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화
제갈세가의 일공자, 제갈진천은 새벽부터 가문을 나서는 풍운단(風雲團)을 멀찍이서 바라봤다.
“한빙단은 언제쯤 온답니까?”
“그, 그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일공자의 가장 충직한 수하, 우보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대답해주십시오.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면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임무에 나섰던 저희 쪽 무사들은 이공자 쪽 무사들에게 모두 죽었고, 한빙단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의창까지 표국이랑 같이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들도 한빙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답니까?”
“죄송합니다. 그쪽에는 연락할 수가 없습니다.”
우보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왜죠?”
“최대한 은밀하게 작전을 진행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 장궤 하나를 매수해서 한빙단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그럼 그들은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었다는 겁니까?”
우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하나 살자고 몇 명을…….”
제갈진천이 눈을 감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한빙단은 이공자 쪽에 있을 확률이 높겠군요. 아니, 잠깐! 한빙단을 가지고 있는데 왜 거래를 하러 오지 않는 거죠? 설마 습격엔 성공해놓고 탈취하는 것엔 실패? 그래서 저들도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우보! 풍운단을 은밀히 쫓아가 주십시오!”
“풍운단을요?”
“저들도 한빙단의 행방을 몰라서 무사들을 동원해 찾으려는 걸 겁니다.”
“아!”
“저희 쪽 무사들을 준비해놓을 테니 저들이 한빙단을 발견하면 신호탄을 쏴주세요.”
“제가 가면 공자님은…….”
“이곳에서는 흐읍!”
속에서 양기가 치밀어오르자 제갈진천이 비틀거렸다.
우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공자님!”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니 어서 저들을…….”
“알겠습니다.”
우보는 이공자의 최강 전력인 풍운단을 은밀히 뒤쫓았다.
* * *
한빙단의 가치에 걸맞은 돈을 가져오라고 통보한 지 사흘이 흘렀다.
백서휘는 야숙한 흔적을 깨끗하게 없애고 공터로 향했다.
‘뭐 하는지 한 번 볼까.’
자신을 중심축으로 삼고 그 후에 기감을 원 모양으로 차근차근 넓혀갔다.
그렇게 최대 한계까지 늘리니 공터에 있는 자들의 움직임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을 갖고 온 게 아니라 검을 가지고 왔군.’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무사가 공터에 있었다.
기세가 흉흉한 걸 보면 아주 작정하고 온 게 분명했다.
‘한번 해보자는 것 건가?’
그렇게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도리였다.
백서휘는 기척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며 공터로 들어갔다.
감지하지 못했던 기척이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자 풍운단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풍운단주는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는 그들을 속으로 욕하며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한빙단의 소유자다. 돈은 충분히 가져 왔나?”
“본래 주인이 가져야 할 물건을 가지는데 돈을 내야 하나?”
“본래 주인은 다른 사람이란 걸 뻔히 아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이공자는 거짓말쟁이를 수하로 둔 건가?”
“이공자님은 네깟 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분이 아니다.”
“입에도 못 올릴 만큼 훌륭하신 분이 왜 물건값을 안 치르고 강도들을 동원하셨는지 모르겠군.”
백서휘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네놈! 가만두지 않겠다!”
풍운단주와 풍운단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돌격!”
풍운단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시차를 두고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초식이랄 것도 없는 움직임이지만 단체로 펼치니 꽤 대단한 공격이 됐다.
‘나보다 훨씬 하수한테나 통하는 수법이지만…….’
백서휘는 석상처럼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풍운단의 무사들은 그가 겁을 먹어 몸이 굳었다고 생각했다.
“이겼……. 뭐야!”
사방팔방에서 날아 들어온 무기는 백서휘의 잔상을 때렸다.
“이, 이형환위(移形換位)!”
어느새 풍운단의 뒤에 나타난 백서휘는 검기가 담긴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등을 보인 풍운단의 무사들은 단 일 합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죽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갈세가의 정예 중의 정예들이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더 보수적으로 생각했어야 했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단 얘기를 듣고 백서휘의 경지를 절정 무사 수준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보다 더 뛰어나 보였다.
전투에 돌입한 지 30초가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 풍운단주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풍운진(風雲陣)을 펼쳐라!”
풍운단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림의 나한진에 비견된다는 그 풍운진인가?’
제갈세가의 네 진은 하나하나가 소림의 나한진이나 무당의 태극검진에 비견되고, 네 진을 모두 합하면 명문거파의 어떤 진을 들이밀어도 압도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스승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직접 진을 한번 견식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해보자.’
백서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풍운단이 진을 만드는 걸 기다려줬다.
그의 자비 덕분에 무사히 진을 구성한 풍운단은 바로 공격에 나섰다.
“일진청풍(一陣淸風)!”
진법의 힘으로 예기(銳氣)가 강화된 검을 찔러 들어왔다.
쐐애애애액!
바람을 찢어발기며 검이 날아들었지만 백서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며 손을 쭉 뻗어 검을 내질렀다.
백서휘의 검첨(劍尖)으로 풍욷단의 검첨을 찔러 공격을 막아냈다.
풍운단주는 우연의 우연이 겹처 검첨으로 막아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캉!
‘또 검첨으로 막아내다니!’
벌써 몇 번이나 막아낸 건지 횟수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이건 절대 운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었다.
무조건 백서휘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이게 실력이라면 풍운단은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고수는 절대 펼칠 수 없는 기예이기 때문이었다.
풍운단의 얼굴에 조금씩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속도를 늘린다!”
검날의 예기(銳氣)도 진법의 힘으로 강화하고, 찌르는 힘도 더욱 강해졌다.
공격 속도 역시 말도 안 되게 빨라져 웬만한 무인은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백서휘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오히려 신나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풍운개합(風雲開闔)으로 간다!”
요동치는 바람과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검격이 계속해서 날아왔다.
휙휙휙!
백서휘는 몸을 틀고 고개를 젖히는 것으로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풍운진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니!’
중원제일진이라고 자부하는 진이 통하지 않자 풍운단주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단주님! 우리에겐 아직 운룡풍호(雲龍風虎)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 풍운진의 오의라면 저 괴물같은 놈한테도 통할 거야. 다들 운룡풍호를 준비해라.”
풍운단은 복명복창하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한편 백서휘는 슬슬 풍운단의 공격이 지루해져 가고 있었다.
‘풍운진 하나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보네.’
체험해봐야 알겠지만 나한진 역시 수준이 비슷할 터였다.
‘중원의 무학은 암중단체를 이길 수 없다.’
진법 하나만 두고 봐도 암중단체에게 밀렸다.
만약 암중단체의 무인들이 상승의 무학까지 사용한다면?
그때는 볼 것도 없이 중원에 있는 이들이 패배하리라 생각했다.
‘네 진법이 모두 합해지면 그나마 마교의 파천진(破天陣)에 비벼 볼 만하겠지.’
중원무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오늘 여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눈요기를 해줬으니 나도 최고로 화답해줘야겠지.’
백서휘도 끝낼 마음을 먹고 검에 공력을 한껏 불어넣었다.
검신을 에워싸는 수십 개의 빗방울은 모두 강환(罡丸)이었다.
‘가라!’
백서휘는 강환 모두를 풍운단에게 쏘아 보냈다.
빗방울 모양의 강환들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저건 뭐지? 서, 설마 전설로만 전해진다는 강환? 모, 모두 피…….”
콰아아아앙-!
섬광과 함께 공터에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불규칙적으로 치솟았다.
이윽고 먼지를 품은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뒤늦게 공터로 온 우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현상에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이곳에는 풍운단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소멸해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보가 주변을 둘러보며 옹알이하듯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러다가 뒤집힌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백서휘와 눈이 마주쳤다.
“헉!”
우보는 공터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백서휘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나에게 한빙단이 있다는 거야.”
우보는 한빙단을 얻고자 융중산(隆中山)을 떠나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 정말입니까?”
“봐야 확실하게 믿겠지.”
백서휘는 품속에서 한빙단이 든 목갑을 꺼냈다.
그다음 안에 한빙단이 있다는 것까지 보여주었다.
“정말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네 주군한테 전해. 한빙단은 나한테 있으니까 살고 싶으면 돈을 가져오라고.”
“어, 얼마를, 언제까지 가져오면 될까요?”
“이틀 후까지 한빙단의 가치에 걸맞은 금액을 이곳에 가지고 오면 된다.”
“이틀 후면 너무 짧습니다.”
“기간 양보는 없어.”
“그, 그러면 그 한빙단의 가치에 맞는 금액이 얼마인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
“목숨값만큼 가져와.”
백서휘는 짧게 말을 남기고 다시 야숙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 * *
‘집 놔두고 이게 웬 고생이야.’
당장에라도 무관으로 돌아가 백은하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빙단으로 한탕하면 무관을 증축할 수 있어!’
제일 좋은 건 옛날에 자하무관이 있던 땅과 건물을 사는 것이지만 금강무관 때문에 불가능했다.
낡고 허름한 무관을 증축하고 수리하는 게 지금의 최선이었다.
‘해가 이 정도로 떨어졌으면 약속 장소로 가봐도 되겠어.’
공터에는 제갈진천과 우보, 천지단(天地團)의 단주, 천지단의 단원들이 뙤약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었다.
“공자님 먼저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보가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은혜를 입었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공자님이 여기까지 나오실 필요는…….”
“저기 옵니다.”
백서휘가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오자 천지단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우보가 일공자에게 전한 백서휘의 무위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자기 공을 부풀리기 위해 한 거짓말이겠지.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어.’
그래서 지금처럼 막 나갈 수 있었다.
“빨리 좀 오시오! 공자님이 기다리잖소!”
우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천지단주를 바라봤다.
“단주님! 제가 말씀을 드렸…….”
“제갈세가는 ‘귀빈’ 대접을 개떡같이 하는 걸 가훈으로 삼는 모양이군.”
공터의 분위기가 북풍한설(北風寒雪)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공자가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 공자님! 어찌 저런 무도한 자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주군의 뜻을 조금도 이해 못 하는 수하라……. 원한다면 내가 대신 이놈을 제거해줄 수 있는데?”
“천지단주는 고지식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똑바로 교육할 테니 이번은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제갈진천은 깍듯이 백서휘를 대함으로써 천지단주가 더는 나설 수 없게 막았다.
“좋아, 특별히 넘어가도록 하지.”
“거래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우보!”
제갈진천의 말에 우보가 커다란 가방을 하나 가져왔다.
백서휘는 가방 안에 있는 돈이 진짜인지 확인했다.
“진짜 맞군.”
“최대한 담긴 했습니다만, 제 목숨값엔 모자랍니다.”
“모자라는 걸 어떻게 메울 생각이지?”
“이걸 받아주십시오.”
제갈진천은 품속에서 신패를 하나 꺼내더니 백서휘에게 정중히 건넸다.
“이게 뭐지?”
“그 신패를 가져와 부탁하신다면 그게 어떠한 부탁이든 딱 한 번에 한해 무조건 들어주겠습니다.”
백서휘는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는 신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한빙단을 주시겠습니까.”
제갈진천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서휘는 바지 주머니에 옮겨놨던 목갑을 우보에게 던졌다.
“으그그그극! 하, 한빙단 마, 맞습니다.”
우보는 목갑을 열어 한빙단의 향을 맡더니 덜덜 떨며 말했다.
“이제 가봐도 되나?”
“네, 그러셔도 됩니다.”
“그럼 나중에……. 아니, 웬만해서는 보지 말자고.”
백서휘는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챙겨 자하무관이 있는 장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