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38화
진지하게 싸우겠다는 마음을 먹자 영진의 기세가 180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래도 무디고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면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검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방심해서 방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 건가?’
자신을 상대로 두고 방심한 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이해 못 할 일은 또 아니었다.
‘내 나이에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일반적인 무인에게 화경 이상의 경지는 전설로 전해지는 경지이니까.’
화경은 영진이 수십 년을 수련해도 닿지 못했던 경지였다.
그런 경지를 비슷한 또래도 아니고 한참 어린 청년이 올랐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를 도발했겠지.’
본인의 호기심도 충족하고 제자인 운학이 가진 환상을 부수기 위해서.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만.’
백서휘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영진을 바라봤다.
영진이 전심전력으로 나온다고 하니 내심 기대가 됐다.
백서휘는 영진이 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길 바랐다.
“흐아아앗!”
영진이 기합 소리를 외치며 빠르게 보법을 밟았다.
그때 갑자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신법이면서 동시에 보법인 암향표(暗香飄)를 쓴 것이다.
은밀한 움직임에 최적화된 무공이라 웬만한 고수들도 상대의 기척을 잡아내지 못하지만 백서휘는 달랐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백서휘의 감각은 영진이 움직이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데다,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뒤로 가네.’
영진이 암향표를 밟아 원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백서휘는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영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나보다 빨리……!’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어서 공격하라고 손짓했다.
자존심이 상한 영진은 굳은 표정을 한 채 머리 위로 검을 올렸다.
‘낙매여우(落梅如雨)!’
영진의 검에서 피어오른 매화잎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졌다.
기로 이루어진 매화잎이 백서휘를 덮쳤다.
백서휘는 검강이 담긴 검으로 허공에 크게 반원을 그렸다.
날아들던 매화잎이 단 한 수에 사라졌다.
영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더 할 건가?”
영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제 줄 걸 줘야지.”
“줄 거라니? 아!”
영진은 멍한 얼굴로 자소단이 든 목갑을 품에서 꺼내더니 백서휘에게 던졌다.
백서휘는 날아오는 목갑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자색을 띤 단환은 종이에 쌓인 채 잘 포장되어 있었다.
코를 가져다 대 단환의 향을 맡아보았다.
확실히 명문거파의 영단이라 그런 건지 향부터가 중소문파의 그것과 달랐다.
‘약식인데 이 정도면 정식으로 만든 건 얼마나 뛰어나다는 거야?’
놀라운 건 이것보다 더 효과가 좋은 단환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소림의 대환단(大還丹).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살려낼 수 있단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얻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얻어놔야겠어.’
백서휘는 머릿속에 영단에 대해 새겨넣고 영진을 바라봤다.
“기부금 면제에 관한 건 문서로 남겨야 하니까 날 따라와.”
백서휘는 응룡비천신법을 발휘해 무관으로 향했다.
영진과 운학이 백서휘를 뒤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자하무관에 도착했다.
백서휘는 두 사람을 실내수련장에 앉아 기다리게 한 후 문방사우를 가져왔다.
“자, 적어.”
영진은 장문인이 가진 권한으로 ‘자하무관과 앞으로 생길 다른 교육기관’의 기부금을 5년 동안 받지 않겠다고 적었다.
“수결은?”
백서휘는 영진이 수작질 부리는 걸 단번에 차단했다.
영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문서의 오른쪽 밑에 수결을 했다.
‘꼼꼼히 살피자.’
수결을 안 써서 책임을 안 지려던 걸 보면 다른 곳에서도 수작질을 부렸을 수 있었다.
백서휘는 문서를 낚아채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다른 곳에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이 문서 하나로 아낄 돈을 생각하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저도 모르게 지어졌다.
‘좋군.’
생돈 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문서를 잘 접어 품에 넣었다.
영진이 붓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운학에게 물었다.
“사범 노릇은 언제까지 할 셈이냐?”
“제가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사문의 명령은…….”
“화산을 대표하는 매화검수이고, 사문과 스승님에게서 받은 은혜가 큰 만큼 들을 수 있는 명령은 다 들어줄 생각입니다.”
영진이 안도의 한숨을 소리가 다 들리도록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나는 사문을 떠나려는 줄 알았다.”
“제 몸의 반이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떠날 리가 있겠습니까? 수 년 안으로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동안은 계속 이런 식으로 생활하겠다는 거구나.”
“계속까진 아닐 겁니다.”
“좋다.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너를 부르지 않으마. 대신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고 화산으로 복귀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백서휘가 갑자기 두 사람의 대화에 난입했다.
“그쪽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우리가 부탁을 들어줄 만큼 가까운 사이였는가?”
영진은 쓸데없이 돌려 말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설득이 어렵겠어.’
다른 문파도 그렇지만 특히 당대의 화산파 장문인은 문파를 부흥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소문에 의하면 영진은 득실에 민감하다고 했어.’
앞으로 얻을 ‘이득’을 강조하면 영진도 괜찮은 반응을 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산파도 이득을 볼 수 있는 부탁인데…….”
“이득?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게냐”
“우리에게 화산파 제자 중 일부를 지원해주면 좋겠다.”
“사범으로 삼으려고 그러나?”
“정확히는 사범과 보조 사범으로 쓰려고 하는데.”
“그게 전부라면 난 제자들을 보낼 수 없다.”
“화산파에도 좋은 일이야.”
“제자들을 팔아먹는 게 어떻게 좋은 일이지?”
영진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백서휘를 바라봤다.
“어리고 뛰어나 제자들을 새로 얻을 수 있는 일이니까 좋은 일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무관에 ‘화산파 준비반’이란 걸 만들려고 한다.”
“우리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일단 설명 끝까지 들어봐.”
영진이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는 그걸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화산파 준비반에 들어오는 아이 중에 우리 무관에서 자체시험을 치러서 합격하는 놈들만 화산파로 올려보내면…….”
“그렇게 하면 확실히 안정적으로 괜찮은 제자들을 얻을 수 있겠군.”
“그래.”
“음……. 이건 장로들과 상의할 문제 같으니 결정은 나중으로 미루마.”
화산파에 봄을 가져온 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영진은 노련했다.
제안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을 벌은 데다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장로들이 반대해서 들어줄 수 없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답변 기다리겠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생긴 문제들을 다 해결해야 해서 ‘화산파 준비반’ 건은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다. 답변이 늦어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때 운학이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기…….”
“발언권 요청은 안 해도 괜찮지 않아? 그냥 끼어들면 되는데.”
백서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제가 안 그랬으면 스승님과 밤새도록 얘기하셨을 겁니다.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넘어가고, 다시 돌아갔다가 다른 주제로 얘기하고…….”
“지금 그럴 기미가 보이는 것 같으니,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각자가 갈 곳으로 돌아가자고.”
백서휘의 말에 영진과 운학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너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관주님이 아니라 스승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언제 화산파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모르겠구나. 내가 반갑지도 않은 게냐?”
“화산파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본산엔 별일 없을 거다.”
“그래도 빨리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정이 떨어졌나 보구나.”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네게 무슨 잘못을 했나?”
운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뭐 때문에 나를 본산으로 보내려고 하는 게냐?”
“폐관 수련하느라 문파를 못 돌보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수련 끝나자마자 여기로 오시기도 했고요. 문파로 돌아가면 최종결정권자인 스승님이 수결해야 할 서류가 쌓여 있을 겁니다.”
탑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상상한 영진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진짜 그렇다면 오래 있을 수는 없겠군. 음……. 일단 일주일 정도 여기서 묶으면서 네가 어떻게 사는지 보다가 가야겠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일주일이면 자하무관을 더 키우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지.’
* * *
다음 날.
백서휘는 개방의 호남성 분타로 향했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 거지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방법이 주요했던 건지 나겁개가 취죽교에 나와 있었다.
“무한으로 떠날 때 보고 그 이후로는 처음 보는 건가?”
“처음 보는 거 맞소.”
“너무 오랜만에 만났네. 이러면 교육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교, 교육은 충분히 잘 되어 있소. 그쪽이 가르쳐준 것도 다 기억하고 있고.”
“뭐, 그렇다면야 푸닥거리는 다음으로 미루는 거로 하고 일 얘기나 하자고.”
“일이라면……?”
“이번에도 소문을 좀 내줬으면 한다.”
“저번처럼 대가가 있소?”
“그때와 같은 수준으로 돈을 주지.”
“혹시 위험한 일은…….”
“위험한 일은 돈 받아먹고 태업하면 그때 발생하지.”
백서휘가 은근하게 살기를 내뿜자 나겁개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저, 정말 위험한 일 아닌 거 맞소?”
“이번에도 자하무관과 관련된 소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의뢰나 받아.”
“아, 알겠소. 뭘 소문내면 되오?”
“화산파 장문인이 자하무관에 방문했고, 관주의 실력에 감탄한 데다, 매화검수인 운학이 사범 노릇을 하는 걸 인정했다고 소문을 내.”
“화, 화산파 장문인을 이용해서 헛소문을 낼 수는 없소. 걸리면 나는…….”
“헛소문 아니야.”
조금 과장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다 사실이었다.
화산파 장문인의 자하무관 방문?
목적이 운학을 찾는 거긴 했지만 방문한 건 맞았다.
관주의 실력을 인정한 것?
비무에서 패배했다는 걸 인정하고 기부금 면제 문서를 써준 걸 보면 백서휘의 경지가 화경이란 걸 인정한 거라고 봐야 했다.
마지막으로 운학이 사범 노릇을 하는 걸 영진이 인정한 것?
운학이 몇 년 동안은 무관에 있겠다고 말했고, 영진은 최대한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는 말로 허락했다.
소문을 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말이오?”
“정, 의심이 가면 나랑 같이 무관으로 가던가.”
“좋소, 당신이 말한 대로 소문을 내겠소.”
“잘 생각했어.”
백서휘는 돈을 주고 다시 무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명부를 보며 연무장과 내부 수련장 모두를 이용하면 얼마나 많이 수용할 수 있을지 계산했다.
‘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들을 신입으로 받은 다음에 내가 반을 연무장에서 가르치고, 운학이 나머지 반을 실내수련장에서 가르치면…….’
못해도 지금의 두 배 이상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이렇게 몸집을 키워서 자하무관을 호남성 최고의 무관으로 만들고, 학무관으로 굳히기에 들어가야겠어.’
백서휘의 야망 어린 눈동자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