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4화
응룡비천신법을 전력으로 펼친 덕에 유성객잔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백서휘는 기감을 넓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1층에 셋, 2층에 둘이 있었다.
백서휘는 다섯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자색 무복을 걸친 남자가 구석에서 식사하는 게 보였다.
‘화산파……?’
애꿎은 무인을 잡을 수 있기에 소매와 얼굴을 확인했다.
소매에는 여러 송이의 매화가 자그맣게 수놓아져 있었고, 얼굴은 밀실에서 봤던 초상화와 닮았다.
‘운학 맞군.’
백서휘는 천천히 걸어가더니 운학이 앉은 탁자 앞에 섰다.
“합석해도 되겠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운학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건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변에 자리 많지 않습니까. 다른 자리로 가주십……. 헉!”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뒤에서 나를 캐고 다니는 걸 모를 줄 알았나?”
“호, 혹시 대협의 함자가 백서휘 맞습니까?”
“그건 왜 묻는 거지? 조사를 했으면 이름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씀해주십시오. 대협의 함자가 백서휘 맞습니까?”
“그래, 맞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운학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백서휘처럼 정의를 위해 싸우고 무공도 강하며 어린아이에게 제법 친절한 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고,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서휘를 만나게 되니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감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해 모르는 백서휘는 이상한 사람을 보듯 운학을 쳐다볼 뿐이었다.
“화산파 15대 제자 운학이라고 합니다.”
“화산파 제자란 건 이미 알고 있어. 왜 나를 캐고 다닌 건지나 말해.”
“제가 운학이란 도명을 쓰기 전에 썼던 이름은 백성현입니다. 혹시 이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자꾸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는군.”
“기억 못 하시군요. 포달랍궁에…….”
갑자기 백서휘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여긴 그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닌 것 같군.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네.”
백서휘와 운학은 사람이 없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아까 하던 말 계속해.”
“포달랍궁에 납치됐을 때 은인께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포달랍궁에서 구했다고? 그때 구했던 세 아이 중 하나가 너란 건가?”
“역시 은인이 맞으셨군요!”
운학은 백서휘가 자기를 특정하는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기뻐하는 그와 다르게 백서휘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졌다.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거지? 얼굴이랑 이름 정도만 알고 있을 텐데?’
중원에 사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이름과 얼굴만으로는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대신 물어보면 어디서 단서를 찾은 건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사문의 비밀만 아니라면 뭐든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내 정체랑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백서휘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살기가 깃들여져 있었다.
그가 겪는 왜 이러는지 짐작한 운학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은인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제가 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모두 하늘이 저를 은인과 만나기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준 게 하늘이다?”
“알려준 게 아니라 서로가 만날 수 있게 해준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진짜입니다. 저는 원래 은인을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럼?”
“화산파에 익명의 제보가 들어와서 자하무관을 조사하던 차였습니다. 식사하면서 그간 조사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은인께서 절 찾아온 겁니다.”
백서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제게 합석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꿈에서 매번 듣던 목소리라 바로 은인의 얼굴과 이름이 머릿속에 연상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얼굴을 본 순간…….”
운학은 다시 한번 생각해도 감격스러운지 몸을 또 부르르 떨었다.
“그건 일단 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는 거로 하고, 익명의 제보가 뭔지나 설명해 봐.”
“몇 달 전에 집법장로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건가?”
“편지에는 자하무관이 지금 화산파의 무공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고, 무관의 규모를 속여 본산에 기부금을 적게 낸다는 제보였습니다.”
기부금이나 무공에 관한 이야기는 속가제자가 되어 무관을 운영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로 익명의 제보자가 누군지 특정됐다.
‘태극무관의 관주 짓이군.’
백서휘는 마음속에 있는 살생부에 ‘구지환’이란 이름을 올렸다.
“그 두 가지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줬으면 하는데?”
“기회를 드리도록 하죠.”
“좋아, 기부금 건부터 해명하자면, 돈 아끼자고 신고를 누락 한 건 아니야. 무관이 이렇게 잘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거품이 언제 터질지 몰라서 다음으로 미룬 것뿐이야.”
“진짜 신고하려고 했던 거 맞습니까?”
“관원이 1명도 없을 때도 기부금을 꼬박꼬박 냈는데 인제 와서 일부러 다른 의도를 가지고 누락 할 일은 없지. 진짜로 다음 기부금을 보낼 때 신고하려고 했어.”
“그러면 무공 건은 어떻게 된 거죠?”
“무관의 이름이 자하무관이고 내가 관주가 맞긴 한데, 화산파 무공을 잘 몰라.”
속가제자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서 문제지 화산파 무공에 대해서는 백서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밝히면 화산파와 원수지간이 될 수 있으므로 백서휘는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예? 화산파 무공을 모르신다고요?”
“조사해봤으니 알겠지만 나는 20년간 실종됐었어. 그때 스승께 다른 무공을 배웠지.”
운학이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에 실종에 관한 게 확실히 있었다.
그는 그때 품었던 의문을 지금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실종된 거죠? 제가 포달랍궁에서 은인께 구원을 받을 때도 실종 상태였던데…….”
“자세히 설명하면 길고 알려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냥 그 실종 상태일 때 많은 일이 있었다고만 해두지.”
운학은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정답에 가까웠다.
백서휘는 중원을 지키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구했다.
“무공 건에 관해서 변명을 더 하자면, 20년 만에 돌아와서 다시 무공을 익히려고 했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었다. 나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어.”
운학이 계속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누나는 나보다 훨씬 하수인데다 무공을 불완전하게 알아서 화산파 무공을 가르치는 게 불가능했다. 잘못 가르쳤다가 나나 관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음…….”
운학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는 자하무관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새로 교육을 받는 건…….”
“힘들지.”
“끄응.”
“정, 우리가 화산파 무공을 가르치길 원한다면 네가 가르쳐 주는 게 어때?”
백서휘는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란 마음으로 툭 던지듯 말했다.
“제, 제가요?”
“그래.”
“그건 좀 힘…….”
백서휘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화산파 무공을 배우지도 못했을 거다.
그 덕분에 배운 무공인 만큼 베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제가 사범이 되어서 화산파 무공을 가르칠게요.”
“진짜?”
“네.”
“자하무관 조사는 어쩌고.”
“그건 보고서로 만들어서 서신으로 보내면 끝입니다.”
“윗분들이 가만히 있을까?”
“은인께 은혜를 구하는 일이니 스승님이나 장로님들도 양해해주실 겁니다.”
“음……. 그러면 그렇게 하는데……. 아! 그 보고서에 내 얘기는 안 넣었으면 좋겠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포달랍궁에 관한 일.”
“예? 왜요?”
“그 일로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 지금의 삶이 어그러지는 것도 싫고.”
“알겠습니다. 보고서를 쓸 때 그 부분은 빼도록 하죠.”
“그럼 그 일은 내가 말한 대로 처리하는 거로 하고……. 사범으로 출근은 언제부터 할 거야?”
“일주일 후부터 하겠습니다.”
“일주일이면 너무 긴데.”
“본산에 서신도 보내야 하고, 가르칠 무공이랑 어떻게 가르칠지도 생각해야 돼서 못해도 일주일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더 줄일 순 없다는 거지?”
“네.”
“좋아,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일주일 후부터 무관으로 나오도록 해.”
“네!”
운학과 헤어진 백서휘는 무관이나 사합원 대신 취죽교로 향했다.
취죽교에 도착해 밑을 보니 거지들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팔자 좋군.”
백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잠들지 않았던 거지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나 알지?”
“네, 넷!”
거지의 군기가 바짝 들은 걸 보니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분타주 어딨어?”
“구, 구걸하러 가셨습니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 부족한지 백결개는 백서휘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거짓말이 확실한데……. 왜 그런 거지?’
사실 이유야 어찌 됐든 좋았고 건수를 잡았다는 게 중요했다.
그때 제일 큰 움막에서 나겁개가 배를 긁으며 나왔다.
“지금이 몇 시……. 헉!”
“너는 가고 나겁개는 이리 와서 여기 서봐.”
나겁개가 쪼르르 달려와 눈앞에 섰다.
“내가 찾아오면 없다고 말하라고 밑에 놈들 교육했지?”
“그, 그런 적 없소.”
나겁개는 백서휘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뻔뻔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거, 거짓말 아니오.”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야 할 벌이 가벼워 질 거야.”
“버, 벌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그건 조금 후에 알려줄 거니까 솔직하게 말하기나 해.”
“교, 교육했소. 그런데 대협께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정도 들었으면 됐어. 벌은 ‘일주일간 무관을 홍보하기’다.”
“잘못에 비해 벌이 너무 과한 것 같소. 사흘로 줄여주면…….”
“안 돼.”
“그러면 닷새로.”
“안 돼. 대신 돈을 주지.”
“얼마를…….”
“은자 열다섯 냥.”
“헉!”
나겁개는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숨을 들이켰다.
“할 텐가?”
“하, 하겠소! 아니, 하게 해주시오.”
“좋아, 그러면 일주일 후까지 구걸하면서 ‘최연소로 매화검수가 된 운학이 자하무관에서 사범으로 일하니 무공을 배우고 싶은 분은 많이 등록해달라’는 식으로 홍보 문구를 말하고 구걸 안 할 때는 그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았다는 놈에 대해 알아봐.”
“최, 최연소 매화검수? 그게 사실이오?”
“그래.”
“마, 말도 안 돼. 어찌 그런 일이…….”
“세상 살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일어나곤 하더군. 뭐, 거짓말 같으면 일주일 후에 우리 무관으로 와보던가.”
백서휘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지, 진짜였구려.”
“그렇다니까.”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놈을 찾으면 그때 보고하면서 매화검수를 보겠소.”
“그러든가.”
백서휘는 선금을 주고 무관으로 돌아갔다.
‘일주일 후가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