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30화
“한 놈한테 화물을 다 털렸다고?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금녹상단의 대방, 구명학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 그놈이 죽기 싫으면 마차를 놔두고 가라고 해서…….”
“아니, 그놈이 그렇게 말했다고 진짜 놔두고 오면 어떡해!”
“바, 바로 마차를 안 두고 왔으면 이렇게 대방께 보고도 못 하고 그놈한테 죽었을 겁니다.”
“도망치려면 비녀라도 가지고 도망치던가!”
“죄, 죄송합니다”
대행수가 구명학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구명학은 그를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 털렸는지는 기억하지?”
“나, 남창과 여강 중간쯤에서 털렸습니다.”
“그 도적놈이 기다린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식객들을 보내면 되겠군. 당장 나가서 식객들에게 전해. 밥값하러 가라고.”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뭐?!”
“기습이라지만 우 대주가 아무것도 못 하고 단칼에 죽었습니다. 식객들만으로는 화물을 찾기…….”
“자, 잠깐만! 우 대주가 아무것도 못 하고 단칼에 죽었다고?”
“네…….”
구명학은 우근평의 본신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칼에 죽었다는 대행수의 말이 그에겐 심상치 않게 들렸다.
“그날 거기서 보고 들은 것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해 봐.”
대행수는 관도를 가로막는 나무를 발견했을 때부터 우근평이 단칼에 죽을 때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우 대주가 일 수에 죽은 이후에는 도망을 쳐서 뒷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호송대 소속 무인들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그놈한테 다 죽은 게 확실합니다.”
“그 정도 무력을 가진 놈이라면 확실히 식객만으로는 힘들겠군. 제기랄! 어떡한다…….”
“식객도 쓰고 홍염방의 방주에게도 부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적 방주에게?”
“예.”
구명학이 아는 홍염살귀(紅炎殺鬼) 적우현의 무위는 화우검객 우근평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뛰어난 수준.
우근평이 일 수에 당했으니 적우현도 그놈에게 단칼에 죽을 확률이 높았다.
“적 방주 혼자만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
“혼자가 아니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말이지?”
“적 방주와 홍염방도들, 식객들이 모이면 그놈을 무조건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음…….”
식객이나 적우현이야 그동안 챙겨준 게 있으니 괜찮았다.
문제는 홍염방의 방도들이었다.
그들을 얼마나, 어떻게 챙겨줘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비녀만 되찾으면 절강성 포정사님의 도움을 받아 이번에 받은 손해를 모두 만회할 수 있습니다.”
“좋아, 적 방주에게 연통을 넣어.”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비녀랑 화물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면 상단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뭐든 들어주겠다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대행수가 후다닥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 * *
“이, 이쯤에서 습격을 받았습니다.”
대행수가 믿어달라는 눈빛을 여기저기에 보냈다.
“다들 준비합시다.”
식객들의 지휘를 맡은 탈명도(奪命 刀) 진하승이 말을 하자 뒤따라오던 무리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대행수 양반, 여기에 그놈이 있는 거 확실해?”
“확실합니다. 저기 마차가 있던 흔적도 있지 않습니까.”
대행수가 까맣게 탄 마차 뼈대를 가리켰다.
“기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도적놈이 당신보다 고수일 확률이 높다고 했잖소. 기척을 숨기고 있는 거겠지.”
“이 강호에 나보다 고수는 몇 없어.”
“강호엔 모래알처럼 기인이사가 많다는 말 못 들어봤소?”
진하승이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적우현을 바라봤다.
“당신도 강하니까 알 거 아니야. 무공이 있으면 세상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근데 그런 재미를 버리고 산이고 들에 처박혀 있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모든 사람이 당신 같지는 않소.”
“나 같은 게 뭔데? 어! 나 같은 게 뭐냐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요?”
대행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다.
“자꾸 이러시면 일이 끝난 후에 대방께 보고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금녹상단과 계속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아깝네. 재밌는 구경할 수 있었는데.”
싸울 것처럼 굴던 두 무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백서휘가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왜 빈손으로 왔어. 돈 되는 물건 좀 많이 가져오라니까.”
“저, 저놈입니다! 저놈이 화물을 가져가고 우 대주를 죽였습니다.”
대행수는 흥분한 얼굴로 백서휘를 계속 삿대질했다.
“저놈이 그 화우검객을 일 수에 죽였단 말이지…….”
긴장한 적우현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고, 진하승은 말없이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아 들었다.
‘어디서 본 놈 같은데?’
백서휘는 적우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 잔살검! 그놈이랑 똑같이 생겼네.”
“잔살검이라고? 너 그 별호 어디서 들었어!”
“호남성 장사.”
“말하는 거나 표정을 보니 내 동생을 아는 놈인 것 같은데…….”
동생이란 말에 백서휘는 눈앞에 있는 자의 정체가 홍염방의 방주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건드린 건 금녹상단인데 왜 저놈이 튀어나온 거지?
식객들이 나온 거야 밥값을 해야 하니 이해가 가지만, 홍염방의 출연은 솔직히 좀 예상외였다.
‘뭐, 잘됐다고 생각하자. 찾아갈 수고를 덜었잖아?’
여기서 몇 놈이 더 늘어나든 땀조차 흘리지 않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 더 올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식객들까지 동원한 걸 보면 눈앞에 놈들이 금녹상단이 믿는 마지막 보루일 터였다.
이놈들을 모조리 다 분쇄해버리면 금녹상단은 저항할 힘이 남지 않을 거라 예상됐다.
“내 동생과 아는 사이인가?”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야. 아주 잘 아는 사이지.”
“내 동생의 행방에 대해 말해주면 나와 방도들은 여기서 이만 물러나겠다.”
적우현은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양손을 펴서 보여주며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진하승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적 방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금녹상단의 대방과 했던 약속을 잊기라도 한 거요?”
“생판 남과 한 약속보다 목숨보다 소중한 내 동생을 찾는 게 더 중요해.”
“제길…….”
진하승은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뒤에 있던 식객 무리도 그처럼 혼란스러워했다.
“그놈의 행방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놈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나거든.”
“저, 정말이냐!”
“그래.”
“어서 말해줘! 내 동생은 어디로 간 거야!”
“어디로 떠나는지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해서 말해줄 수가 없네.”
“……비밀이라는 거야?”
“그래.”
적과 아군을 떠나 죽은 자를 팔아먹는 건 별로였지만, 지금은 적우현을 도발해서 덤벼들게 만들어야 할 때였다.
소규모로 귀엽게 놀던 잔살검 적상현과 다르게 홍염살귀 적우현은 큰 규모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가 키운 50명은 나중에 가면 100명이 되어 있을 거고, 더 나중에 가면 300명이 되어 있을 거다.
방계 떨거지들일지라도 암중단체 출신이 몸집을 키우는 꼴을 백서휘는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
“강제로 들을 수밖에 없겠군. 홍염방!”
적우현이 투기(鬪氣)를 강렬하게 내뿜으며 나직이 말하자 홍염방도들이 기합 소리를 크게 냈다.
“혈염지옥진(血炎地獄陣)을 펼쳐라!”
홍염방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하나의 진세를 형성했다.
백서휘는 그들을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적가의 진법을 가르쳤잖아?’
암중단체의 무학(武學)은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끼쳐야 하는 방법으로 수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이게 중원에 전해지면 세력의 균형이 바뀌게 되어 혈풍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았다.
중원 무림을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적우현과 홍염방도를 죽이고, 마교의 무학이 더 퍼지지 않도록 회수해야만 했다.
‘오늘 여기서 살아나갈 사람은 나만으로 족해.’
백서휘가 모두를 죽일 생각으로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진을 이루어 피해를 나눠 받는 홍염방도들과 다르게 식객 무리는 그의 살기에 영향을 받았다.
몇몇 고수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나머지 하수들은 질식사하기 직전이었다.
진하승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중에 완전히 멀쩡한 사람은 나 말고는 없구나!’
식객 무리의 실력이 적우현과 홍염방도들에게 밀렸다.
진하승은 다급한 얼굴로 백서휘에게 도를 겨누었다.
‘크, 큰일이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진하승을 포함해 몇 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강한 사람은 진하승 본인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말고는 답이 없다.’
진하승은 전심전력으로 구환도를 휘둘렀다.
도극 부분에 달린 9개의 고리가 흔들리며 소름 끼치는 귀곡성을 냈다.
귀곡성을 들은 자들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몇 번 더 그렇게 반복하니 정상으로 돌아온 자들이 많아졌다.
그때 진하승이 배에 힘을 주어 외쳤다.
“공격!”
식객 무리가 소리를 지르며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형을 갖추지도 않은 무규칙하고 멍청한 돌격이었다.
백서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속도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앞에서 달려오던 셋의 몸이 사선으로 주르륵 무너져내렸다.
뒤에 오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백서휘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날아오는 무기 중엔 검이나 도, 창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무기거나 특수하게 만들어진 기형병기들도 많았다.
‘실력보다 무기의 특수함에 기대는 놈들인가.’
식객 무리와 암중단체들에 소속된 자들과 비교하면, 암중단체들 쪽 기형병기의 사용자가 더 매섭고, 기술이 뛰어났다.
백서휘는 검기가 화염처럼 일렁이는 검으로 무기와 사용자들을 한 번에 베어냈다.
스가가가각!
무기와 함께 사용자들이 토막이 나는 와중에 백서휘의 공격이 막혔다.
챙!
순서상 마지막이고 공격 한 번을 겨우 막아낸 것에 불과했다.
백서휘의 전력에 1할은커녕 서 푼도 안되는 공격이었다.
이제껏 그 공격조차 제대로 막아낸 적이 없기에 눈앞에 있는 자의 이름은 충분히 기억할 만했다.
백서휘는 검을 회수하며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세월의 풍파에 찌든 중년 남자로 조금 전에 공격 명령을 외쳤던 자였다.
“이름이 뭐냐.”
“탈명도, 진하승이다.”
“진하승이라……. 기억해두지.”
백서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전력으로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휘익!
백서휘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기척 역시 없어졌다.
식객 무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는 홍염방 쪽에 가 있었다.
중검(重劍)의 묘리를 한껏 담은 검이 가만히 구경만 하던 홍염방도들에게 날아들었다.
“적염지옥(赤炎地獄) 아니, 백염지옥(白炎地獄)으로 방어해!”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적우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홍염방도들도 느끼는 바가 있는지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으로 백서휘의 공격에 맞섰다.
귀청을 때리는 굉음이 들렸다.
피해를 나눠 받고 방어력이 올라가는 진의 공능 덕에 적들은 공격을 버텨 내긴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격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어 공격을 받은 자들 모두가 전신에 복합골절과 근육파열이 일어났다.
백서휘는 연속해서 중검의 묘리를 담아 혈염지옥진을 공격했다.
“선두 바꿔서 다시 한번 백염지옥!”
진이 한순간에 변화하며 선두에 있던 자들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들에게서 끝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백서휘는 무감각한 얼굴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이번에는 못 버틸 거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공격이 들어갔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나타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바닥에 있던 먼지가 떠올라 시야를 가렸지만 백서휘에겐 눈을 대신할 기감이 있었다.
‘죽었군.’
기감으로 확인한 적은 피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 이대로는 안 돼. 처, 청염지옥(靑炎地獄) 아니! 혈염지옥(血炎地獄을 펼쳐라!”
모든 홍염방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의 ‘오의’인 혈염지옥이 실패하면 견디기 힘든 반동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버린 ‘혈염지옥’에 도전했다.
휘이이이이익!
바람이 회오리치며 주변의 기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혈염지옥진에 자연 상태의 기가 합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암중단체 중 하나의 무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원 최고의 진법이라는 제갈세가의 진법에 조금도 꿇리지 않았다.
“혈염지옥!”
진으로 공격력이 증폭된 적우현의 검과 무시무시한 검사(劍絲)가 감도는 백서휘의 검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