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56화
“내일 떠날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백서휘의 폭탄선언에 황씨 부자가 식사를 하다 말고 얼어붙었다.
“조금 더 머물다가 가거라.”
“우 노괴 체력이 회복되는 걸 기다리느라 사흘을 썼어. 중간에 숭산까지 들를 걸 생각하면 내일은 무조건 북경을 떠나야 돼.”
“숭산이면 소림사가 있는 곳 아니냐? 거긴 또 왜 들르는 게냐?”
“혼내 줄 놈이 있어서.”
백서휘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리며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른 놈도 아니고 너한테 걸리다니 참으로 불쌍한 놈이로구나. 쯧쯧!”
“동생 잘못 둔 죄로 죽는 거지, 뭐.”
백서휘는 툭 던지듯 가볍게 말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황일승과 황석준, 우염상은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숭산에서 소림의 사람을 죽인다고?’
세 사람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미친놈!’
세 사람은 동시에 백서휘를 다시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소림 때문에? 소림 때문이 맞다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놈이 사문의 힘만 안 빌리면 나도 개인 대 개인으로만 해결할 생각이니까.”
“사문의 힘을 빌려오면 그때는 어떡하려고?”
“그때는 소림을 수년간 봉문시켜야지.”
“진심이야?”
백서휘가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더 궁금한 건 없지?”
“없다.”
“나는 그럼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게.”
“밥 더 안 먹고?”
“먹을 만큼 먹었어.”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비어 있는 밥그릇을 보여주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짐을 싸야 하는데…….”
팔짱을 낀 채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가져가야 할 짐이 많았다.
우염상이 만든 갑옷과 황씨 부자가 챙겨준 가족들의 선물을 챙겨가려면 마차가 있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우염상이 다시 쓰러지더라도 마차가 있으면 편하게 옮길 수 있겠지.’
백서휘는 밖에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세웠다.
“할아범이나 석준이한테 장사까지 타고 갈 짐마차가 필요하다고 전해줘.”
“네!”
조금 기다리니 말을 전한 하인이 백서휘에게로 돌아왔다.
“주인어른께서 사정시(巳正時, 오전 10시 30분)에 마차를 준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일찍’은 안 되나?”
“얼마나 일찍 준비하길 원하시는 건지…….”
“묘시(卯時, 오전 5시 30분~7시 29분)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갈 길이 머니까 일찍부터 출발해야지.”
“한 시진 늦게 간다고 해서 숭산이 없어지거나 무너지겠습니까.”
“할아범한테 무슨 지령이라도 받았어?”
“지령이 아니라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음…….”
하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한 시진 일찍 가나 늦게 가나 숭산에 도착하는 시간은 별 차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좋아, 묘시가 아니라 진시에 가도록 하지.”
“주인어른께 시간이 바뀌었다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하인들이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빨리 출발하고 싶었던 백서휘는 그들을 도와 마차에 짐을 실었다.
그때 황일승과 황석준이 정문을 열고 나왔다.
두 사람은 미안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백서휘가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물었다.
“왜 그러긴. 네가 떠나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느냐.”
“또 오면 되지, 뭐.”
“언제 올 건데?”
“내가 지금보다 여유가 있을 때?”
“그럼 만나기 힘들겠구나.”
내심은 어떨지 모르지만 황일승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왜 만나기가 힘들어.”
“네게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엔 달라.”
“나 죽기 전에 한번은 보러 와라.”
“한 번만 보러 올 것 같아? 수십, 수백 번 올 거니까 몸 관리 잘해.”
“……알았다.”
백서휘의 시선이 황석준에게로 향했다.
“너는 뭐 나한테 할 말 없어?”
“아버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셔서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
“그래, 잘 가라.”
백서휘가 마부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염상은 황씨 부자에게 포권을 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으랴!”
백서휘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북경을 떠났다.
* * *
등봉(登封)에 도착한 백서휘와 우염상은 작고 허름한 객잔에 방을 잡았다.
“이곳이 정말 하오문이 운영하는 곳이 맞는 게야?”
백서휘가 창밖을 쓱 확인해 보고는 입을 열었다.
“맞아.”
“소림의 앞마당에서 어떻게 이렇게 운영할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소림도 알고 있을 거야. 이곳이 하오문의 초소 같은 곳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가만히 둔다고?”
“이곳이 사라져서 어둠 속으로 더 깊숙이 숨어버리면 소림도 손해거든.”
그때 누군가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인사를 꾸벅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북경에서 서신 좀 전해달라고 했던 거 알지?”
“압니다.”
“그거 각운한테 제대로 전달했어?”
“제대로 전달했습니다.”
“그럼 그쪽에서 나를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겠네?”
“그렇습니다.”
“한 번 더 서신을 전할 수는 없는 거지?”
“돈과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하나만 더 전달해줘.”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양손을 내밀었다.
“아! 서신은 지금부터 써야 돼.”
“지필묵을 가져다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최대한 빨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더벅머리를 한 남자는 지필묵을 가져와 백서휘에게 건넸다.
백서휘는 지필묵을 받아 일필휘지로 각운에게 할 말을 써 내려갔다.
별 내용은 없었다.
내일 유시(酉時)까지 소림사로 찾아갈 테니 목 닦고 기다리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자, 여기.”
백서휘는 서신을 접어 더벅머리를 한 남자에게 건넸다.
더벅머리를 한 남자는 서신을 품속에 고이 넣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아! 돈?”
“은자 다섯 냥만 주시면 됩니다.”
“바로 근방에 있는 곳에 서신 하나 전달하는데 은자가 다섯 냥이나 필요하다고?”
“귀빈님이라 싸게 해드리는 겁니다. 각운한테 서신을 제대로 주려면 거쳐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솔직히 이걸로도 힘들어요.”
“음……. 좋아 세 냥을 더 주지.”
백서휘는 은자 여덟 냥을 꺼내 더벅머리를 한 남자에게 건넸다.
더벅머리를 한 남자는 감사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설마 도망가지는 않겠지.”
백서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 *
“각운, 안에 있는가?”
소림의 계율원주(戒律院主)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고 있던 각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계율원주십니까?”
“그렇다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각운이 미닫이문을 옆으로 열며 밖으로 나왔다.
“계율원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서신을 전해주러 왔네.”
“누구한테 온 서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도 잘 모르네. 내 밑에 있는 아이 중 하나가 이걸 각운 자네에게 전해야 한다더군.”
“그 아이는 누구한테 이걸 받았답니까?”
“주방에서 허드렛일하는 아이에게 받았다더군.”
각운은 본능적으로 백서휘가 보낸 서신이란 걸 알아차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
계율원주는 미심쩍은 눈으로 각운을 바라봤다.
“정말 없습니다.”
각운이 담담한 척하며 말하자 계율원주가 눈에 힘을 풀었다.
“서신을 전했으니 난 이만 가보겠네.”
“서신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각운은 계율원주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확인까지 했다.
“가셨군.”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쳐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던 각운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목을 닦고 기다려라?”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각운은 방장실(方丈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장실 앞에 도착한 그는 승복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말했다.
“방장 사백 안에 계십니까?”
“누구신가.”
“각운입니다. 방장 사백.”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방장 사백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으로 들어오게나.”
소림의 방장, 혜공(慧空)이 불경을 덮으며 밖으로 소리쳤다.
각운은 탁자 위에 놓인 불경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방장 사백께서 불경 읽는 시간인 줄 모르고…….”
“되었네. 찾아온 이유나 말해보시게나.”
“내일 경내에서 소란이 있어도 이해를 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소란? 무슨 소란을 말하는 겐가.”
“내일 개인적인 일로 어떤 시주가 절 찾아올 겁니다.”
“개인적인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시주가 누구인지 확실히 말하게.”
“……개인적인 일은 속세에 두고 온 연과 관련된 일입니다.”
“얼마 전에 찾아왔다는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그 동생을 망하게 한 자가 내일 저를 찾아온다고 합니다.”
“무슨 일로?”
“제 목을 치겠답니다.”
“사질과도 원한이 있는가?”
“없습니다.”
정보만 샀지 실제로 혼내려고 한 적은 없기에 각운은 혜공에게 당당하게 없다고 말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어찌 사질의 목을 친다고 소림으로 온다는 건가?”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혜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숭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운다는 건 솔직히 믿기 힘드네. 진실되게 말하게나.”
“정말 원한이 없습니다.”
각운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러면 일이 잘못돼도 소림의 이름으론 도와줄 수가 없다는 걸 알아두게.”
“제가 한 거라고는 개방을 통해 그자의 정보를 알아본 겁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개방에서 정보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보를 얻지도 못했고, 혼내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적도 없습니다.”
각운은 찾아가서 혼내려고 짐까지 다 쌌지만, 서신을 받고 숭산에 남았다는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일에 개방이 어느 정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네.”
“예?”
“자네가 정보를 사려고 했단 사실을 그자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개방에서 알려줬을 게야.”
“그자가 뭐라고 개방이 알려주겠습니까. 동생 말에 따르면 그자는 작은 무관의 관주일 뿐입니다.”
“그럼 개방이 아니라 자네 동생이 입을 잘못 놀렸을 수도 있겠구만.”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각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음……. 그자가 소란을 피우면 자네가 확실히 제압할 수 있겠나?”
“동생 말에 의하면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사라고 했습니다.”
“자네로 충분하겠구만.”
“예.”
“소란을 피우는 거 이해해주겠네. 대신, 이걸 기회로 삼아서 향화객(香火客)들과 타 문파 사람들에게 소림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게나.”
“소림이 강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넣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 밀리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믿겠네.”
“소란 피우는 거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운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는……. 용건이 끝났으면 물러가보게나.”
“네.”
각운은 방장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이란 말이 왜 있는지 알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