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1화
‘서로를 경계하고 있군.’
가만히 서 있던 백은하와 주철룡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서로의 빈틈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근소하게나마 경지가 더 높았던 주철룡이 백은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이 꼭 사냥감을 발견한 비호(飛虎)같았다.
백은하가 검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닥쳐올 공격을 대비했다.
그녀의 청강검에 매화를 닮은 연분홍빛 검기가 피어올랐다.
“흐앗!”
주철룡이 품속에 파고들기 위해 빠른 속도로 보법을 밟았다.
백은하는 뒤로 물러나기보다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낙매성우(落梅成雨) 초식을 펼쳤다.
폭우가 쏟아지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그녀의 공격에 주철룡이 달려드는 걸 멈추고 방어에 나섰다.
채채챙!
검은 수투(手套)를 낀 주철룡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백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납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채채채챙!
‘나보다 하수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지?’
낭패를 봤다고 생각한 주철룡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다시 벌어지자 백은하는 검을 그에게 겨눈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제법인걸…….’
검이 닿는 범위 너머에 있을 때는 산처럼 가만히 있다가,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불이 번지는 것처럼 맹렬하게 공격하는 것은 감탄이 나올 만큼 영리한 움직임이었다.
지금 같은 움직임이 계속되면 주철룡은 백은하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어떤 무인이든 회심의 한 수가 있으니…….’
주철룡은 백은하의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가 뒤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속도를 눈에 익게 만들려나 보네.’
그때 주철룡이 여태 움직였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속도에 익숙해졌던 백은하는 당황하고 말았다.
주철룡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던 백서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직 충분히 여유 있으니까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매화인동(梅花忍冬) 초식을 펼쳐.』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매화.
그런 매화처럼 상대의 공격을 버텨내며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노리는 초식이 백은하의 손에서 펼쳐졌다.
깊숙이 파고들려는 주철룡이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는 수투를 낀 손으로 백은하의 검을 쳐내며 반 발자국씩 앞으로 이동했다.
계속 내버려 뒀다가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백은하에게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 희생해줘야겠어.’
백서휘는 위력이 약한 지풍을 은밀하게 쏘아 보냈다.
소리 없이 은밀히 날아간 지풍은 사람을 웃게 만드는 기호혈(氣戶穴)에 스며들었다.
“하하!”
주철룡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다들 그가 유리한 고지를 잡아서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철룡의 웃음은 더욱 심해져 갔다.
백은하는 자기를 비웃는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크하하! 하하하! 크크큭!”
주철룡은 웃음을 참으며 어떻게든 방어하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몸에 생채기는 점점 늘어났고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손해를 보면서 계속 버티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웃음이 나온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주철룡은 지금 그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쁘게 방어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는 이전과 동일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제기랄!’
회심의 일격이 막혔으니 새로운 묘수를 짜내야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주철룡이 고민하는 사이, 백은하가 싸우는 방식을 공격적으로 바꾸었다.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펼치라고 했지?’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에는 스물네 개의 초식이 있었다.
그 초식 중 백은하가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건 매화낙섬(梅花落暹)이란 초식이었다.
백서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 어려워서 펼치는 걸 꺼렸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백서휘에게 1대1로 가르침을 받은 이후부터는 비장의 무기가 되었다.
‘그 비장의 무기를 지금 보여주겠어!’
백은하는 이를 악물고 주철룡을 향해 달려갔다.
검이 닿는 거리에 이르자 그녀는 연분홍빛 검기가 불완전하게 일렁이는 검으로 매화낙섬을 펼쳤다.
그녀의 검이 천변만화하며 주철룡의 눈을 속였다.
주철룡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보법을 밟아가며 수투를 낀 손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어느 게 허초고 어느 게 실초인 거지?’
가뜩이나 빨간 주철룡의 상의가 피에 물들어 점점 붉게 변해갔다.
‘공격을 다 막으려 드니까 점점 더 막기가 힘들어져. 정말 위험한 것만 막자.’
급소를 향한 공격은 방어하고, 급소가 아닌 공격은 그냥 맞아버렸다.
백서휘는 그런 주철룡을 보며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근골과 오성 모두 별로지만, 경험은 많은 것 같군.’
검의 변화에 완전히 속아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만한데도 주철룡은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살짝만 더 도와 줘볼까.’
백서휘는 다시 한번 은밀하게 지풍을 날렸다.
날아간 지풍은 주철룡의 위중혈(委中穴)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출혈 때문인가? 어지러워.’
주철룡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비틀거리는 그의 움직임을 본 백은하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주철룡은 술을 마신 사람처럼 갈지자로 걷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백은하는 넘어지는 그를 받아 땅에 눕혀주었다.
금강무관의 관주와 그의 아내가 아들을 향해 달려왔다.
“처, 철룡아!”
“주철룡! 정신 차려!”
뺨을 때려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자 금강무관의 관주는 주철룡을 의방에 데려갔다.
‘언제 오려나.’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지현의 심기불편한 표정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백서휘은 가만히 서서 금강무관의 관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설마 도망간 건가?’
지현의 눈앞에서 패배한 이상 도망갔더라도 무관의 현판을 내려야만 했다.
그걸 금강무관의 관주도 알고 있을 터였다.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네.’
다시 돌아와 패배를 승복하는 거나, 패배를 승복하지 않거나.
무엇을 선택하든 금강무관의 관주는 자신에게서는 승리를 가져갈 수 없었다.
그때 지현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만 가봐도 되는 건가.”
“조금만 더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알겠네.”
한 식경이 조금 안 될 정도로 기다리니 금강무관의 관주가 공터로 돌아왔다.
“패배를 인정하나?”
“무공에서 진 게 아니라 아들에게 오랜 지병이 있어 진 거다. 사범전은 무공으로 승부가 결정된 게 아니므로 무효 처리를 해야 돼!”
그 누가 봐도 지금은 금강무관의 관주가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었다.
지현은 그를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생계수단이 무관이란 걸 떠올리고는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관주전을 치르자는 건가?”
“그래.”
“어떡할 텐가?”
지현이 백서휘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이쪽과 일전을 치러도 상관없습니다.”
“대결을 승낙한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예,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서 비무를 다시 치르게나.”
“두 번 설명했으니 규칙에 관해선 설명하지 않겠네. 서로에게 인사하게나.”
중앙으로 간 백서휘와 금강무관의 관주는 인사를 하고 다섯 보 뒤로 물러났다.
“시작하겠네.”
검은 손수건을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졌다.
금강무관의 관주가 주먹을 빠르게 두 번 내뻗었다.
백서휘는 공격을 허용했지만, 타격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저놈은 지금 아픈 걸 참고 있는 게 분명해.’
금강무관의 관주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잉어가 뛰어오르는 것처럼 하늘 위로 도약했다.
“받아라!”
백서휘는 금강무관의 관주가 내뻗은 두 주먹을 장타(掌打)로 가볍게 쳐냈다.
땅에 착지한 금강무관의 관주는 학이 날개를 뻗는 것처럼 양옆으로 손을 내뻗었다.
‘빈틈!’
백서휘는 슬쩍 옆으로 피하며 손날치기로 곡지혈을 힘껏 때렸다.
“끄아아악!”
금강무관의 관주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백서휘는 계속 덤비라는 의미로 손을 까딱거렸다.
‘이 자라 같은 자식! 앞선 비무에서 이겼다고 나를 개좆으로 보는구나.’
분기탱천한 금강무관의 관주가 싸움에 임하는 호랑이처럼 두 주먹을 빠르게 뻗었다.
파바바박!
연속해서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백서휘에게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화를 참지 못한 금강무관의 관주가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미친 듯이 내질렀다.
정교한 초식을 펼쳤을 때도 맞추지 못했는데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백서휘는 후발선지(後發先至)의 묘를 발휘해 금강무관 관주의 손을 일일이 쳐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고!”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서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이 개자식!”
금강무관의 관주가 모든 내공을 담은 발차기를 내질렀다.
‘마지막 발악인가?’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허리를 비틀어 발차기를 날렸다.
똑같은 발차기지만 다른 게 있다면 그의 발등에는 소량의 내공과 한계까지 증폭한 경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금강무관의 관주는 백서휘의 공격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피, 피해야……!’
다리에 힘을 강하게 줘 방향을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백서휘의 발등은 그 바꾼 방향을 계속 쫓아왔다.
‘안 돼! 왜 따라오는 거야! 무슨 방법이 없나? 그래! 뒤로 뛰면! 뒤로 뛰면 살 수 있어!’
금강무관의 관주는 한쪽 다리에 모든 내공을 담아 땅을 밀쳤다.
그러자 눌린 용수철처럼 그의 몸이 슝 하고 날아갔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가 생성됐지만, 만든 당사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난리를 피웠다.
‘이, 이게 절정 고수?’
조금 과하긴 했지만 백서휘는 절정의 경지 내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
“하, 항복 아니, 기권하겠습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된 금강무관의 관주는 만세를 하듯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세 번째 비무의 승자는 자하무관이네. 첫 번째와 세 번째 비무에서 자하무관이 승리했으니 내기의 패자인 금강무관은 돌아가는 대로 속히 현판을 내리시게나.”
“그, 그리하겠습니다.”
금강무관의 관주는 지현에게 참관인으로 와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람들과 함께 공터를 떠났다.
“우리도 가볼까.”
“거기 자네 나랑 잠깐 대화 좀 나누는 게 어떻겠나?”
지현이 백서휘 일행을 붙잡았다.
“무슨 대화를…….”
“자네가 관주로 있는 무관에 내 딸을 관원으로 등록하고 싶네.”
막 굴릴 수 있으면서 금태평처럼 돈이 많은 관원이라면 모를까.
머리 위에 앉을 상전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녀를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무공을 배우는 건 조금 힘들지 않나 싶은데…….”
“저기 있는 사범도 여자이지 않나.”
“누님은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수련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입니다.”
“내 딸에게도 그 혹독한 수련을 해주지 않겠나?”
“그게…….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따님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어서 가르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자네 노비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분의 차이는 없네. 우리가 다른 건 내가 관인(官人)이고 자네가 무관의 관주라는 것뿐이네.”
백서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말로는 이기기 힘들었다.
‘무관을 더 크게 키울 기회라고 생각하자.’
백서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입을 열었다.
“따님의 등록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무공 교육에 한해서는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시고 절대 간섭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도록 하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록비와 수강료는 얼마나 되나?”
지현이니 돈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백서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막 질렀다.
“등록비는 은자 세 냥이고, 수강료는 은자 다섯 냥입니다.”
“싸군.”
“내일 딸의 손에 등록비와 수강료를 들려 보내도록 하겠네.”
“따님 혼자서 그만한 돈을 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오갈 때 항상 포쾌를 같이 보낼 거네. 아! 혹시 포쾌의 수강비도 내야 하는 건가?”
“무관 안에 들어와서 같이 있는 거라면 내야 합니다.”
“둘의 비용도 딸의 손에 들려 보내겠네.”
“감사합니다. 아! 무관의 위치가 어딘지는 아십니까?”
“이 근방 어디 아니겠나. 어차피 포쾌와 같이 다닐 테니 길을 잃지는 않을 거네.”
“음……. 미리 고지를 해드릴 게 있는데 저희 무관이 지금 증축 공사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수련은 이 공터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네.”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게 싫으시다면 저희 무관에는 당분간 등록할 수 없습니다.”
“딸이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이건 물어봐야 할 것 같네. 잠시만 기다려줄 수 있겠나?”
“얼마든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지현은 한참 동안 딸과 대화를 나누었다.
“다닐 수 있다고 하니 내일부터 이곳으로 딸을 보내도록 하지.”
“학관에 다니지 않는다면 사시에, 다닌다면 신시에 오시면 됩니다.”
“알겠네, 명심하도록 하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보세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백서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백은하와 금태평과 함께 사합원으로 향했다.
“관주님.”
“왜?”
“저는 일곱 냥이나 내는데 걔는 왜 다섯 냥밖에 안 내요?”
금태평이 백서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백서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변명을 짜냈다.
“수준이 달라서 그런 거야. 너는 초급반이고 걔는 기초반이거든.”
“아!”
다른 관원보다 수준이 높다는 게 마음에 드는지 금태평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중급반은 언제 올라갈 수 있어요?”
“초급반 졸업하면.”
“초급반은 어떻게 졸업하는데요?”
“졸업할 능력이 되면.”
“어떤 능력이…….”
“그만 물어보고 가면서 오늘 비무 복기나 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