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50화
‘천지개벽을 위하여?’
전투 때마다 천지회 소속의 무인들이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외쳤던 말이었다.
‘저런 말을 외칠 만한 놈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천지회 회주의 목을 베고, 부회주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남아 있는 이들 중에 위험하다 싶은 인물들은 직접 추살하기까지 했다.
‘일반 회원이 회를 다시 일으킨 건가?’
일반 회원의 구 할 이상을 죽이고 이계와 이족(異族)과 연관된 건 모두 불태우고 부쉈다.
그래서 천지회의 잔당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족의 힘을 쓸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때였다.
‘천지개벽’이란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손님 틈 사이에 있는 자들 중 몇몇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눈은 까맣게 물들고, 좌반신 혹은 우반신이 두족류의 형태에 예리한 손톱이 달린 것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하급 이족뿐이란 건데……. 아, 취소해야겠군.’
가장 먼저 천지개벽을 외친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높은 하급 이족으로 변했다.
그가 변한 이족은 최하급 이족과 다르게 이성이 남아 있는 데다, 무공이나 주술과는 궤가 다른 능력을 쓸 수 있었다.
‘어떤 능력을 쓰려나.’
하급 이족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을 일으킨 후 이리저리 조종해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황씨 부자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을 쓰는 놈이었군.’
그때 하급 이족이 화염구를 황씨 부자에게 날렸다.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빠르게 밟아나갔다.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나타난 그는 검을 뽑아 화염구 중심에 뭉쳐진 기를 베어냈다.
화염구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황씨 부자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급 이족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둘 다 내 뒤로 와.”
“보통 이런 상황이면 도망을 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곳에도 저런 놈들이 설치고 있을 수 있어.”
“그러면 네 뒤가 제일 안전하겠네.”
“그렇지.”
하급 이족이 붉은빛이 감도는 눈으로 백서휘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봐서 뭐 어쩔 건데?”
백서휘는 도발 아닌 도발을 하며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소수의 무림인이 다수의 상인과 관리를 보호하며 분투하고 있었다.
‘황씨 부자가 욕을 덜 먹으려면 본신의 무력을 일부 드러내서라도 빨리 끝내야겠어.’
하급 이족이 괴성을 내지르며 화염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크기도 훨씬 크고 파괴력도 높아 보였다.
“멍청한 놈, 내가 그걸 쓰게 기다려줄 것 같아?”
백서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들고 있는 검을 하급 이족을 향해 던졌다.
검강이 깃들어진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서는 하급 이족의 가슴에 꽂혔다.
하급 이족은 자기 가슴을 한번 내려봤다가 전혀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봤다.
“병신.”
백서휘는 비웃으며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펼쳐 멀리 떨어진 검을 의지만으로 조종했다.
검강이 깃든 검은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최하급 이족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족이 목숨을 잃었다.
무림인들은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라졌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역용한 얼굴이니까.’
백서휘는 오히려 마음껏 보라는 듯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그때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황일승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이놈들 천지회 놈들 아니냐?”
백서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본 후, 강기막을 만들어 둘 사이의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맞긴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아. 천지회 놈들 처리할 때 할아범도 날 도왔으니 알겠지만, 분명 그놈들 내가 괴멸시켰거든.”
“진짜 괴멸된 거 확실하느냐?”
“알잖아. 내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네가 나섰으면 분명 다 죽였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건지…….”
“그걸 좀 조사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 이놈들 시체 따로 처리하지 말고 한곳에 모아둬.”
“알았다.”
황일승의 명에 하인들이 이족으로 변한 자들의 시체를 창고에 모았다.
백서휘는 그들의 시체를 찬찬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용의주도한 놈들이네.”
혹시나 해 신분패를 찾아봤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단서를 찾아보자.”
얼굴들을 유심히 보니 태양혈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납작했다.
“무인 출신은 아니란 거고……. 다른 건 어떻지?”
아직 인간의 몸으로 남아 있는 부위로 눈을 돌렸다.
피부는 탄력이 떨어져 있고 여기저기에 상처가 많았다.
치아가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다.
손은 거칠고 굳은살이 많고, 손톱에는 때가 잔뜩 껴 있었다.
“멍청한 놈들! 제 버릇을 못 버렸네.”
천지회 놈들이 이전에 보여줬던 수법과 같았다.
거지들을 납치해 마약을 중독시켜 실혼인으로 만든 다음 그들에게 최하급 이족의 힘을 이식한다.
그리고 황 씨 부자를 습격할 때처럼 필요할 때마다 동원해서 그들을 ‘소비’했다.
수법이 완전히 같으니 천지회놈들을 추적하는 방법도 비슷하게 가면 될 것 같았다.
‘천지회 놈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이번에는 정말로 뿌리째 다 뽑아 버려야겠어.’
백서휘는 시체를 모아놓은 창고를 빠져나와 개방의 북경 분타로 향했다.
“무슨 일로 찾아왔수?”
“너 같은 말단 말고 분타주랑 얘기하고 싶은데.”
“분타주님은 지금 다른 일로 바빠서 그러니까 나랑 얘기하시우.”
“너 같은 놈이 감당할 일 아니니까 빨리 분타주 불러.”
“분타주님은 다른 일로 바쁘다고 하지 않수!”
“뭐 하느라 바쁜 건데? 실종된 놈들을 찾고 있나?”
“……어떻게 알았수?”
“다 아는 방법이 있으니까 분타주나 어서 불러와.”
거지들이 이리저리로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 분타의 분타주가 나타났다.
“애들 말로는 당신한테 정보가 있다던데?”
“어떤 놈이 실종된 놈들을 데려갔는지는 알고 있지.”
“그 개자식들이 누군데?”
“알고 싶으면 값어치를 치러.”
“거지한테 지금 돈을 달라는 거야?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돈이 없으면 다른 거라도 내놓던지.”
“다른 거? 다른 거 뭐? 이거?”
북경 분타주가 자기 주먹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단이랑 가까운 걸 믿고 지금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건가?’
개방의 본단이 있는 천진과 가까운 탓에 북경 분타주는 후개 만큼이나 힘이 셌다.
“아니면 이거?”
북경 분타주는 이번엔 허리춤에 찬 몽둥이를 가리켰다.
“후개나 방주가 말 안 해? 나 같이 생긴 놈 보면 조심하라고?”
“조심……?”
“방주가 머리가 있으면 나 같은 놈 보면 조심하고 협조하라고 했을 텐데, 설마 후개 그 자식은 내가 시킨 대로만 한 건가?”
“이런 미친! 방주님이나 후개가 네 친구라도…….”
북경 분타주는 말을 하다가 얼마 전에 전서응으로 날아온 공문을 떠올렸다.
“어, 잠깐! 바, 방주님이 조심하라는 사람이 설마 그쪽?”
“머리가 있긴 하네. 그래, 나다.”
“어, 어떻게 여길 찾으신 건지? 아! 맞아! 그 형제들이 사라지는 거에 대해서 정보가 있다고 하셨습죠? 헤헤!”
“누군지 알고 싶으면 실종된 놈들 용모파기 가져와.”
“저희가 종이를 살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라 용모파기는 없습니다요. 헤헤.”
“그러면 돈 줄 테니까 지필묵이랑 사 와서 실종된 놈 얼굴 좀 그려봐.”
“네!”
어린 거지가 지필묵을 구해오자 분타주는 한때 이름 날린 화공이었다는 거지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했다.
“그림 그려지는 동안 조사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봐.”
“일단 목격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말이 안 돼서…….”
“뭐라고 그랬는데?”
“살결이 창백하고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 납치했다고 하더라고요. 헤헤.”
“동창 놈들이 그랬다고?”
“하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요.”
“그래, 말이 안 되지. 어떻게 동창 놈들이 그런 짓을 해. 자기를……. 크흠!”
황실을 전복했던 놈과 동창이 붙어먹는다는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천지회 놈들을 잡아 족치면 답이 나오겠지.’
“이번 일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시면 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화공이었다는 거지가 다 그린 그림들을 가져왔다.
“이게 실종된 놈들이란 거지?”
“네.”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도중에 황가장의 창고에서 봤던 얼굴을 보게 됐다.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백서휘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 뭉치를 가지고 황가장으로 달려갔다.
북경 분타주가 그의 뒤를 바쁘게 쫓아갔다.
“역시…….”
실종된 이의 얼굴 그림과 창고에 누워 있는 시체의 얼굴이 같았다.
“어? 추, 춘식이?”
북경 분타주는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이놈 몸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아십니까요?”
백서휘는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했다.
“말씀해주십시오.”
“들으면 후회할걸.”
“그래도 말씀해주십시오.”
“좋아.”
백서휘는 천지회의 수법을 북경 분타주에게 말해주었다.
“……그 힘을 이식하는 거 아프겠죠?”
“아프겠지. 그러니까 마약에 중독시키는 걸 테고.”
“개자식들.”
북경 분타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복수는 내가 해줄 테니까 괜히 이렇게 만든 놈 잡는다고 들쑤시고 다니지 마.”
백서휘가 이족으로 변한 자들의 시체들에 화골산을 뿌리며 말했다.
“소인이 돕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요.”
“네가 도울 일이 딱히 없……. 아! 너희들 도움이 필요하긴 하겠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거지 중에서 사지 멀쩡하고 튼튼한 애들 조용히 불러 모아 봐.”
“네!”
북경 분타주의 명이 떨어지자 개방 소속 무인들이 시간이 지날 때마다 거지들을 데려왔다.
“이놈은 안 되니까 그냥 돌려보내.”
“왜 안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요.”
“다리를 절잖아.”
“저 정도면 저희 쪽에선 정상입니다요.”
“아니, 너희들 기준 말고 평범한 사람 기준에서 신체 건강한 놈들 데려오라고!”
“그, 그러면 이놈은 어떻습니까요?”
북경 분타주가 키가 크고 건장한 거지를 데려왔다.
“앞으로 이런 놈들만 데려와.”
“네!”
“야! 상의 벗은 후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어봐.”
“예?”
“어서.”
백서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북경 분타주가 키 큰 거지의 뒤통수를 때렸다.
빠악!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뭐 해!”
키 큰 거지가 윗옷을 벗고 팔을 들어 올렸다.
백서휘는 그의 양쪽 겨드랑이에 노란 액체를 한 방울씩 묻혔다.
“이, 이거 뭡니까?”
“네 목숨을 살려줄 구명 수단.”
“구명 수단이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그런 줄로 알아. 다음!”
백서휘는 하루 동안 신체 건강한 모든 거지의 겨드랑이에 추종향을 묻혔다.
“모든 거지패한테 전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추종향 묻힌 놈이 없어지면 이쪽으로 보고하라고.”
“알겠습니다요.”
“그리고 전서응 있지?”
“있긴 한데 왜 찾으시는 건지?”
“편지 좀 쓰게.”
“이게 사적 용도로 쓰면 안 되는…….”
“가져와.”
“네.”
백서휘는 장사에 있는 식구들한테 보내는 편지를 적은 후 전서응을 날렸다.
‘천지회 놈들 빨리 잡고 우 노괴까지 찾은 후에 집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