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7화
홍륜의 지휘 아래 일꾼들이 무관 뒤쪽의 집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백은하 부부는 오랫동안 살던 집이 부서지는 걸 지켜봤다.
그들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서휘는 둘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어 위로의 말도, 축하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냥 정수련과 같이 서서 두 사람과 집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이쯤 봤으면 됐지. 서휘야! 밥 먹으러 가자! 진랑,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수련아, 배고프지?”
“응.”
백은하가 두 사람을 장소의 이동을 권유했다.
“업히시오.”
“그냥도 갈 수 있어요.”
“내 마음이 쓰여 그렇게는 못 하겠소. 업히시오.”
정하진이 백은하에게 계속 등을 내밀었다.
“업는 건 제가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무공도 배웠고, 오랜 시간 단련해서 근력 면에서…….”
“이 사람의 남편은 나라네.”
정하진은 부드러운 듯 단호하게 말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어 가만히 있으니 백은하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정하진에게 업혔다.
“가세나.”
“삼촌 나도 업어줘요!”
“그래.”
정하진이 백은하를 업고 며칠 전 이사 간 사합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백서휘는 정수련을 업고 말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사합원에 도착하니 이 시간에 올 줄 어떻게 안 건지 식모가 밥을 차리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가 미리 부탁해놨어요. 이쯤 차려달라고.”
백은하가 웃으며 말하고는 의자에 앉았고, 백서휘는 정수련을 의자 위에 앉힌 후에 그 옆에 앉았다.
정하진은 자연스럽게 백은하 옆에 앉게 됐다.
“먹읍시다.”
식사하며 잡담을 나누던 와중에 금태평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얘는 왜 안 나왔던 거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안 나오는 거 보면 무슨 이유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싶어 정하진에게 물었다.
“무관에 다니던 애가 왜 안 나오는지 아십니까?”
“처남이 알아서 한다던 그 애 말하는 건가?”
“네.”
“음……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네와는 연관이 없어 보이네. 자네가 돌아오고 밝아지긴 했지만 얼마후 안색이 다시 안 좋아졌거든.”
“제가 돌아온 걸 알고 있다는 거죠?”
“알고 있을 거네. 아마도.”
“혹시 학관은 꼬박꼬박 잘 나옵니까?”
“수업에 열의가 없어서 그렇지, 학관에는 꼬박꼬박 나오네.”
“그렇군요.”
백서휘는 학관을 찾아가 이유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다음 날.
백서휘는 금태평을 만나러 학관을 찾아갔다.
‘끝났는데 왜 안 나오지? 오늘 출석을 안 한 건가?’
아이들은 계속 나오는데 금태평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금태평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같이 하교를 하는 친구가 왜 하나도 없는 거지? 늦게 나와서 그런 건가?’
금태평은 원래 하교 시간보다 일각이 안 되게 나왔을 뿐인데 집에 같이 가는 친구가 없다는 건 뭔가 좀 이상했다.
‘때리던 놈들이 같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괴롭힘에서 벗어나긴 한 것 같은데…….’
금태평이 여전히 혼자인 건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한번 물어보자.’
백서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금태평!”
숙어진 금태평의 고개가 위로 올라오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소리 낸 사람을 확인하자 금태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불렀는데 안 뛰어오고 뭐 해.”
“죄, 죄송해요.”
“됐고. 무관에 왜 안 나왔는지나 말해. 내 핑계는 대지 말고.”
“……형이 다니지 말라고 그랬어요.”
“형이라면 그 지금 만복상단의 대방인 그 사람?”
“네.”
“무슨 명분으로 다니지 말라고 하는 건데.”
“제가 주먹으로 양팔을 부러뜨린 애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그놈 부모가 상단을 찾아와서 자기 아들을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밥이 넘어가냐면서 막 소동을 일으켰대요. 형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
금태평은 고개를 다시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놈 부모도 참 양심이 없군.”
“어쨌든 그거 때문에 형이 다시는 무공 같은 거 배울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형만 허락하면 다시 다닐 수 있다는 거지?”
“……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문제가 일어나면 문제 되는 걸 없애는 걸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사람 같은데…….’
금태풍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가 일어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좋아, 가자.”
“어디를…….”
“만복상단.”
“사, 상단은 왜요?”
“일단 안내해봐.”
어차피 금태평 입장에선 지금보다 최악이 없었다.
다시 무공도 배우고 싶었고, 백서휘와도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금태평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만복상단을 향해 걸어갔다.
‘저긴가.’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과 짐마차가 장원 안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백서휘는 한눈에 장원이 만복상단의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저기가 너희 형이 운영하는 상단이야?”
“네.”
“좋네.”
“……뭘 하시려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그건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백서휘는 장원 입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금태평이 그의 뒤를 바쁘게 쫓았다.
“정지! 여기는 만복상단입니다. 들어가시고 싶으시거든, 소속과 방문목적을 밝혀주십시오.”
“자하무관의 관주, 백서휘라고 한다. 금 대방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이리 찾아 왔으니 속히 안에 전갈을 넣어라.”
백서휘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갈 줄 몰랐던 금태평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잡상인은 만복상단에 출입할…… 태평 도련님? 설마, 조금 전에 이자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정문을 지키는 위사 중 하나가 금태평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금태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 도련님도 아시겠지만, 대방께서는 상단을 운영하느라 바쁩니다. 이런 자들을 일일이 만나줄 수가 없어요.”
“만나주는 게 좋을 건데?”
백서휘는 검을 검집에서 한 치 정도 뽑아서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뽑힌 날에 완숙한 형태의 검기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감겼다.
“저, 절정 고수!”
위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난리 치면 그때 이놈한테 맞았다고 항의하러 왔던 부모보다 더 심해질 거야. 그런 꼴 벌어지는 거 보기 싫으면 내가 왔다는 소식을 어서 전하는 게 좋을 거야.”
“……해를 끼치러 온 자를 어찌 믿고 안으로 들이겠습니까.”
“여기서 몇 년이나 일했지?”
“10년 일했소.”
“대방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듣지 않은 나조차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대방의 성격에 대해 아는데 그쪽은…….”
백서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소, 안에 당신이 왔다는 말을 전하겠소. 대신 약속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이만 가주시오.”
“그러지.”
위사 중 더 젊어 보이는 쪽이 안에 소식을 전하러 갔다.
백서휘는 기감을 넓혀 안쪽의 움직임을 살폈다.
‘움직이는군.’
내공을 가진 자들이 제일 커다란 전각 앞에 집결했다.
자신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백서휘는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온다.’
소식을 전하러 갔던 위사가 정문으로 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백서휘와 금태평은 위사를 따라 금태풍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사들이 빼곡하게 서 있는 곳에서 위사가 안내를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대방께서 나오실 겁니다.”
위사가 다시 정문으로 떠나자마자 모여 있는 무사들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밑에 사람들에게 꽤나 사랑받는 자인가 보군.’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무사들이 감당하기 힘든 살기를 역으로 내뿜었다.
“크윽!”
“크읍!”
경지가 낮은 이들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쯤 해두시고 저를 찾아온 이유나 말해주시죠.”
그때 안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와 백서휘는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금태평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금태풍인가 보군.’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상필벌이란 말을 모르는 것 같아서 가르쳐주러 왔다.”
대뜸 반말하자 모여 있는 무사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허리춤으로 손을 자꾸 가져가는 자가 있었고, 그걸 넘어 검에 손을 댄 자도 있었다.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태평이에게 벌을 줬지? 잘못한 건 그 자식인 걸 알 텐데?”
“팔이 부러진 아이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괴롭힘당한 걸 알면서 태평이에게 벌을 줬다고? 태평이의 아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 안 했나 보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괴롭히는 놈을 징치하려면 다시는 엉겨 붙을 생각도 하지 못하게 밟아줬어야 했어요.”
“더 밟아줬어야 한다는 건 나도 인정해. 그런데 그거랑 무관을 보내지 않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어리숙하게 굴면 가장 좋아하는 걸 잃을 수 있다는 걸 배우게 하려고 무관을 출입 못 하게 했습니다.”
“충분히 배운 것 같은데?”
“배웠다고 하더라도 다시 무관에 다닐 일은 없을 겁니다. 배워야 할 게 아직 남았으니까요.”
“배워야 할 것?”
“태평이는 반쪽짜리지만 금가의 피를 이은 몸. 이제부터는 상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태평이의 미래를 왜 당신이 결정하지?”
“제가 괜히 비싼 돈을 주고 비싼 음식을 먹이고 비싼 옷을 줬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투자의 일환입니다. 받았으면 갚는 건 당연하고요.”
“그걸 꼭 상인이 되어야만 갚을 수 있는 건가?”
“상단에는 믿음직한 사람이 부족하죠. 저는 그 믿음직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겁니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는 갚을 수 없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금태풍은 단호하게 말했다.
“보여주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백서휘는 장사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염천(炎天), 창천(蒼天), 변천(變天), 균천(均天), 현천(玄天)!’
느려진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백서휘 하나뿐이었다.
그는 무사들로 이루어진 인의 장벽을 한순간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나타나 금태풍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금괴를 탑처럼 쌓아도 이 검 한 자루에 무너질 수 있다. 믿음직한 상인만큼이나 믿음직한 무인도 필요해.”
“부, 분명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내가 살의를 가졌다면 넌 죽었어. 인정하나?”
금태풍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칼도 이 정도다. 나 정도 되는 보이지 않는 칼이 당신을 노린다면 그땐 막을 수 있겠나?”
“호위무사들이 있으니…….”
“바로 조금 전에도 봤을 텐데? 고수 앞에서는 하수들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어. 여기 있는 자 중에 내 움직임을 감지한 사람이 있긴 한가?”
무사들이 침묵하자 금태풍은 조금 전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교훈은 이 정도 주면 된 것 같군.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백서휘는 가까이 붙었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서는 장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