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화
장사로 돌아온 백서휘는 천환역형공으로 얼굴을 바꾼 채 금돈루로 갔다.
‘뭐지?’
주루에는 손님과 손님 역할을 하던 적상현의 부하들은 한 명도 없었고, 탁자와 의자는 모두 부서져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케 했다.
‘내가 악록산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나 보네. 역용만 해서는 될 게 아닌 것 같다.’
은형잠종술을 써서 몸을 숨긴 후 노인이 항상 안내해줬던 창고로 향했다.
‘여기도 엉망이네.’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할 융단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도박장 출입문은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더 들어가 보자.’
백서휘는 갈림길들을 지나쳐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 안에는 적상현의 부하들이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도대체 누가 쳐들어온 거지?’
절정 초입의 검사가 두목이고, 최근 몇 년 사이 급성장한 방파가 뒷배로 있는 조직을 감당 가능한 곳이 이 근방에는 몇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곳 중에서 적상현 조직에게 원한을 가진 쪽은?
‘하오문 뿐이 없는데?’
만약 하오문이 범인이 맞는다면, 자신이 홍선을 고용했을 때부터 하오문 쪽에서는 적상현을 예의주시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계속 지켜보다가 실제로 신변에 이상이 있는 듯 보이니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한 것일 터였다.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군.’
그때 후두부를 가격당한 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새끼들이!”
“너희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이러는 거야?”
“병신 같은 놈들이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
백서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만났던 그 기도.’
이번에 하오문 호남성 지부의 부지부장이 된 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역시 하오문에서 쳐들어온 거였어.’
쾅!
부서진 문짝과 함께 적상현의 부하가 날아왔다.
백서휘는 슬쩍 옆으로 피하며 부지부장이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했다.
“죽어!”
부지부장은 박도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초식이랄 게 없는 아주 단순한 수였다.
그런데도 적상현의 부하들은 그 공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구경은 이쯤하고 금고나 털러 가자.’
백서휘가 적상현의 부하와 하오문도들을 은밀히 지나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금고는 집무실에 있겠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적상현이 내뱉은 말인 만큼 진짜 집무실에 금고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집무실은 어디에 있으……. 저기군.’
집무실로 추측되는 곳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뭐야.’
아무도 없어야 할 집무실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이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금고가 여기 있는 거 맞아?”
“맞다니까.”
“아, 그럼 빨리 좀 찾아봐! 시간 없어! 좀 있으면 하오문 놈들이 여기로 올 거라고!”
“아, 조용히 좀 해봐. 집중이 안 되잖아.”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객이 있었군.’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눠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백서휘는 먼저 온 두 놈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여기가 맞는 것……. 크르륵!”
“뭐, 뭐야……. 컥!”
둘을 동시에 죽인 백서휘는 시체를 한쪽에 치우고 생각에 잠겼다.
‘금고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일단 죽은 놈들이 찾던 책장은 아닌 것 같고.’
후대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암중단체의 금고를 수도 없이 털었다.
그 덕분에 딱 보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금고를 열어야 하는지 견적이 나왔다.
‘바닥도 아니고 책상도 아니고……. 이건가?’
벽에 걸려 있는 박제된 호랑이 머리가 의심스러웠다.
생각한 즉시 가까이 가 머리를 만져보고 눈동자도 눌러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엄니를 당기자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며 벽이 사라지고 금고가 나타났다.
‘좋았어.’
금고에 가까이 붙어서 귀로 눈금판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드르륵!
따알깍!
‘이거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미세하게 숫자를 맞춰나갔다.
따알깍! 따알깍! 쾅!
숫자 세 개를 맞추자 금고의 문이 활짝 열렸다.
“뭐야, 왜 이것밖에 없어.”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대했던 것만큼 엄청 많지도 않았다.
백서휘는 살짝 실망한 얼굴로 은원보와 은자, 장부를 챙겨 떠났다.
* * *
홍륜은 홍선이 그랬던 것처럼 짐이 잔뜩 든 수레를 끌고 자하무관을 찾아 왔다.
“수레는 나한테 맡기고 무관을 둘러보는 게 어떻겠나?”
“그러겠소.”
홍선이 그랬던 것처럼 홍륜도 무관을 둘러봤다.
“증축할 수 있는가? 가능성이 없다면 단호하게 없다고 말해줬으면 좋겠군.”
“증축할 수 있소. 대신 비싼 자재를 써야 하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튼튼하게 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 말고 바라는 게 더 있소? 이런 시설이 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무관을 최대한 넓게 만들고는 싶은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최대한 넓게 짓길 원한다면 무관 뒤쪽에 있는 집을 철거하는 게 나을 거요.”
“집을 부순다면 얼마나 커지는 거지?”
“집을 부수고 마당까지 써서 건물을 넓힌다면 지금보다 못해도 두 배 이상은 커지게 되오.”
제갈세가와의 거래를 통해 얻은 돈만으로도 증축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도박장에서 얻은 돈으로는 백은하 가족에게 집을 선물하는 게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군.”
“설계에 반영했으면 하는 건 그것뿐이오?”
“일단은 그런데…….”
“공사가 진행되면 수정하기 힘들어지니 지금 확실하게 정해야 하오.”
“생각을 조금 더 해도 되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시오. 급하게 지었다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가득 나올 테니…….”
홍륜은 아들인 홍선이 머무는 숙소로 갔다.
백서휘는 집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백은하를 찾았다.
백은하는 누워서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보고 있었다.
“어? 왔어?”
“그냥 누워 있어.”
“아냐, 이제 이 정도는 그냥 할 수 있어.”
그래도 무인이라고 상처 회복이 평범한 자들보다 빨랐다.
백서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백은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누나 이사할래?”
“이사?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백서휘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백은하에게 설명해줬다.
“음…….”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돼.”
“싫지는 않아. 싫지는 않은데…….”
“않은데?”
“꼭 더 좋은 집으로 안 가도 되는데 네가 무리하는 것 같아서.”
“무리 아니야. 여유 있어.”
“진짜?”
“응.”
“그러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도록 할게.”
“좋아, 오늘부터 집을…….”
“매형한테는 말 안 하고?”
“아, 그렇지. 매형한테도 말해야지. 매형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정하진은 학관 수업을 끝마치고 정수련과 함께 돌아왔다.
백서휘는 그에게 철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고 집을 옮겨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럼 집은 언제부터 알아보려고 하는 건가?”
“바로 내일부터 거간꾼과 함께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신 겁니까?”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게 미안해서 그렇다네. 따지고 보면 우리 부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자네도 자네 나름대로 바쁠 터인데…….”
“지금 안 나오는 관원이 다시 나온다면 모를까. 지금은 바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 마음이 쓰이신다면 학관을 마친 이후에 저랑 함께 다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되겠나?”
“됩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자네를 따라다니도록 하겠네.”
“모든 매물을 보면 매형이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가 거간꾼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본 매물 중에 괜찮은 것들만 내게 보여주게.”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백서휘는 바로 다음 날부터 하오문에서 추천한 거간꾼과 함께 장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화북지방에서 온 자가 만든 집이라 사합원(四合院)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집을 만든 자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을 하고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하자는 없을 겁니다.”
사합원은 네(四) 채의 건물이 모여서(合) 가운데 마당(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ㅁ’자형 집이었다.
“한 번 돌아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마당인 원자(院子)를 중심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꼼꼼히 살펴봤다.
손님을 맞는 정방(正房)이나 백은하와 정하진이 머물고 쓰게 될 좌우 이방(耳房), 정수련이 머물게 될 서상방(西廂房) 모두 하자가 없었다.
‘도좌방이랑 변소도 이상이 없으니 이 집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게 낫겠다.’
백서휘가 밖으로 나오니 거간꾼이 자그마한 붓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뭔가 싶어 슬쩍 보니 이 집을 파는 데 성공했을 때 받을 보수를 계산 중이었다.
“혹시 나 말고 이 집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나?”
“아이고! 깜짝이야! 그, 그게 귀빈을 제외하면 세 분 정도 됩니다.”
“세 분이면 세 분이지. 세 분 정도는 또 뭐지?”
“하, 한 분은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안 들어 하는지 그게 좀 애매해서 세 분 정도로 표현했습니다.”
“좋아, 계약금 걸지.”
“이 집의 계약금은 은자로……. 120냥 되겠습니다.”
백서휘는 돈주머니에서 은원보 2개와 은자 20개를 꺼내 거간꾼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다른 집은 더는 안 보시는 겁니까?”
“오늘은.”
“그럼 내일은 다른 집들을 이 정도 급이 되는 거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주면야 나는 고맙지. 아! 혹시 이따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쯤에 와서 구경해도 되나? 이 집에 들어와서 살 사람이라 구경을 미리 좀 시켜줘야 할 것 같은데…….”
“열쇠를 드리는 건 힘들 것 같고 유시에 제가 이리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유시에 여기서 보도록 하자고. 늦으면 그땐……. 알지?”
“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부터 와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그럴 필요까진 없고 유시 말에만 제대로 와.”
“네!”
백서휘는 무관의 실내 수련장에서 참선하며 정하진과 정수련을 기다렸다.
‘유시 초엔 오겠지.’
바랐던 것처럼 정하진과 정수련은 유시 초에 집에 도착했다.
“집은 다 보고 왔는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계약금도 걸었습니다.”
“뭐? 계약금을?”
방 안에 있는 백은하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계약금 걸었어.”
“얼마나 걸은 겐가?”
“은원보로 1개 걸었습니다.”
실제로 준 것보다 더 적은 금액을 말했는데도 백은하와 정하진은 놀라워했다.
“뭐?! 미쳤어? 계약 안 하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큰돈을 걸어?”
“경쟁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도대체 어떤 집이길래…….”
“일단 매형 모시고 갔다 올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게.”
정하진은 학창의를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다음 화구(畫具)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건 왜 챙기신 겁니까?”
“……에게 보여주려면.”
정하진은 개미가 기어가는 것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 그냥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네.”
“아, 네.”
백서휘와 정하진은 미리 봐두었던 사합원으로 향했다.
거간꾼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합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그 처남이 봐뒀다던 그 사합원인가?”
“그렇습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 중간에서 다리를 놔줄 거간꾼입니다.”
“아, 그렇구먼.”
정하진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더니 갑자기 종이를 꺼내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분이 여기 사신다는 그분……?”
거간꾼의 말에 백서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왜 그리는 거지? 누군가에게 보여……. 아! 누나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구나.’
백은하가 거동이 불편해 오지 못하니 그림을 그려서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사랑꾼이네. 사랑꾼이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좋은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제가 열겠습니다.”
거간꾼이 열쇠로 대문을 열자 정하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계약금을 건 집이 마음에 든 것이리라.
“괜찮지 않습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니네. 너무 좋아.”
항상 점잖은 양반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보면 이 집이 굉장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거간꾼 말로는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을 하고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하자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구먼.”
“그럼 이 집으로 계약을 하겠습니다?”
“그러게.”
백서휘는 다음 날 집을 내놓은 이와 만나 은원보 25개를 주고 사합원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