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43화
이동 속도를 결정하기 위해 시험해 본 결과, 종리연 역시 보신경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련주의 딸로 귀하게 자란 탓에 자라면서 뛸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을 거다.
그래도 무공을 배운 무인이 이토록 보신경 실력이 나쁘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태도가 좀 더 좋았으면 붙잡고 가르쳐 볼 만할 텐데…….’
배우는 태도는 좋았지만, 두 사람은 본인들의 실력을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평균 이상의 실력이라고 그랬던가?’
만약 두 사람의 말이 맞다면, 중원의 무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암중단체를 막는 미래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내가 고생하는 수밖에 없겠네.’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평상에서 일어났다.
“다들 짐은 챙겼지?”
“네!”
유소화와 종리연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자.”
화전민 마을을 떠나자마자 백서휘는 응룡비천신법을 설렁설렁 펼쳤다.
이래야만 두 사람이 그의 속도에 맞출 수 있었다.
‘도착은 할 수 있겠지?’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장사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는 무관으로 먼저 갈 거야.”
“네.”
백서휘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머지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긴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얘는 아직도 날 따라다닐 생각이 있는 건가? 한번 떠볼까?’
백서휘는 종리연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안 가?”
“예? 무관이요?”
“아니, 무관 말고.”
“그럼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우리가 했던 약속 잊었어? 장사에 도착하면 헤어지기로 했잖아.”
“그건…….”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종리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는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며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끝까지 따라올 생각이었나 보네. 그만 놀려야겠다.’
“뭐, 어디 갈 데 없으면 따라와도 상관은 없어.”
“……진짜요?”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 사이에 나름 정(情)도 생기고 그랬잖아? 안 그래?”
어깨를 으쓱한 백서휘는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유소화를 쳐다봤다.
백서휘와 종리연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고 있던 유소화는 빠르게 반응했다.
“그렇죠. 그냥 여기서 바로 헤어지면 정이 없긴 하죠. 호호호.”
“그렇지?”
“네.”
“자, 그럼 다시 무관을 향해 가보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자하무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내가 관주로 있는 무관이야.”
“생각보다 무관의 크기가 크네요?”
“여기 말고 더 크게 지어질 곳도 있어. 저쪽에 있는……. 아, 그냥 보여주는 게 낫겠다. 따라와”
학무관이 지어지는 현장에 도착하니 정하진이 매서운 눈으로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매형!”
백서휘가 손을 하늘 높이 들고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처남!”
“별일 없었죠?”
“음…….”
정하진은 침음성을 흘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이 있었나 보네요?”
“사고가 있었네. 인부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크게 다쳤었어.”
“혹시 죽은 사람이 나오거나…….”
“다행히 죽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네. 대신, 불구가 된 자가 둘이나 나왔지.”
“뒷처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합리적으로 보상 액수를 정한 덕분에 큰 문제없이 처리됐네.”
“다행이군요. 아! 누나는 어때요?”
“요즘은 무관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는 중이라네.”
“앞으로 태어날 조카를 생각하면 다행이긴 한데, 그러면 운학의 부담이 더 커졌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이 큰 모양이야. 가끔 오며 가며 얼굴을 보는데, 그때마다 수척해지는 게 느껴지더군.”
“한동안 쉬게 해야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네.”
완전히 친해지지 않아서일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이번엔 평소와 다르게 정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은 누군가?”
“그게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굳이 설명하자면 음…….”
“곤란하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네.”
“그게 막 곤란한 건 아니고……. 왼쪽은 제 일 처리를 좀 도와줄 사람이고, 오른쪽은 그냥 오며 가며 만난 사람입니다.”
딱 알맞게 설명한 것임에도 종리연은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귀 좀 빌려주게.”
백서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정하진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학무관을 운영할 때 도와줄 사람인가?”
“아! 다른 쪽에서 도와줄 사람입니다. 원래 무관에 들렀다가 거기로 가려고 했어요.”
“아, 바쁜데 내가 잡고 있었던 것 아닌가?”
“제가 먼저 여기로 와서 말을 걸었는데요. 뭐. 마침 이야기도 나왔으니 그쪽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저는 이만…….”
“저녁에 사합원에 잠시 와주게나.”
“예?”
“꼭 와주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음…….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도록 하죠. 그럼 저는 진짜 가보겠습니다.”
백서휘는 찝찝한 표정으로 두 사람과 함께 도화루로 향했다.
“우리 둘은 잠시 볼일이 있어서 이곳 사장이랑 얘기를 좀 해야 하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여, 여기서요?”
“왜? 못하겠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긴 기루고, 저는 여자고 혼자인데…….”
“이상하게 볼까 봐 그러는 거야?”
“……네.”
“그럴 일 없으니까 점소이한테 내 이름 대고 술이나 마시고 있어.”
“수, 술이요?”
“뭘 그렇게 놀래. 누가 보면 술 처음 마시는 줄 알겠다.”
“처, 처음인데요.”
“그러면 오늘 한 번 체험을 해봐.”
“네?”
“이따 보자고.”
백서휘와 유소화가 화란과 지부장 자리를 두고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종리연은 처음으로 술이란 걸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금존청을 비롯해 여러 가지 술을 가지고 왔다.
“이, 이렇게 많이 시키지 않았는데요?”
“저희 도화루의 귀빈이신 서휘님의 손님 아니십니까?”
“그건 맞는데…….”
“그렇다면 그 술 다 드셔도 됩니다.”
“네…….”
점소이는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종리연은 술병들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입에 술을 대본 적이 없었다.
매번 어떤 맛일지 궁금했으나, 엄한 아버지가 두려워 먹어볼 생각을 못 했었다.
처음으로 술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가출할 때처럼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정하고 한번 마셔보자.”
종리연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술의 뚜껑을 열어 잔에 따랐다.
그다음 자그마한 잔에 가득 담긴 투명한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으으으윽!”
처음에 혀에 닿았을 때는 차가우면서 썼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는 식도에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이게 술…….”
종리연은 이번엔 다른 병에 있는 술을 잔에 따라 마셨다.
그렇게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점소이가 가져온 병들의 절반을 마시게 됐다.
그때 남궁유운이 도화루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오늘은 어떤 꽃과 놀아볼까……. 어?!”
이제껏 봤던 여자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예쁜 여인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남궁유운은 보게 됐다.
“청아루의 루주만큼 예쁘잖아?”
남궁유운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점소이를 불렀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십니까?”
“저 여자 누구야? 새로 온 기녀야?”
“기녀 절대 아니니까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뭐 하는 여잔데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귀빈이 데리고 온 손님입니다.”
“귀빈이라면……. 우리 관주?”
“네.”
“관주는 어디 갔는데?”
“잠깐 루주님이랑 대화 중이십니다.”
점소이를 다시 돌려보내고 남궁유운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관주가 아버지 유품 찾으러 잠깐 떠났다가 저 여자랑 같이 장사로 온 이유가 있을 거야. 설마, 선생인가? 그래서 같이 온 건가?’
선생이라고 생각하면 착착 맞아떨어졌다.
‘선생이 맞다고 쳐도 왜 저 여자만 두고 사라진 거지? 루주랑 대화는 꼭 오늘 안 해도 되잖아.’
남궁유운도 도화루의 루주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볼 때 이곳의 루주는 하오문의 문도였다.
‘루주가 반드시 전해야 할 정보가 있었거나, 관주가 없는 사이에 모아졌을 정보를 보러 갔거나 둘 중 하나야. 잠깐! 자기 없었을 때 일을 물어보면 내 행적이 다 드러나잖아?’
이제껏 계속 풍류공자로 살아왔기에 행적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남궁유운이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록 10년 동안 선생으로 일해야 한다는 노예계약이긴 하지만 고액의 월봉을 준다.
그에게 고액의 월봉을 주는 이유는 가진 재주를 학생들에게 전하길 바라서였다.
그런데 남궁유운은 장우량과 다르게 그 재주를 전할 방법을 조금도 연구하지 않았다.
‘아직 학무관이 지어지고 학생들을 모집할 시간이 있으니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직 기간이 남아 있으니 더 놀아도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궁유운은 입맛을 다시며 백서휘가 데려온 새로운 선생에게 다가갔다.
“소저, 같은 선생으로서 할 말도 있고 해서 그러는데 합석해도 되겠소?”
“선생이요?”
“관주가 데려온 선생 아니었소?”
“관주님이 절 데려온 건 맞는데 선생은…….”
종리연은 말을 살짝 끌면서 백서휘의 옆에 계속 붙어 있으려면 선생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니에요.”
“아직 아니라면 나중엔 될 수도 있단 거구려.”
“아마도요……. 그런데 그쪽은 관주님이 운영한다는 무관의 선생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무관은 아니고 지금 지어지고 있는 학무관이란 곳의 선생으로 예정되어 있소.”
“무공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요.”
“무공 실력도 괜찮지만 내가 제일 잘하는 건 그림과 음악이오.”
“그림과 음악이요?”
남궁유운은 지금이 자기 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어디 연주 한번 들어보겠소?”
“어떤 걸 연주하실 건데요.”
“뭐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걸로 연주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남궁유운은 항상 챙겨다니는 옥피리를 품속에서 꺼내 보였다.
“피리네요?”
“기가 막히게 연주할 테니 한번 들어보시오.”
남궁유운은 최선을 다해 옥피리를 불었다.
구슬픈 피리의 음색을 들은 종리연은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기가 막히게 연주한다는 말, 거짓이 아니었네요.”
“하하.”
“그림과 음악 선생이라고 그랬죠?”
“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옥피리 연주만큼 잘해요?”
“한번 보시겠소?”
“지필묵이 없는데 어떻게 보여주시게요?”
“이게 있소.”
남궁유운은 품속에서 세필 붓과 먹물이 담긴 작은 병, 자그마한 종이를 꺼냈다.
“아…….”
“잠시만 기다리시오.”
남궁유운은 눈앞에 있는 종리연을 빠르게 그리기 시작했다.
백서휘는 도화루로 왔다가 종리연이 남궁유운과 같이 있는 걸 보고 기척을 감추었다.
“이런…….”
남궁유운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신 있게 그린다고 그린 건데 종리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했다.
남궁유운이 종이를 구겨서 버리려고 했다.
그걸 종리연이 빠르게 손을 내밀어 막았다.
“주세요.”
“음…….”
남궁유운은 고민하다가 종리연에게 그녀를 그린 초상화를 건넸다.
“이렇게 잘 그렸는데 왜 버리려고 한 거예요?”
“당신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해서 그랬소.”
몰래 지켜보는 백서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둘이 합쳐지면 정사대전이 일어나는 걸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중원을 지키는 것만 생각했지 평화를 유지한다는 건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보게 되니 자연히 평화를 유지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두 사람이 결혼한 동안만이라도 중원이 평화로우면 암중단체를 상대하는 것도 좀 편해질 거야.’
난세일수록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아 움직임 하나하나를 신경 써야만 했고, 태평한 시기일수록 거추장스러운 게 없었다.
‘한 번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쌀이 익어 밥이 된다면 정파의 거두인 남궁세가의 가주도, 사도련의 련주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은근하게 밀어주면 되겠지.’
두 사람을 보는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