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55화
괜히 중원제일전장의 주인이 아닌지 황일승의 수완은 역시 대단했다.
그는 북경에서 최고로 좋은 대장간을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빌렸다.
“이제 운철이랑 가죽만 있으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되겠다.”
“곧 가져온댔어.”
대장간에서 한 식경을 기다리니 황일승이 짐꾼들과 함께 운철과 최고급 가죽을 가져왔다.
운철의 양은 진현에게서 얻은 만년한철과 비견될 정도로 많았다.
“운철이랑 가죽이 이 정도면 갑옷을 만드는 데 충분합니까?”
“추, 충분합니다.”
우염상은 절세 미녀를 보듯 운철 더미를 바라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봅시다.”
“살펴 가십시오.”
“나중에 봐!”
백서휘와 우염상이 손을 하늘 위로 뻗고 좌우로 흔들었다.
황일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꾼들과 함께 황가장으로 떠났다.
“엄청 많네.”
“그래, 엄청 많아. 이 정도면 전신 갑옷을 만들 수도 있겠다.”
“전신 갑옷?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겠어?”
“나 화령철장이다.”
우염상의 말에서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운철은 처음 만져 본다며? 만년한철이랑 합치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고.”
“날 믿어라. 첫 번째로 만든 것도 성공적으로 만들었으니까.”
우염상은 난관을 무릅쓸 거라 예상되는 일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역시 마음속에 도전 욕구가 가득한 사람다웠다.
“만년한철과 운철로 만든 첫 번째 물건이 뭔데?”
우염상은 묵빛이 감도는 망치를 흔들어 보여줬다.
“그게 만년한철이랑 운철로 만들어진 물건이야?”
“그래.”
우염상은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망치를 들여다봤다.
“사연이 있나 보네.”
“있지.”
사연을 물어보면 우염상이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았다.
백서휘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치수는 언제 잴 거야?”
“네 치수는 딱 보면 답이 나와서 안 재도 된다.”
“다 만들어서 착용해봤는데 안 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럴 일 없다.”
우염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나는 다른 곳에 일 보러 간다?”
“작업에 집중해야 하니 앞으로 보름 동안은 이곳에 오지 마라.”
“나만?”
“당연히 다른 사람도 오면 안 되지.”
“할아범한테 말해서 아무도 못 오게 조처를 해둬야겠네.”
“그래라.”
백서휘는 대장간을 나와 하오문의 본단으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허리를 굽히고 있던 하오문의 문주가 정원을 가꾸다가 말고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아이고! 북경엔 언제 오셨습니까?”
“아줌마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수준급이야.”
“호호호!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황가장에 정체 모를 고수가 출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귀빈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했었지만요.”
“북경에 온 지는 좀 됐어.”
“화령철장 우염상을 찾으러 왔다가 황 대인의 칠순 소식을 들은 겁니까?”
“예리한데? 점쟁이 해도 되겠어.”
“허허허! 그 소리는 또 오랜만에 듣네요.”
하오문 문주가 주먹만 한 얼굴을 그보다 작은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왜? 종종 듣지 않았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점점 감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제자 중 하나한테 문주 자리를 물려줘야 하나 고민하곤 해요.”
“유소화가 그 얘기를 들으면 좋아하겠어.”
“하하! 그 아이가 유력하긴 하지만, 확정된 건 아니에요. 아! 이 얘기는 귀빈님이니 하는 얘기에요. 그러니 그 아이에겐 전하지 말아주세요.”
“그러지.”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혹시 호남성 지부로부터 연락 안 왔어?”
“십팔반무예와 기마술을 가르칠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연락이 오긴 했었어요.”
“그 이후엔 없었어?”
그때 하늘 위에서 매가 한 바퀴 돌다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연락이 온 것 같네요.”
하오문의 문주가 보호 장구를 낀 후 허허 웃으며 팔에 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매는 한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가 그의 팔에 앉았다.
“본단에 귀빈님이 들리게 되면 십팔반무예와 기마술을 가르칠 자로 괜찮을 만한 사람을 구했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뭐, 이렇게 전했으니, 전한 건 전한 거겠죠?”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장사의 근황을 들으려면 개방을 가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덕분에 소식 하나를 들었네.”
“이 소식을 전한 게 공짜가 아니란 건 알고 계시죠?”
“알아.”
백서휘는 돈주머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하오문의 문주에게 던졌다.
“장사로는 언제 돌아가실 예정이에요?”
“내려가는 건 보름 이후에 생각할 예정이야.”
“어떤 경로로 가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왜 묻는 건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드리려고요.”
“음……. 좋아, 말해주지. 북경에서 출발해서 하남성 정주(鄭州)를 거친 다음……. 잠깐만.”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각운 그놈이 아직 출발을 안 했다면 장사에서 승부 볼 것 없이 숭산에서 승부를 보면 되잖아?’
어차피 하남성을 거쳐서 가는 거 정주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문제는 지금 각운이 어디에 있느냐인데…….’
개방은 소림의 눈치를 볼 일이 커서 각운과 관련된 의뢰를 하기 껄끄러웠다.
예전부터 친한 데다 사파 계열인 하오문에 의뢰를 하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내가 말한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봐 줄 수 있나?”
“호호호호! 돈과 인력이 들어가면 안 되는 일도 되는 법이에요.”
“그럼 충분히 돈을 줄 테니까 하나 알아봐 줘. 소림의 각운이란 놈인데…….”
“각운이라면 십팔나한의 대형격인 인물 아닌가요? 그자라면 아직 숭산에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확실해?”
“구파일방의 주요 무인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일은 저희가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에요.”
각운과 길이 엇갈리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혹시 그 각운한테 서신도 전해줄 수 있나?”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돈과 인력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은 없어요.”
“돈을 줄 테니까 각운 그놈한테 내가 찾아갈 테니까 숭산에서 기다리라고 좀 전해줘.”
백서휘는 돈을 꺼내 하오문 문주에게 건넸다.
“그러죠.”
“그럼 나는 이만 가볼……. 아! 경로를 알려주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준다고 그랬지? 하남성에서 등봉을 거친 다음에는 호북성의 조양(棗陽)을 거쳐서…….”
백서휘는 어떤 식으로 갈지 그 경로를 대충 알려주었다.
“다시 절강성에 들를 일은 없겠네요?”
“갈 일은 딱히 없지. 최단 경로로 갈 거니까.”
“그럼 크게 걱정할 일은 없겠어요.”
“절강성 쪽에 무슨 일이 터졌나 보지?”
“강서성과 절강성 사이에 있는 선하령(仙霞嶺) 인근에서 무림맹과 사도련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어요.”
“그놈들 싸우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다 말겠지.”
“이번은 달라요.”
“왜?”
“사도련 련주의 딸이 실종됐잖아요.”
유소화가 하오문의 문주에게 장사에 종리연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 같았다.
스승한테도 숨긴 걸 보면 유소화가 의리가 없지는 않았다.
“사도련 련주의 딸이 실종된 거랑 무림맹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
“사도련 련주는 무림맹이 딸을 납치해갔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증거는 있대?”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오문의 문주가 모르겠다는 걸 보면 이번 일은 흐지부지 마무리되겠네.”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은 하고 있잖아?”
백서휘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 하오문의 문주는 침묵했다.
“그것 말고 나한테 알려줄 만한 건 없는 거지?”
“예.”
“그럼 난 가볼게.”
하오문의 본단을 나온 백서휘는 개방의 북경 분타에 들러 연락이 왔는지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나?’
답장이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황가장으로 돌아온 백서휘는 이른 시일 안에 답장을 받길 기도하며 잠들었다.
* * *
보름 후.
백서휘는 생일선물을 기다리던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우 노괴! 나 왔어!”
쇠를 두드려서 시끄러운 것도 아닌데 대장간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지?’
백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다니까 왜 반응을 안 해! 서운하……. 어? 우 노괴!”
우염상이 죽은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굳은 얼굴로 그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보니 맥박이 힘없이 뛰었다.
백서휘는 바로 진기를 불어넣어 우염상이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으으으!”
“정신이 들어?”
“……여긴 어디냐?”
우염상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일단 저승은 아니야.”
“네 얼굴을 보자마자 이승이라는 건 바로 알았다. 너는 염라대왕의 목을 쳐서라도 천년만년 살 놈이니까.”
“내가 그렇게 막 나가는 놈은 아니야.”
“아니긴……. 너는 무공이 약했으면 지금쯤 아니, 훨씬 어렸을 때 죽었을 거다.”
“아닐걸?”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갑옷이나 입어보자.”
갑옷이란 말에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백서휘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날 좀 일으켜서 저것들 앞으로 데려가다오.”
백서휘는 우염상을 부축해 일으킨 후 갑주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갑옷은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 내가 생각한 거랑은 형태가 좀 다른데?”
“서역의 갑주 모양을 많이 참고해서 만들었다.”
“이런 걸 입고 움직일 수나 있겠어?”
“안 입은 것처럼 편하지는 않겠지만 싸우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거다.”
백서휘가 침음성을 흘렸다.
“한번 입어봐라.”
“어떻게 입는 건데?”
우염상은 백서휘에게 갑주를 입는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복잡하긴 한데 못 외울 정도는 아니네.”
백서휘는 우염상이 가르쳐준 대로 하나하나 입었다.
“대장간 뒷마당에서 한 번 움직여봐라.”
“그러지.”
대장간 뒷마당에서 걷고, 뛰고, 칼을 휘두르고, 찌르고, 구르고, 바닥을 굴러보고, 도약도 해봤다.
우염상의 말처럼 안 입은 것처럼 편하지는 않지만, 입고 싸우는 건 별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근데 이거 너무 가벼운 것 같은데? 방어력에 문제없는 거 맞아?”
“정 걱정이 된다면 갑주를 벗고 거기에 강환이든 뭐든 날려보는 게 어떻겠느냐.”
“좋아.”
나무로 만든 사람 인형에 갑옷을 입히고 실험해봤다.
실제로 강환을 쐈는데도 갑옷엔 별 이상이 없었다.
“대단하네.”
“운철에 진기를 주입하면 더 단단해지는 특성이 있다는 거 알고 있지?”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를 조금만 주입해도 단단해져서 갑옷이 파괴될 일은 없을 거다.”
“그 말이 사실이면 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랑 싸워도 이기겠는데?”
“그렇겠지.”
우염상이 뿌듯한 얼굴로 갑옷을 바라봤다.
“혹시 이거 이름이 있어?”
“묵룡갑(墨龍甲)이라고 한다.”
“묵룡갑이라……. 좋은 이름이네. 잘 쓸게.”
백서휘는 낯뜨거운 얘기를 하는 게 쑥스러운지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그 갑옷이 필요한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중원이 평화로워 더는 수호문을 필요로 하지 않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백서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