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41화
진현은 만년한철을 손에 든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만년한철의 크기는 작아지고, 원래 까맣던 몸은 더 새까맣게 변해갔다.
시간이 흘러 주먹만 했던 만년한철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번쩍!
진현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완성했다.’
아버지가 남겨둔 만년한철을 다 흡수한 덕에 흑철마공(黑鐵魔功)을 대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수호문의 문주도 두렵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 진현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온몸에 하얀색 천을 칭칭 감았다.
홍매검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연 순간, 갑자기 검사가 감겨 있는 검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검?’
진현은 반사적으로 방패 모양으로 변화시킨 손을 내뻗었다.
캉!
사람의 몸과 검이 부딪혔는데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공격이 들어가지 않는 걸 보고 당황할만한데도 상대는 계속 검사가 감긴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진현의 몸에 검이 한 번 닿을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감긴 천이 찢어졌다.
찢긴 천 사이로 칠흑같이 검은 그의 몸이 드러났다.
“철탑마(鐵塔魔)와 무슨 관계지?”
현시점의 중원에서 흑철방과 철탑마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이 중에 이렇게 진현에게 살의를 품을 만한 자는 수호문의 문주뿐이었다.
“어떤 관계일 것 같으냐?”
“아들 아니면 제자겠지. 나는 그 둘 중에 뭔지가 궁금할 뿐이야.”
백서휘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들이다.”
“생존자는 너 하나뿐인가?”
“흑철방의 생존자는 나뿐이다.”
“꼭 다른 곳의 생존자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다른 집단에서도 살아 있는 자가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 좋아. 몇 명이 됐든 나오면 보이는 족족 싹 다 죽이면 되는 일이니까.”
백서휘가 진현을 향해 달려가며 검사가 감긴 검을 내질렀다.
“겨우 검사 따위로는 나를 벨 수 없다!”
진현은 날아오는 검날을 여유롭게 쳐낸 후 반대편 주먹을 곧게 뻗었다.
백서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난화만천수를 펼쳤다.
휙휙휙!
손그림자가 공간을 가득 뒤덮으며 날아드는 진현의 주먹을 막았다.
진현은 굴하지 않고 내뻗은 팔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손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안 되겠다 싶었던 백서휘는 손을 재빨리 회수하며 거리를 벌렸다.
“도망가는 거냐!”
진현이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전략상 후퇴라고 해두지.”
백서휘는 훌쩍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는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놈!”
진현이 불같이 화를 내며 백서휘를 뒤따라갔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그때 백서휘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진현의 목을 향해 검사가 감긴 검을 찔러 갔다.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진현의 몸엔 통하지 않을 공격이었다.
진현은 백서휘의 검을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가 공성추 모양으로 변화시킨 주먹을 날렸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백서휘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음?”
진현은 자기 주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맛이 이상할 정도로 크지 않았다.
타점을 제대로 때리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 주먹을 피해냈다는 건가?’
지금 백서휘가 보여주는 수준의 무력으로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해.’
진현은 쇠망치처럼 변신시킨 발로 누워있는 백서휘를 내리찍었다.
쩌저적!
백서휘가 땅에 깊숙이 처박히며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끄응.”
백서휘가 일어서며 근처에 있는 진현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멍청한 놈! 통하지도 않는 공격을 계속하다니…….”
진현은 백서휘를 비웃으며 검을 붙잡고 부러뜨리려 했다.
카가가가각!
쇠가 갈리는 소리만 날 뿐, 검날은 잘리지 않았다.
“이 검 만년한철로 만들어졌군. 어디서 난 거지?”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네 아버지에게서 얻었다.”
“뭐?!”
흑철마공을 익힌 자를 죽이면 만년한철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진현이 경악에 찬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백서휘는 충격을 받은 그에게서 검을 빼내며 거리를 벌렸다.
“이놈! 가만두지 않겠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진현이 백서휘를 쫓아갔다.
백서휘는 잡힐 것처럼 움직이다가 바닥을 힘껏 박차며 날 듯이 앞으로 뛰어갔다.
“그런 식으로 움직여서는 나를 잡지 못해.”
“죽어!”
공중으로 도약한 진현이 백서휘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어이쿠!”
백서휘는 날아오는 진현을 피하기 위해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적을 잃은 진현의 공격은 애꿎은 건물만 무너뜨렸다.
쿠구구궁!
먼지구름이 피어오르자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이용해 기척을 감췄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이놈! 나를 놀리는 거냐!”
“놀린다면 어쩔 건데?”
백서휘는 계속해서 진현을 도발하며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진현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다 때려 부수며 그를 따라갔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냐!”
“내가 도망을 갔다고? 언제?”
백서휘가 이전과 다르게 멈춰서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도망만 다녔지 않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해.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래, 결말은 정해졌지. 네가 내 손에 죽는 것으로!”
진현은 철구(鐵球) 모양으로 변화시킨 주먹을 백서휘에게 휘둘렀다.
“이런,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백서휘의 말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진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전투에 집중했다.
“멍청하긴.”
스각!
진현이 내뻗은 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깔끔하게 잘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피가 쏟아져 나오는 절단면을 보았다.
“어, 어떻게……?”
흑철마공을 대성한 덕에 진현은 만년한철보다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작금의 강호에 그를 상처 입힐 자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렇게 단칼에 팔이 잘리려고 그 고된 수련을 견뎠던 건가?
아니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악몽이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야만…….
스각!
진현의 남아 있던 팔이 검강이 일렁이는 검에 어깻죽지부터 잘렸다.
“왜 그렇게 멍청히 서 있어. 만년한철이라도 내주려고 그래? 그럴 거면 진작 말하지, 그러면 대장간 거리까지 안 와도 됐는데…….”
“대장간 거리?”
백서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쇠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고, 공기가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여기로 온 건…….”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백서휘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보듯 진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진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바보 같은 놈!’
수호문의 문주는 구파일방 두세 개가 연합해도 무너뜨리지 못할 흑철방을 혼자서 멸문시킨 자였다.
그런 자를 홀로 상대하려 했다니.
무모해도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훗날을 도모하려면 지금 도망가야 돼.’
진현은 퇴로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도망가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백서휘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진현의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피, 피해야……!’
진현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절삭음이 들렸다.
양다리가 잘려 나가며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크아아아악!”
“꼭 바퀴벌레 같군.”
백서휘는 쪼그려 앉아 진현이 버둥거리는 걸 감상했다.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급히 진현의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다.
“그렇게 계속 입 벌리고 있어.”
백서휘는 혁대에 달린 주머니에서 물약을 꺼내 진현에게 먹였다.
“이런, 두 방울이나 떨어뜨렸네.”
약의 정체를 모르는 진현은 공포심 어린 눈초리로 백서휘를 올려다봤다.
“나,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약효가 돌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시간이 흐르고 약효가 진현의 몸에 돌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증폭되는 느낌에 그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하아안테 무우스으은 지이잇을 하으은 거어어냐아아고오오!”
“두 방울을 넣어서 그런가? 다른 놈이랑 반응이 다르네? 고통도 200배로 느끼려나.”
백서휘는 손바닥으로 진현의 뺨을 찰지게 때렸다.
“끄아아아아악!”
“대답을 안 하면 조금 전처럼 맞는 거야. 알았어?”
“알, 알았……. 다.”
“생존자는 얼마나 있지?”
“생존자는…….”
진현은 지금이 죽음을 택하기에 가장 적기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복수를 못 해도 그들이 복수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죽어야 한다.’
진현은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 심맥을 터뜨렸다.
백서휘가 그를 살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제기랄! 정보를 더 뽑아내야 했는데…….”
“귀빈님!”
유소화가 하오문의 무인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뭐야? 너희들 여긴 왜 왔어?”
“귀빈님을 도와주려고 왔는……. 어라? 죽었네요?”
“왜? 못 죽일 줄 알았어?”
유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날 하수로 본 거야.”
“귀빈님이 밀리는 모습만 봐서요.”
“그건 작전상 그런 거야. 저놈이 도망가는 것도 싫고 이쪽으로 유인해야 만년……. 이런, 실언할 뻔했군.”
“무슨 말을 하시려던 거예요?”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니까 이놈 팔다리나 주어와.”
“팔다리를요? 왜요?”
“가져오라면 가져와.”
잠시 후, 하오문의 무인들이 진현의 팔다리를 가져왔다.
“여깄습니다.”
백서휘는 진현의 시체를 가지고 빈 대장간에 들어가서는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온도가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는 게 좋으려나.’
그때 진현의 허리춤에 홍매검이 달린 걸 확인했다.
‘아, 저걸 잊고 있었네.’
애초에 항주로 온 목적이 홍매검을 되찾는 것이었다.
백서휘는 진현의 시체에서 홍매검을 가져온 후 검날을 확인했다.
스릉!
검날에는 ‘매화만리향’이라는 단어 밑에 ‘백상훈’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
아버지가 그토록 아꼈던 검을 찾게 되니 용광로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른 것도 찾아와야지.”
백서휘는 다시금 맹세하며 온도가 오른 용광로에 진현의 시체를 던졌다.
“화력이 조금 달리는 것 같은데?”
용광로 안으로 열양진기를 불어넣어 불이 더 뜨겁게 변하도록 도왔다.
화염이 춤을 추며 진현의 시체를 불살랐다.
화르륵!
진현의 시체가 있었던 자리에 거무튀튀한 금속이 남았다.
“어? 저건 뭐예요?”
유소화가 거무튀튀한 금속을 가리키며 물었다.
“몰라도 돼.”
“진짜 안 알려주실 거예요?”
“그래.”
계속 지켜보던 유소화는 백서휘가 침묵하자 같이 온 무인들과 함께 절강성 지부로 돌아갔다.
백서휘는 용광로를 지켜보다 안에 있는 거무튀튀한 금속을 꺼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용광로 안에 있었는데도 거무튀튀한 금속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펄펄 끓는 곳에 있었는데도 차가운 걸 보면 만년한철이 확실하군.”
만년한철을 바닥에 놓고 검강이 일렁이는 검으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만년한철이 토막 나며 가져가기 편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백서휘는 토막 난 만년한철들을 챙긴 후 하오문의 절강성 지부로 돌아갔다.
이전처럼 유소화가 그를 맞아주었다.
“이제 항주를 떠나실 건가요?”
“그래, 다시 돌아가야지.”
“그럼 저희의 연은…….”
“인연을 말하니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항주를 떠날 생각이 있나?”
항주는 구파일방도 콧방귀를 못 뀔 정도로 하오문의 힘이 강한 곳이었다.
그런 항주의 지부장 자리를 포기한다는 건 무인이 스스로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른다는 것과 같았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어요?”
“그러지.”
유소화는 항주의 지부장으로 있을 때와 백서휘를 따라갔을 때의 이득을 속으로 저울질했다.
‘지금이야 내가 잘 나가서 항주의 지부장으로 있지만 다른 애들이 치고 올라오면 그때는…….’
문주의 제자는 유소화 말고도 셋이나 더 있었다.
그 셋의 활약 여하에 따라 항주의 지부장 자리가 계속 유지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귀빈을 따라가면 귀빈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돼.’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문주와 다른 제자들에서 백서휘 한 명으로 줄어든다는 건 꽤 큰 강점이었다.
문제는 백서휘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 때의 일이었다.
기껏 항주의 지부장 자리를 박차고 갔는데 백서휘에게 쫓겨난다면 그것만큼 최악인 경우가 없었다.
‘도박수를 던져야 하나?’
백서휘에게 구원받은 이후로 유소화의 삶은 언제나 도박이었다.
하오문 문주의 제자가 된 것도, 항주의 지부장이 된 것도 그 도박에서 이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자.’
유소화는 다시 한번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항주를 떠나겠어요.”
“잘 생각했어.”
백서휘는 유소화와 함께 항주를 떠나 장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