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35화
다음 날.
백서휘는 남궁유운을 기다리며 어떤 식으로 승부를 보면 좋을지 고민했다.
‘자기 전에 떠올린 방법대로 가는 편이 좋겠지.’
이곳 무한에는 황학루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기루가 있었다.
청아루(淸雅樓)란 이름을 가진 그 기루로 유명해진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루주가 월궁(月宮)의 항아(姮娥)만큼이나 아름다워서였고, 다른 하나는 루주가 그 누구에게도 머리 올리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고관대작부터 이름 높은 고수까지 다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지?’
일단 루주와 만나는 것만 해도 거액의 돈이 필요해 어려웠다.
설사 그녀와 만난다고 하더라도 머리를 올리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난이도를 조금 낮춰야 할까?’
아직 루주와 1대1로 술자리를 같이 한 남자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머리를 올리는 건 평생을 가도 힘들 수 있었다.
단기간에 결전을 보려면 루주와 1대1 술자리를 갖는 게 차라리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 루주를 꼬셔서 1대1로 술자리를 갖는 거로 바꾸자.’
어떤 식으로 승부를 볼지 정했을 때, 저 멀리서 제갈진천과 함께 남궁유운이 걸어왔다.
“이 친구가 꼭 어떤 식으로 승부를 볼지 봐야 한다고 해서 데려왔어. 괜찮지?”
남궁유운이 제갈진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서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는 어떤 식으로 결정할 거지?”
“청아루의 루주와 1대1로 술자리를 먼저 가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한다.”
“겨우 술자리로 되겠어? 그냥 머리를 올리는 쪽이 이기는 거로 하는 게 어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다 이긴 것처럼 행동하는 남궁유운이 우스웠다.
“머리를 올리든 말든 그건 네 맘대로 해. 너와 나 사이의 승부는 술자리를 먼저 갖는 쪽으로 결정할 테니까.”
날카로운 백서휘의 반응에 남궁유운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할 말 있나?”
“없다.”
“그럼 청아루로 이동하지.”
백서휘와 남궁유운, 제갈진천은 청아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청아루엔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슬쩍 보니 하나 같이 다 루주를 보러 온 손님 같았다.
세 사람은 맨 끝에 서서 세 개의 빈자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가장 먼저 제갈진천이 먼저 들어가고 그다음에 남궁유운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기루 안으로 들어갔다.
운이 좋게도 서로 다 보이는 거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할 건지 말해줬으면 하는데.』
『지금부터 시작이야.』
시작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남궁유운은 점소이를 불렀다.
그는 강점 중 하나인 ‘재력’을 무기로 꺼내 들었다.
“여기서 가장 비싼 술이 뭔가.”
“금존청(金尊淸)입니다.”
“그걸 몇 병이나 시켜야 루주와 술자리를 가질 수 있지? 5병이면 되나?”
“손님, 루주님은 술자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금존청을 10병이나 더 시켜도?”
“몇 병을 시키든 루주님은 술자리를 가지지 않을 겁니다.”
“만날 방법도 없나?”
“매상을 크게 올려주신다면 인사차 오는 루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남궁유운은 슬쩍 다른 손님들이 있는 자리를 둘러봤다.
다들 하나 같이 비싼 술을 시키고 루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들 사이에서 이기려면 5병만으로는 안 되겠다. 다 못 먹게 되더라도 금존청을 10병 이상은 시키는 게 낫겠어.’
남궁유운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요리와 금존청 10병을 시키고 루주를 기다렸다.
백서휘는 그를 보며 어떤 식으로 일을 풀어나갈지 고민했다.
‘권력이나 재력, 무력은 답이 될 수 없어.’
고관대작에 거상, 강호의 고수, 예인까지 모두 실패한 걸 보면 루주와 술자리를 가지거나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만 했다.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방에 있던 기녀가 비틀거리며 나오는 걸 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자기 주량 이상의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저거다!’
백서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궁유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궁유운 역시 웃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때 남궁유운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말했다.
‘이기는 건 나다.’
남궁유운이 가진 자신감의 근원은 따로 묻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의 직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재력과 권력.
송옥과 반안에 비견된다는 외모.
중원 전체를 두고 봤을 때도 떨어지지 않은 그림과 음악 실력.
강호를 주유하며 몸을 지킬 정도로 강한 무력.
하나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엄청난 걸 남궁유운은 다 가지고 있었다.
저놈한테 자신감이 없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했다.
‘그래도 저놈이 승부에서 이길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남궁유운이 가진 조건들이 통했으면 진작에 루주는 다른 사람과 밤을 보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보면 정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 게 맞았다.
‘내가 찾아낸 답이 정답이었으면 좋겠군.’
루주와 밤을 보내는 건 못하겠지만 술자리는 무조건 가질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때 점소이가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분주(汾酒) 5병이랑 가격 상관 없이 분자랑 어울리는 요리들로 서너 개 가져와봐.”
“정말 가격이 나가도 상관없으십니까?”
“그래.”
잠시 후, 점소이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분주 5병을 올려놓았다.
“요리는 나오는 대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기녀는?”
“곧 올 겁니다.”
점소이가 나가고 앳된 얼굴을 한 기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기녀는 안으로 들어오며 자기 소개를 했지만 백서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어차피 보내버릴 여자였기 때문이다.
“술은 좀 하나?”
“노력은 하는데 주량이 좀처럼 늘지 않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백서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달려볼까?”
일다경밖에 안 지났는데 기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
“거기 누구 없나!”
점소이가 후다닥 백서휘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로 찾으……. 어라?”
“취한 것 같으니 데려가. 다음 기녀로는 술이 센 사람을 데려오고.”
“아, 네!”
“분주도 3병 더 갖고 와.”
“네.”
백서휘의 방에 있던 기녀가 점소이의 부축을 받으며 나갔다.
다른 기녀가 오고 다시 또 한 식경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 들어온 기녀는 꽤 버티는 듯했으나, 분주가 가진 주기(酒氣)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밖에 누구 있나?”
“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술 대작하는데 기녀가 갑자기 잠이 들었다. 얼른 데려가고 새로운 기녀 데려와.”
이번엔 점소이가 기녀를 업고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또 다른 기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 기녀는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고 들어왔지만 작정하고 보내버리려는 백서휘를 이길 수 없었다.
다시 또 새로운 기녀가 오고, 얼마 안 있다가 밖으로 실려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또 없나?”
다른 기녀를 찾고 있는데 말쑥한 옷을 입고 콧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청아루의 총관입니다.”
“무슨 일로 왔지?”
“취한 것 같으신데 이쯤하고 일어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취하지 않았는데 취객 취급하니 화가 좀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내기에 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여기서 이놈을 죽이면 루주랑은 술 절대 못 마신다.’
총과직을 맡긴 걸 보면 루주가 굉장히 믿고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을 죽여서 루주에게 괜한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나보고 지금 나가라는 건가?”
“돈은 안 받겠습니다.”
“누굴 거지로 아나! 중간 정산할 테니까 얘 말고 다른 기녀나 데려와.”
누가 봐도 진상짓이 맞지만 지금은 이것 말고 루주를 끌어낼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총관이 사라지고 일각쯤 지났을 때, 하오문 소속 왈패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너 이리 나와!”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래, 지금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어디 있어!”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매서운 눈으로 왈패들을 노려봤다.
“미리 경고하지. 이 방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놈이 있으면 그놈은 죽는다.”
“죽는다고? 하하! 좆도 아닌 놈이 허세는…….”
가장 선두에 있는 사내가 오른발을 방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백서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뽑아 휘두르고 다시 검집에 납검했다.
스각!
소리가 뒤늦게 들리며 선두에 있던 사내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꺄아아악!”
“히익!”
다른 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녀와 다른 손님들이 기겁했다.
진짜로 죽일 줄 몰랐던 왈패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을 놓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남궁유운이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바라봤다.
“또 선을 넘고 싶은 놈이 있나?”
“이 자식이!”
사내 중 하나가 복수를 하기 위해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백서휘는 조금 전과 똑같이 발검술을 발휘해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너 우리가 어디 소속인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굳이 따지자면 하오문이겠지.”
“그걸 알면서 이런 짓을……!”
“본단이나 지부의 요인도 죽이는데 기르는 개새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이이익! 개새끼라고!”
“무공이랍시고 일초 반식을 겨우 배워놓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 너 같은 놈들을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백서휘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 왈패들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오문의 사소하게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개에 불과했다.
자신을 처리하는 것도 지부의 고수들이 나서기엔 작은 일이라 이들이 온 게 분명했다.
“자, 이제 어떡할 거지?”
“나와! 나오라고!”
무리의 이인자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더 하겠다는 거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몇몇 이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인 채 땅을 쳐다봤다.
“다른 놈들의 생각은 너랑 다른 것 같은데?”
이인자로 보이는 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왈패들은 백서휘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이인자로 보이는 자는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계속 그렇게 입구를 막고 있을 거야? 여기서 더 할 생각 없으면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왈패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다.
총관이 후다닥 뛰어오더니 그들을 향해 속삭였다.
청력을 증폭시켜 들으니 내용이 가관이었다.
‘더 고수를 데려오라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쫓아내려는 거 보면 기루에서 위기를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총관, 내가 때리기라도 했어.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했어? 대작한 것 말고 없잖아.”
총관이 말을 하다 말고 움찔하며 백서휘를 바라봤다.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은데 계속 이러면 피를 볼 수밖에 없어. 여기서 적당히 일을 마무리하고 싶으면 고수들 말고 기녀를 데려오는 게 좋을 거야.”
그때였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위층에서 계단을 내려왔다.
세상의 어떤 수식어를 떠올려도 그녀의 외모와 분위기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