서장으로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니 전신이 가벼워졌다.
백서휘는 정수련과 함께 사합원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백은하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앞세우며 원자로 나왔다.
“얘기는 다 끝났어?”
“어.”
“그러면 식사하자.”
백서휘와 우염상이 동상방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잔칫상에 버금갈 만큼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정하진은 상석이 아닌 곳에 앉아 있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거기는 상석이라 내가 앉으면 안 되는 자리 같은데…….”
우염상이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음식 다 식으니까 빨리 앉아.”
“아, 알았다.”
잠시 후, 모든 이들이 착석해서 식사를 했다.
우염상은 오랜만에 겪는 따뜻함이 너무 강렬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백서휘는 그런 그를 보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 * *
장사로 돌아온 지 두 달쯤 흘렀을 때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가 자하무관의 대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쾅쾅쾅!
백서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걸어가 대문을 열었다.
“뭐야.”
“흑웅표국에서 왔습니다.”
“흑웅표국? 거기서 여긴 왜……. 아! 누나 찾으러 온 거구나. 백은하란 사람을 찾는 거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사합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려는데 흑웅표국에서 온 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아! 객원 무사로 일하셨던 백 무사님을 뵈러 온 게 아니라 ‘백서휘’란 분에게 서신들이랑 표물들을 전하러 왔습니다.”
“서신이랑 표물? 어디서 온 건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수결과 함께 받았다는 글을 적어주시겠습니까.”
백서휘는 종이에 수결과 ‘받았다’라는 글자를 대충 휘갈겨 썼다.
“감사합니다.”
흑웅표국에서 온 자는 수레를 냅두고 다른 곳으로 갔다.
“수레 놓고 갔어!”
“그거 전부 대협 겁니다.”
“뭐?”
백서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수레와 그 안에 든 표물들을 바라봤다.
“이게 나한테 다 왔다고? 뭐지? 생일이라면 한참 멀었는데?”
백서휘는 수레를 밀며 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야.”
수레 위에 있는 서신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의 봉인을 뜯어 누가 보냈는지부터 확인했다.
“황보세가?”
아무리 생각해도 황보세가와는 연락할 만한 일이 아예 없었다.
아니, 아예 인연이란 게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림맹 내부를 정리할 때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나한테 온 게……. 맞잖아. 뭐지?”
백서휘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서신을 빠른 속도로 읽어갔다.
“다 읽었다.”
서신에 있는 미사여구와 꼬아놓은 언어를 빼니 내용이 아주 간단해졌다.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라……. 속내가 아주 노골적으로 보이네.”
다른 곳에서 보낸 서신도 이런가 싶어 살펴봤다.
대체로 내용은 황보세가의 것과 비슷했다.
덜 노골적이냐, 더 노골적이냐의 차이와 가문의 이름이 다를 뿐이었다.
“뭐 선물은 고맙게 잘 받겠지만 인연을 이어갈 일은 없을 것 같네.”
백서휘는 서신을 한데 모아 삼매진화로 태워버리려는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얘네들 이용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번개가 연달아 치며 오대 세가의 돈을 빨아먹을 계획이 만들어지고,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좋았어.”
백서휘는 오대세가에서 보내온 서신에 코를 가져다 댔다.
종이와 먹물에서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한 돈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