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6화
자하무관의 인기가 많아진 만큼 사건·사고도 잦아졌다.
처음에는 무관복을 빌려주어 관원이 아닌 사람이 들어오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점점 심해지더니 포목점에서 똑같이 무관복을 만드는 경우, 아예 훔쳐서 들어오는 경우, 돈을 주고 무관복을 사고파는 경우가 생겼다.
이것들을 봐주면 무관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백서휘는 모두 허용치 않고 퇴관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수용 인원이 다시 늘어나 신입 관원을 새로 뽑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뽑느냐?’였다.
이전처럼 선착순으로 뽑기엔 자하무관에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선착순으로 뽑으면 무관 앞에서 십이면 십 할의 확률로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어떤 게 좋을지 모르겠네.’
고민됐던 백서휘는 무관 식구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받았다.
“신입 관원을 뽑을 건데 괜찮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아! 참고로 선착순으로 뽑는 건 안 돼.”
금태평을 제외한 이들이 저마다 하나씩 의견을 냈지만, 맘에 차는 게 없었다.
“태평이 너는 의견 안 내?”
“생각하는 게 있긴 한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어떤 건데?”
“추첨으로 뽑는 거요. 추첨권은 돈으로 팔고요.”
역시 상인의 피는 어딜 가는 게 아니었다.
금태평은 지금까지 나온 것 중 괜찮은 의견을 내놓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돈으로 판다는 게 걸리긴 하지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다른 무관 식구들이 찬성했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당첨됐을 때 그 권리를 양도까지 가능하게 하면 무관에 다니지 않을 사람도 권리를 팔기 위해 돈을 주고 참가하게 될 거예요.”
백서휘는 진심으로 금태평의 의견에 감탄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번에도 역시 개방의 거지들을 통해 행사를 홍보했다.
* * *
시간은 흘러 입관 추첨 행사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자하무관 앞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상자에 손을 넣고 있는 백서휘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뽑는 번호에 해당하는 분들은 닷새 후 술시정(戌時正, 20시~21시)까지 목패를 가지고 무관을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추첨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서휘가 번호가 적힌 종이를 하나씩 뽑을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환호성과 탄식 섞인 한숨에 저도 모르게 움찔움찔하게 됐다.
“……317번, 215번! 마지막, 117번! 이것으로 입관 추첨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신속하게 추첨을 마치고 무관 식구들을 먼저 보냈다.
백은하만 유일하게 남아서 백서휘를 도우려 했다.
“안 가고 뭐 해?”
“너 도와주려고.”
“아냐, 됐어. 나 혼자 할게. 이거 끝나고 따로 갈 때도 있고…….”
“어딜 가게? 도화루?”
백서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물어봤어.”
“그렇구나.”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내 입에서 한 식경이 넘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질문만 빼면 얼마든지 해도 돼.”
“도대체 어느 기녀에게 빠진 거야?”
“기녀에게 빠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할 거야?”
백은하가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누나가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뭐 때문에 도화루를 가는 건데?”
“일 때문이지.”
“아니, 술 파는 사람도 아니고 무관 관주가 일 때문에 기루에 갈 일이 뭐가 있어.”
백서휘는 입을 비죽거리며 고민하다 도화루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도화루는 하오문의 호남성 지부야.”
“하오문? 왜 하오문을 가?”
백은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일이 있어.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해준 거 어디에 소문내고 다니면 안 돼.”
“알았어.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는 진짜 안 알려줄 거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줄게.”
백서휘는 백은하를 보내고 도화루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화루에 도착한 백서휘는 태극무관의 관주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여깄어요.”
화란이 백서휘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고맙다.”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백서휘는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태극무관의 관주는 귀검자(龜劍者) 구지환으로 무위는 일류에서 절정 사이……. 잠깐, 구지환?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는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백서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천지회의 지부 중 하나를 쳤을 때 본 비밀 정보 제공자 목록.
그 서류에 ‘구지환’이란 이름이 분명 있었다.
‘그 시간에 딴 놈 죽이는 게 이득이라 놔뒀었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네.’
태극무관을 무너뜨리려던 참에 구지환이 천지회의 끄나풀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니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해봤지만, 너무 잔챙이라 구지환을 이용해서 이득을 볼 만한 일이 없었다.
‘빙빙 돌아갈 것 없이 바로 죽이는 게 낫겠어. 그게 나한테도, 중원한테도 이득이 되겠지.’
구지환을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을 내리니 속이 시원해졌다.
‘그나저나 하오문은 왜 구지환에 대해 몰랐던 거지? 하오문의 한계라고 봐야 하나?’
하오문의 정보력이 그렇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건 호남성 지부의 한계라고 봐야 했다.
‘뭐, 그래도 여기서 이름을 본 덕에 천지회의 첩자란 걸 기억했으니 됐어.’
백서휘가 돈을 주고 밀실을 빠져가려는데 화란이 그를 붙잡았다.
“귀빈께 드릴 정보가 아직 남아 있어요.”
“정보? 어떤 거?”
“그놈에 대한 정보요.”
“그놈? 누구?”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놈이요.”
“어? 진짜?”
“얼마 전에 강서성에 들렀다고 해요.”
“강서성? 거기서 뭘 했는데?”
“파악하려고 노력 중인데 쉽지 않아요. 시도를 했다가 문도들이 꽤 많이 죽는 바람에 강서성 지부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소재만 계속 파악하고 있고 뭐 하고 다니는지는 캐지 마. 그놈은 내가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처리할게.”
“알겠어요.”
백서휘는 도화루를 벗어나 자하무관으로 돌아왔다.
‘바로 가? 아니다.’
수호문의 문주로서 일하는 거니 옷을 갖춰야 했다.
무관으로 돌아가 삿갓을 쓰고 혁대를 배에 두른 후 피풍의까지 챙겨 입었다.
무관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친 상태에서 응룡비천신법을 전력으로 전개했다.
지붕 위 기와를 밟으며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신기하게도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저기인가.’
내공으로 안력을 돋우어 현판을 확인했다.
현판에는 태극무관이란 글자가 용사 비등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일을 할 때였다.
백서휘는 대문을 훌쩍 뛰어넘어 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관 내부엔 장부를 보며 중얼거리는 구지환이 있었다.
“관원의 수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어. 이래서는 무관을 운영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오늘 이후로는 무관을 운영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백서휘는 앞뒤, 좌우, 상하 전부에서 소리가 들리는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써서 위치를 감추었다.
구지환은 검을 뽑아서는 원 모양으로 크게 휘둘렀다.
일류와 절정 사이의 무사가 보여줄 수 없는 반응속도.
‘하오문의 정보에 빠진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도 있었군.’
백서휘는 하오문을 이용하는 일에 좀 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지 못했다고?”
손에 아무런 감각이 없자 구지환은 검날부터 확인했다,
검날에는 핏방울은커녕 실오라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구지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적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상황.
“조금 더 빨랐다면 베었을 텐데.”
백서휘는 이번엔 바로 귓가에 들리게 하였다.
이번엔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구지환은 다시 한번 소리가 들린 쪽에 검을 휘둘렀다.
쐐액!
역시나 이번에도 검에 베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게 만들면 된다.’
구지환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계속 모습을 감추는 걸 보면 잔기술만 있을 뿐, 다른 무공엔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 판단 확신하나?”
“확신한다. 자신이 있다면 그 모습을 드러냈겠지.”
“재밌군.”
삿갓을 푹 눌러쓴 백서휘가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정체를 밝혀라.”
“너부터 밝히지 그래.”
“태극무관의 관주, 구지환이다.”
“틀렸어.”
“틀렸다고?”
“천지회 비밀 정보 제공자 117호. 이것이 너의 정체 아닌가?”
“……이제는 아니다.”
구지환은 살짝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널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날 죽인다고?”
구지환은 정체 모를 상대와 비교하면 명백한 하수였다.
고수를 상대할 때 원래 성격대로 방어만 하면 끌려다니는 경우가 생길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구지환은 선공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죽어라!”
백서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가 알기로 구지환은 싸울 때 거북이처럼 방어만 한다고 해서 귀검자라고 불리는 자였다.
그런 자가 지금 거리를 좁히며 다가와 적색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싸움을 원하는 대로 이끌기 위해서겠지.’
백서휘는 슬쩍 피하는 것으로 공격을 무관이 받게 유도했다.
콰앙!
무관의 바닥 일부가 부서지고, 한쪽 벽에 구멍이 커다랗게 났다.
비슷한 방법으로 몇 번 피하니 무관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변했다.
“이놈!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맞서 싸워라!”
“그러지.”
백서휘는 태극무관에 온 이래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구지환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눈 채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간다!”
백서휘가 공격의 시작을 알렸다.
구지환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그의 위치를 찾았다.
“여기다!”
백서휘가 공격의 시기와 위치를 알려준 덕에 구지환은 쉽게 공격을 피했다.
‘멍청한 놈!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군.’
구지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좀 큰 거다!”
콰아아앙!
무관 바닥이 완전히 부서지며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십 년 감수했다. 저기에 맞았으면 나는……. 잠깐, 무관이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관은 골조와 벽, 지붕, 바닥 등이 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덕분에 신나게 때려 부쉈다만.”
“이이익! 자라 같은 자식! 내가 한 푼 두 푼 모아 만든 무관을……!”
“안 됐군.”
백서휘는 한쪽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죽여버리겠다! 크아아악!”
구지환의 눈이 검게 물들더니, 팔과 다리가 두족류 형태에 손톱이 달린 것으로 변했다.
“그르르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백서휘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구지환의 변화를 지켜봤다.
촌각의 시간이 흘렀을 때는 더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구지환의 형태가 바뀌어 있었다.
“멍청한 놈. 죽어도 인간으로 죽었으면 다음 생을 빌어볼 텐데…….”
그때 구지환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그라라라락!”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충 검을 휘둘렀다.
스각!
스무 개가 넘어가는 구지환의 팔다리가 몸에서 떼어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중에 하나는 회전하며 날아가더니 태극무관의 현판에 박혔다.
“이놈의 회복력은 진짜…….”
잘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구지환의 어깻죽지와 무릎에서 자그마한 크기의 팔다리가 재생되었다.
“더 민폐 끼치지 말고 죽어라.”
백서휘는 구지환의 목을 잘라버리고는 잘린 팔다리를 꼼꼼히 찾아 한곳에 모았다.
치이익!
화골산으로 ‘구지환이었던 것’을 완전히 녹였다.
“놓친 건 없겠지.”
백서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기감을 넓혀 확인한 후 무관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