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4화
다음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 홍선이 수레를 끌고 무관을 찾아왔다.
수레에는 피난이라도 가는 것처럼 짐이 잔뜩 실려 있었다.
“연장이 원래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연장보다는 제가 쓸 짐이 많습니다. 무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으면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
“수레는 어디에 세워두면 될까요?”
“무관 건물과 대문 사이에 커다란 마당이 있다. 거기에 두면 누가 가져가지는 않을 거다. 아니, 내가 그냥 옮겨주지.”
“안 그러셔도 됩니…….”
백서휘는 홍선이 낑낑거리며 끌고 온 수레를 가볍게 들어서는 마당 안에 옮겨놨다.
“대, 대단하십니다.”
“수련하는 무공이 숙련되면 홍 목장도 가능할 날이 올 거다.”
“진짜 그런 날이 올까요?”
“와.”
다 늦은 나이에도 재능이 있다면 무공을 대성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홍선에겐 ‘무재(武才)’가 없었다.
‘걱정되네.’
잔살검 적상현은 검기를 완숙하게 뽑아내는 경지에 오른 고수.
그에 반해 홍선은 금태평보다 훨씬 더 무재가 없었다.
‘적상현의 내공을 금제하면 어느 정도 할 만하지 않을까? 정 힘들 것 같으면 사지 근맥도 다 잘라버리면 될 것 같은데…….’
자신이야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경지를 진작에 초월해 사지 근맥이 잘려도 괜찮지만, 적상현은 아니었다.
‘일단 복수 방식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준비를 한다면서 시간을 벌자. 그러면 방법이 좀 나오겠지.’
어떻게 할지 빠르게 결정을 내린 백서휘는 홍선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증축과 수리를 해야 한다는 무관입니까?”
“그래, 그 무관 맞다.”
“증축이 가능한지 확인해봐야 돼서 그러는데 무관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홍선은 무관의 골조를 꼼꼼히 살폈다.
그는 괜히 전문가가 아닌 듯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수리는 괜찮지만, 증축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대목장이 와도?”
“아버지라면 가능할 겁니다.”
홍륜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게 홍선의 말에서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요? 수리만이라도 할까요?”
“하는 쪽이 낫겠지.”
“지금처럼 무너질지도 모르는 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확실히 수리하는 쪽이 낫습니다.”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백서휘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 무관을 만든 목장이 싸구려 자재를 쓰는 바람에 건물 뼈대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해서 지금 수리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그러면 일단 수리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군.”
“그러죠. 그런데 ‘판’은 언제부터 짜실 겁니까?”
“원하는 복수 방식을 말해주면 그걸 바탕으로 내가 판을 짤 거다.”
“원하는 복수 방식……?”
시원하게 바로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면 홍선은 계획까지 짜놓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막연하게 적상현을 죽이고만 싶었나 보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기에 백서휘는 안타까운 눈으로 홍선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적상현을 어떻게 죽여야겠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여한이 안 남도록 최대한 통쾌하게 복수하려면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홍선의 목소리에 잔잔한 노기가 섞여 있었다.
말하는 내용에서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바로 느낌이 왔다.
그는 계획도 없이 복수하려고 했던 미련스러운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알았다. 고민해보고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지 결정했다면 바로 연락해. 네가 회복하는 동안 나는 잔살검에 관해 조사해보도록 하지.”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무관 수리를 어떤 식으로 할지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 * *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달을 가렸다.
사람들은 희미한 별빛과 처마에 걸어둔 등에 의지해 거리를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우렛소리가 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근처 건물로 빠르게 몸을 피신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중년 남자가 우산을 쓰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처마에 걸린 등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 중년 남자를 비췄다.
중년 남자는 너무 낡아서 삭아버린 마의를 입고 있었다.
그가 잘 걸어오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어디에 있다고 했는데…….’
천환역형공(天幻易形功)을 써서 생김새를 중년 남자로 바꾼 백서휘가 거리를 훑어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 저기 있군.’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건물.
간판에 대충 적어놓은 ‘금돈루(金豚樓)’라는 글자.
자신이 계속 찾고 있던 그곳이 맞았다.
백서휘는 우산을 접고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영 기분이 나빴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백서휘가 아니라 도박 중독자 ‘왕오’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여기는지 손님들의 시선은 빠르게 사라졌다.
백서휘는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장의 꿈은 무엇이오.”
백서휘는 성대를 조절해 얇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중원 제일의 미녀와 백년해로하는 게 꿈이오. 그러는 당신의 꿈은 무엇이오.”
“일확만금을 노리는 게 내 꿈이라오.”
“그 꿈 내가 보여줄 수 있는데, 보시겠소?”
“보여주시오.”
노인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백서휘는 그 뒤를 따랐다.
주방을 지나쳐 더 깊숙이 들어가니 작은 창고가 하나 나왔다.
“저 안에 들어가서 바닥에 깔린 융단을 걷으면 문이 있을 거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즐기면 되는 거요?”
“끝까지 듣게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두 번째 갈림길에서 역시 왼쪽, 마지막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되네.”
“꽤 복잡하구려.”
“설명이 더 필요하다면…….”
“아니오. 충분히 설명이 됐소. 내가 알아서 가리다.”
“됐다고 하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창고 안으로 들어와 융단을 걷으니 자그마한 문이 바닥에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잠입이라 그런가? 떨리는군.’
중원을 지킬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대부분의 일은 스스로 처리했다.
암중단체의 꼬리를 잡는 것만 해도 그랬다.
스승은 늙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나서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음굴의 창부에서부터 황궁에 있는 내시까지.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역용했고 연기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이 어렵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오문의 정보가 맞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바닥에 설치된 문을 여니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밑으로 내려가서 어두침침한 길을 쭉 따라 들어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백서휘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노인이 말했던 대로 갔다.
마지막 갈림길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통로 끝에 있는 철문을 보게 됐다.
‘저기가 도박장인가 보군.’
백서휘는 철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도박장 내부는 어두침침했던 길과 다르게 되게 밝았다.
‘장사 사람들이 다 여기 모여 있나.’
잠입하면서 여러 도박장을 갔던 백서휘가 놀랄 정도로 도박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니 하오문이 열 받지.’
하오문에 상납도 안 하면서 도박장으로 돈을 갈퀴로 쓸어가고 있으니 싫어할 만했다.
‘적상현을 찾아보자.’
도박하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손등에 불 모양 문신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손등에 분명 문신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 자신이 들어온 철문과 반대편에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저거 안 열리는 문 아니었어?”
“진상 손님이나 다른 조직에서 쳐들어오면 가끔 열리더라고.”
“지금은 둘 다 없잖아?”
“그러게. 왜 열린 거지?”
문이 완전히 열리자 적색 옷을 입은 사내 하나와 흑색 옷을 입은 사내 다섯이 도박장 안으로 들어왔다.
백서휘는 빠르게 사내들의 태양혈을 살펴 실력을 확인했다.
적색 옷을 입은 사내 빼고는 다 실력이 고만고만했다.
‘저놈 손등을 확인해봐야겠어.’
적색 옷 사내의 손등이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슬쩍 보니 적색 옷 사내의 손등에 이글거리는 불 모양 문신이 있었다.
‘그냥 불이 아니라 성화(聖火) 모양 문신이잖아?’
마교를 지배하는 십대마가(十大魔家)의 사람들만이 몸에 성화 모양의 문신을 할 수 있었다.
성화 모양 문신은 마교 사람들에게 십대마가의 일원이란 걸 알려주는 신분증 역할을 했다.
‘성화 모양 문신을 하고 붉은색 옷을 입었다는 건 적가(赤家)의 일원이란 소리인데…….’
자신처럼 마교의 일원들과 싸운 게 아니면 알기 힘든 정보였다.
‘이래서 직접 확인을 해봐야 한다니까.’
직접 확인을 안 했으면 적가의 생존자가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는 것도 모를 뻔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십대마가 중 절반이 자신의 손에 멸문했다.
그 멸문한 가문 중에는 적가가 존재했다.
‘설마 방계인가? 완전 방계까진 귀찮아서 추살하지 않긴 했는데…….’
십대마가는 직계에 재력, 권력, 무력이 집중되어 있어 방계는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다른 암중단체를 쫓느라 바빠서 일부러 살려뒀는데, 그 눈덩이가 굴러가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진 듯했다.
‘그냥 지금 죽일까?’
백서휘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아니다. 일단은 내버려 두자. 겨우 조무래기 잡는 일로 홍선의 심기를 건드려서 대사를 그르칠 순 없어.’
지금은 무너질지도 모르는 무관을 수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거기다 무관 증축을 하기 위해서는 홍선의 도움이 필요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홍선이 필사적으로 설득한다면 홍륜도 팔 걷어붙이고 무관 증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넌 홍선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만 살려둔다.’
백서휘는 간간이 도박판에 참여하면서 적상현을 은밀히 관찰했다.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무관으로 돌아오니 홍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했다면 어떤 식으로 판을 짜길 원하는지 말해줬으면 좋겠군.”
“그놈의 사지 근맥을 다 자르고 내공도 금제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금제는 어떤 식으로?”
“단전을 깨부숴주십시오.”
홍선의 말과 표정, 몸짓에서 아내가 죽었을 때 느꼈던 그의 분노와 무력감을 읽을 수 있었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결행에 들어가기 전에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
“어떤 부분이죠?”
“장사에서는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디서?”
“악록산에서 하려고 하는데, 괜찮나?”
“아! 그쪽이 오히려 저는 좋습니다.”
“그러면 사흘 후 축시(丑時, 새벽 1시∼3시)에 악록산에서 보지.”
홍선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인사를 하고 무관을 나섰다.
* * *
결행일까지 하루를 앞뒀을 시점, 백서휘는 악록산을 돌아다니며 복수가 이루어질 장소를 물색했다.
‘인가와 거리가 떨어져 있고, 변수가 생기지 않을 만한 곳이면서 홍선이 마음 편하게 적상현을 죽일 수 있는 곳이……. 여기가 좋겠군.’
꼭대기와 가까운 탓에 사람이 잘 오가지도 않고, 말 그대로 공터라 주변 환경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제 내려가 볼까.’
응룡비천신법을 전력으로 펼쳐 악록산 밑으로 내려갔다.
거의 다 내려와 산의 초입 부분을 지나는데 홍륜이 백서휘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