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53화
북경 분타주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분타 앞을 계속 서성였다.
“왕초!”
지하 시설에서 구한 거지가 북경 분타주를 안고서 엉엉 울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이 자식 뭐야! 왜 날 껴안고 지랄이야! 빨리 안 놔? 놔! 놓으라고!”
“오! 보기 좋은데?”
백서휘가 놀리듯 말하자 북경 분타주는 자기를 껴안은 거지의 머리를 때렸다.
“빨리 놔!”
“흑흑흑!”
지하 시설에서 구한 거지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분타에 있는 다른 거지들에게로 갔다.
“저놈 하나만 구하신 겁니까요?”
“다른 놈들도 감옥 같은 데 있긴 했어.”
“그런데 왜 저놈만 구해오신 겁니까요?”
“다들 이족들이랑 결합한 상태더라고. 그래서…….”
백서휘가 일부러 생략한 뒷말을 북경 분타주는 눈치껏 알아들었다.
“이제 형제들이 사라질 일은 없는 겁니까요?”
“일단은 그래. 거기 있던 놈 중 하나의 말로는 연구 시설이 하나뿐이라고 그랬거든.”
“만약 그 시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면…….”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다시 뭐 빠지게 찾으러 다녀야지.”
“그냥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습니다요.”
“아직 일이 해결된 건 아니야. 시설만 파괴했지, 이놈들 지원해준 놈이 아직 남아 있거든.”
“그게 누굽니까요?”
북경 분타주가 콧김을 씩씩거리며 물었다.
“동창.”
“지, 지금 그 내시 놈들이 그랬다는 겁니까요?”
“그 내시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천지회에서 실험을 했던 일이야.”
“이거 이럴 게 아니라 본단이 있는 천진으로 전서응을…….”
“그럴 필요 없어.”
백서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북경 분타주는 그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내일 내로 내가 해결할 거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 말고.”
“알겠습니다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백서휘는 황씨 부자가 기다리는 황가장으로 돌아갔다.
“야! 거지들이랑 같이 있다고 밥 굶는 거야? 밥 좀 제때제때 먹고 다녀. 아버지가 걱정하잖아.”
“할아범한테 대화 좀 하자고 그래.”
“대화? 너 설마…….”
“그래, 그놈들 꼬리 잡았다.”
황석준이 황일승이 있는 곳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백서휘는 황일승이 내준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일주일 동안 수면을 운기조식으로 대체한 탓에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몸이 아닌 뇌가 가만히 쉬길 원하고 있었다.
그때 문 위에 걸려 있는 작은 종이 울렸다.
“들어와!”
황일승과 황석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꼬리를 잡았다며?”
“잡은 것만이 아니라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냈어.”
“뒤에 누가 있는데?”
“동창.”
“뭐?!”
황씨 부자가 깜짝 놀라며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말이 안 되는데?”
“뭐가?”
“동창과 천지회는 서로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둘이 손을 잡고 짝짜꿍을 할 수 있는 게냐?”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백서휘는 어떻게 천지회와 동창이 힘을 합칠 수 있었는지를 두 사람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니까 너랑 황제 폐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란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천지회 놈들의 힘을…….”
“일반 양민이라도 하급 이족과 결합하면 웬만한 무림인들보다 강해지니까.”
“그들을 군대로 삼아서 부리려고 했단 거지? 이전의 천지회 회주들처럼?”
“그렇지.”
“이젠 어떡할 셈이냐?”
황일승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백서휘를 보며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자금성에 들어가서 동창 제독 멱을 따와야지.”
“야! 그런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어떡해!”
“황제 폐하도 아니고 동창 제독 목인데 뭐 어때.”
백서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황석준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밖으로 나가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언제 잠입할 게냐?”
“이런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 이따 밤에 가든가 해야지.”
“좀 더 나중에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경계가 삼엄해질 테니까.”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놈은 자금성 내에 머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방심하게 될 거야.”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 * *
백서휘는 모든 장비를 갖추고 황가장을 나섰다.
이상하게 어둡다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짙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잠입하기 딱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날만 좋은 게 아니라 잠입에도 운이 따르길 바라며 동안문(東安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형잠종술을 쓴 채 조금 걸었을 뿐인데, 붉은색 담장과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유리 기와가 나타났다.
‘황가장이 자금성이랑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왔어.’
백서휘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볍게 담을 넘었다.
아무런 소리없이 착지한 그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위사들이 규칙적으로 주위를 순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뜬장님이군.’
바보 같은 위사들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전각.
주위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위장 참 대단하단 말이지. 누가 여기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창 환관들의 근거지라고 생각하겠어.’
백서휘는 감탄하며 전각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저놈들이 옥에 티네.’
일반 위사가 지켜야 할 문을 번역(番役)들이 지키고 있으니 동창의 근거지라는 티가 확 났다.
백서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잠깐! 내가 고민할 이유가 없잖아?’
애초에 동창제독의 멱만 따고서 끝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동창은 천지회의 연구를 지원하고 중원에 사는 절대다수의 안전을 해치려고 했다.
이러한 죄를 범했는데 황제의 직속 정보, 첩보기관이라고 봐준다?
수호문의 문주로서 직무 유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동창도 내가 상대해야 할 단체 중의 하나로 보는 게 맞아.’
백서휘는 문을 지키는 번역들을 향해 검을 쏘아 보냈다.
어둠 속에서 기척 없이 날아간 검은 번역 둘의 목을 잘랐다.
기감을 최대한도로 넓히며 검을 전각 안으로 날려 보냈다.
전각의 시설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느껴졌다.
‘가라!’
전각의 시설들에 막히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 환관들을 죽였다.
간혹 검기를 쓰는 놈이 나왔지만 검강을 만들어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동창 제독 하나만 남았다.
“너, 너는 누구냐! 도대체 누구길래 우리를 죽이는 것이냐!”
“수호문의 당대 문주.”
“수호문의 문주가 왜 우리를……. 설마, 천지회 때문이냐!”
“잘 아네.”
“이 모든 일이 너희 무림인들이 무고한 양민들에게 피해를 줘서 벌어진 일 아니냐! 어찌 우리에게만 죄가 있을 수 있겠느냐!”
“많이 억울한가 보네.”
“그래, 억울하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칙명을 따르려고 한 것뿐이다. 죄를 물으려거든 황제 폐하에게도 물어라!”
“똑같이 칙명을 받은 금의위는 천지회의 힘을 끌어다 쓰지 않았는데? 뭐, 신강이랑 이곳저곳에서 대장장이 납치한 거? 그건 솔직히 천지회 놈들이랑 너희들이 저지른 거에 비하면 소소한 일이잖아.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 죄를 물으라고? 그게 옆에서 황제 폐하를 보좌해야 하는 환관이 할 소리야?”
백서휘의 호통에 동창 제독은 아랫입술만 질근질근 씹었다.
“할 말이 없나 보군.”
“죽여라.”
“물어볼 거 다 물어본 다음에 죽여줄게.”
“그냥 죽이라니까!”
“어차피 죽어서 저승 가면 필요 없는 정보니까 나한테 그냥 다 불고 가. 자, 첫 번째 질문…….”
백서휘는 이번에 천지회를 처리하면서 생긴 의문들을 동창 제독을 통해 모두 풀었다.
“죽여라!”
검으로 벨 준비를 하니 제독 동창이 눈을 감았다.
말은 대차게 하지만 죽음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 잠깐만 혹시 우 노괴에 대해서 알아?”
“제기랄! 죽이라니까!”
“마지막 궁금증만 풀어주고 가.”
“그 우 노괴가 화령철장을 말하는 거면 안다.”
“그 노인네 어디 있어?”
“다른 대장장이들과 다르게 무기 만드는 걸 거부해서 금의위에서 조옥(詔獄)에 갇혀 있다.”
“조옥이면 다 죽일 일은 없겠네.”
“죽여라.”
“그러지.”
스각!
동창 제독의 머리와 목이 분리되더니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기왕 온 거 우 노괴도 구해서 가야겠다.”
백서휘는 금의위의 조옥(詔獄)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자금성 안을 가로지르는데도 눈치채는 인간이 하나도 없네.’
이곳이 암중단체의 본단이었으면 한 명 내지는 두 명쯤은 나왔을 거다.
확실히 중원 무학의 수준이 낮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저기 있군.’
금의위 소속의 소기 둘이 조옥 앞을 지키며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창을 떼죽음시켰는데 금의위까지 또 건드릴 수는 없어.’
이 나라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면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혼란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일반 양민들이었다.
절대다수의 안전을 항상 생각하는 백서휘로서는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재우고 들어간다.’
수혈에 지풍을 날려 잠들게 만든 후 조옥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생각보다 철저하게 지키고 있네.’
조옥 안에도 소기(小旗)가 매서운 눈으로 쇠창살 너머의 인간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그 소기도 수혈을 짚어 잠재운 후 우염상을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무토막처럼 메마른 몸을 지닌 자가 등을 돌리고 자는 게 보였다.
자신이 아는 우염상의 체형과 같았다.
조심스럽게 메마른 자의 얼굴을 살폈다.
‘우 노괴 맞아.’
백서휘는 우염상을 깨울지 말지를 두고 고민했다.
우염상은 말이 많고 목소리가 까랑까랑해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이대로 간다. 아니, 훈혈(暈穴)까지 짚는 편이 낫겠다.’
나중에 훈혈을 짚은 탓에 머리가 아프다느니, 시야가 흐릿하다느니 별별 말들을 쏟아놓겠지만 지금은 이 순간이 중요했다.
‘챙겨서 가자.’
쇠창살을 검강이 솟아오른 검으로 잘라내고 우염상을 꺼냈다.
백서휘는 그를 둘러업고 조옥 밖으로 나왔다.
수혈을 타격당한 소기들은 여전히 잠을 자는 중이었다.
백서휘는 그들을 뒤로하고 제일 위사가 없는 곳으로 가서 담을 넘었다.
탁!
홑몸이 아니다 보니 착지할 때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났다.
무지하게 작은 소리라 별일은 없겠지만 걱정됐다.
백서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황가장으로 도망갔다.
‘다 왔다.’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힌 황가장의 현판과 커다란 대문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우 노괴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샐 수 있으니 담을 넘어가는 쪽이 좋겠어.’
위사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잘 숨겨지는 법이었다.
‘가자!’
백서휘는 자금성에 잠입하러 갈 때처럼 담을 넘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쉬어야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염상을 침상에 내려놓으며 해혈(解穴)했다.
그다음 장비들을 모두 벗고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뇌가 피곤한 건 여전했지만 몸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왔다.
‘살겠군.’
쉬질 않으니 점점 활력의 최대치가 줄어들었다.
백서휘는 일이 끝나는 대로 온종일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염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여긴 또 어디야. 설마, 이번엔 동창에 납치된 건가?”
“아니, 내가 납치했어.”
“누, 누구냐!”
우염상이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너는……!”
“오랜만이지?”
백서휘가 살짝 지친 얼굴로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