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화
악록산 인근의 작은 마을.
그곳에 조금 이질적인 존재가 두 명 살았다.
한 사람은 홍륜이라는 이름의 대목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홍선이라는 이름의 목장이었다.
둘은 가족이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인 홍륜은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아들인 홍선은 웬만해선 산에서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집에 거하는 날이 두 번 있었으니, 바로 두 사람의 처를 제사 지내는 날이었다.
오늘은 홍륜의 며느리이자 홍선에겐 아내가 되는 ‘석 부인’의 제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홍륜과 홍선은 제사를 끝내고 상에 올린 음식을 억지로 먹었다.
그때 누군가가 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홍선이 후다닥 뛰어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손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훑어봤다.
‘검?’
허리춤에 달린 검은 손님이 무인이란 걸 알려주었다.
“장사에서 작은 무관을 운영하는 백서휘라고 한다.”
홍선은 잠깐 불쾌한 표정을 보였다가 빠르게 지웠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홍 대목장께 무관의 수리 및 증축을 맡기려고 왔다.”
“죄송하지만 가친(家親)께서는 더는 의뢰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의뢰를 수락하면 통상 의뢰비의 두 배를 주겠다.”
“의뢰비용이 아쉬워서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만 가주셨으면 합니다.”
말에 노기(怒氣)가 섞인 걸 보면 홍손은 아직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했다.
백서휘는 슬쩍 어깨너머로 홍륜을 봤다.
홍륜은 홍선과 다르게 이쪽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제삿밥을 먹고 있었다.
‘이쪽과 다르게 저쪽은 아예 가슴이 썩어 문드러져서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었구나. 아들인 홍선 쪽을 공략하는 게 맞겠다.’
백서휘는 눈앞에 있는 홍선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목장께서 안 된다면 당신이어도 좋다.”
“죄송합니다. 저도 사정이 있어서 의뢰를 받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복수 때문인가? 원한다면 그 복수를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 이걸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 손으로 잔살검 적상현을 직접 처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백서휘의 달콤한 제안에 홍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홍선이 덥썩 미끼를 물었다.
백서휘는 이제 낚싯대를 힘차게 들어올려야 할 때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방법을 여기서 말하는 건 조금 곤란할 것 같군.”
백서휘는 홍륜을 잠깐 봤다가 홍선을 마주 보는 식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홍선이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백서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왔다.
“어떻게 적상현을 죽이는 게 가능한 겁니까?”
“방법은 많다. 구오중의 식사에 산공독을 타 내공이 흩어지게 한 후 기습해도 되고, 내공을 금제시킨채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여 죽이는 것 역시 가능해.”
“지, 진짜로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
“잠시 생각 좀 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홍선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제는 잡은 고기나 마찬가지다.’
홍선이 거의 다 넘어왔다고 여기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하오문의 정보에 의하면 홍선이 산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 건 ‘복수’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도 그의 원한을 돌보지 않으니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다 늦은 나이에 매일매일 삼류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아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있으니 넘어올 거야.’
백서휘는 다 잡은 물고기를 보듯 홍선을 바라봤다.
“……질문 아니,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말만 번지르르 한 것 같아서 그쪽이 하는 말을 믿기가 힘듭니다. 제가 그쪽 말을 믿게 할 최소한의 증거를 좀 보여주십시오.”
백서휘는 허리춤에서 빠르게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절정고수의 상징인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보여줬다.
홍선은 그 나름대로 수련을 했기에 검기를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았다.
“와, 완숙한 형태의 검기!”
“이 정도면 충분한가?”
“추, 충분합니다만……. 아직도 어떻게 ‘판’이란 걸 짜준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놈이 내공을 금제한 채로 싸울 것 같지는 않거든요.”
“목장의 집에서 말했다시피 방법은 많다. 산공독을 쓸 수도 있고, 점혈해 진기의 흐름을 끊어서 내공을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어. 더 독하게 가면 단전을 깨부수는 것도 가능하고. 그리고 이 부분은 내가 고민할 부분이니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홍선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 무언가 결심을 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 제안에 응하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무관의 증축과 수리를 부탁하고 싶군.”
“무관의 위치를 알려주시면 연장이랑 짐들을 챙겨서 내일 그쪽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하무관의 위치는 장사에 있는 아무 거지한테나 안내해달라고 하면 안내해줄 거다.”
“거지요?”
“그래.”
홍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서휘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장사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일찍 일을 마친 덕분에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
호남성 분타가 있는 다리까지는 천천히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기왕 천천히 가는 거 거지들이 홍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한번 확인해봐야겠어.’
이상했다.
매번 구걸하는 곳에 거지들이 하나도 없었다.
‘다 죽인다고 협박해서 도망이라도 간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분타에 도착하니 장사에 있는 모든 거지란 거지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하무관을 부흥시키는 법’이란 주제를 두고 싸우는 중이었다.
‘한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볼까?’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친 상태로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거지들을 지켜보는 나겁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지근거리에 자신이 있는데도 나겁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거는 명문 정파로서 해서는 안 될 짓 같은데?”
“자하무관도 그 명문정파인 ‘화산파’의 속가제자가 차린 무관이에요.”
일결개가 화산파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도 같은 정파 사람끼리 다투는 건…….”
“그럼 이 방법 말고 뭐가 있는데요?”
“찾아보면 있겠지.”
“반박을 못 하겠으면 손을 들지 말라니까요.”
“아니, 근데 이게 갓 일결개가 된 놈이 감히 이결개한테….”
서로 싸우려고 하자 급하게 중앙으로 와 일결개와 이결개 사이를 중재했다.
“둘 다 앉아.”
분타주이자 왕초로서의 권한은 절대적이기에 두 사람 모두 나걸개의 말을 들었다.
“다들 힘든 것 같으니 난상토론은 이쯤에서 마치겠다. 다들 오늘 구걸도 못 하고 수고가 많았다. 오늘 내린 결론과 있었던 일들을 그 ‘개자식’한테 말해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해볼 테니 불만이 있어도 조금 참아주길 바란다.”
“그 개자식이 나를 말하는 건가?”
백서휘가 은형잠종술을 풀며 말했다.
“히이이익!”
나겁개가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발작을 했다.
다른 거지들도 백서휘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있었기에 몸을 벌벌 떨었다.
“놀라는 거 보니까 나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닌가?”
“그, 그, 그, 그게……. 아, 아,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라……. 부, 부,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괜찮다. 나라님도 그 자리에 없으면 욕하니까. 충분히 이해해.”
“그렇죠. 하하하하! 다행입니다.”
“근데 나는 이 자리에 있었잖아.”
계속 웃으며 말하던 백서휘가 정색하자 나겁개가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는 저만 지은 것이니 다른 거지들 말고 저만 징치해주십시오.”
나겁개는 그래도 한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라고 밑에 있는 자들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지.”
“감사합니다.”
“날 따라와라.”
“네.”
백서휘가 앞서서 빠르게 걸어가고 나겁개가 그 뒤를 쫓았다.
“왕초!”
“대장!”
“분타주님!”
거지들은 멀어지는 나겁개를 보며 울부짖었다.
나겁개는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다리와 한참 멀어졌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왜?”
“사실 저 말고도 백 대협을 욕한 거지가 많았는데…….”
“그래서 어쩌란 거지? 그놈들도 징치해달라는 건가?”
“그, 그게……. 아닙니다.”
“난상토론에서 나온 결론이나 말해봐. 도대체 뭐 때문에 같은 정파끼리는 다투면 안 된다는 그런 소리가 나온 거야.”
“……자하무관이 조금 더 흥하려면 장사에 태극무관과 금강무관이 없어야 하고, 크게 흥하려면 호남성에 무관이 자하무관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그게 결론이다?”
“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 모여 내린 결론이라 그런지 되게 파격적이었다.
‘생각을 해볼 만한 문제 같군.’
어느새 자하무관에 다다랐다.
“안에 잠깐 들어갔다 올 건데 도망가지 마라. 도망가면 그때는 장사에 있는 모든 거지를…….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지?”
“네.”
백서휘는 집에 들어가 가방에 있는 돈 일부를 꺼냈다.
“뭐 사러 가게?”
“아니, 거지들한테 적선 좀 하려고.”
“아, 안 그래도 거지들이 자하무관을 홍보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
“나중에 설명해줄게.”
백서휘는 백은하와 짧게 대화를 나눈 후 다시 무관 밖으로 나왔다.
“나겁개, 양손 내밀어.”
“목을 자르는 게 아니라 양손을 자르실 겁니까?”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다른 걸 하려고 하니까 빨리 손이나 내밀어.”
나겁개가 눈을 질끈 감고 양손을 밀었다.
백서휘는 그의 손에 은자 5냥을 올려주었다.
“이거로 닭이나 사 먹어.”
“예?”
“오늘 나 때문에 구걸 못 했다며.”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했기 때문일까.
나겁개는 가만히 서서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나중에 다른 거지들한테 물어볼 거니까 혼자 쓰지 마라. 그럼 난 간다. 아차차! 거지들한테 전해둬. 자하무관을 찾는 목장이 장사에 오면 안내 잘 해주라고. 그럼 난 진짜 간다.”
백서휘가 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겁개는 손에 들린 은자와 무관의 대문을 번갈아 가며 봤다.
‘저 악귀가 지금 나한테 닭 사 먹으라고 돈을 준 거야? 욕을 했는데도 목숨을 살려주고?’
지독히도 현실감 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로 돌아가려는데 왠지 모르게 현실 같았다.
나겁개는 꿈과 현실을 구별할 생각으로 볼을 아주 강하게 꼬집었다.
“아악!”
딱 현실감을 되찾아 줄 만큼 볼이 아팠다.
‘지, 진짜 현실이었구나.’
닭고기를 먹는 것도 기뻤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극도의 희열을 느끼며 나겁개는 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다른 놈들한테 물어본다고 했었지.’
푸줏간에 들러 돈이 되는 대로 다 닭고기를 샀다.
‘잔칫집에서 구걸해온 음식을 먹을 때 만큼이나 시끄럽겠네.’
나겁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 내가 왕초다!”
“이결개 된 지 한 달도 안 된 네놈이 무슨 왕초야! 분타주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너무 어이가 없어 닭고기가 든 종이봉투를 떨어뜨렸다.
그 소리를 들은 거지들이 나겁개를 쳐다봤다.
“가관이다! 가관이야!”
“어? 살아계셨어요?”
“그래! 이 새끼들아!”
“에이! 좋다 말았네.”
“좋다가 말아?”
“헤헤! 왕초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해요!”
일결개가 비듬이 왕창 내려앉은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