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0화
“왜 접선 암호를 확인하지 않은 거지?”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시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생략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백서휘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점소이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고, 이리저리 돌아서 도착한 곳은 청사가 목숨을 잃었던 방이었다.
점소이가 문을 열어주자 백서휘는 고맙다고 작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낭인이랑 제갈세가에 대한 정보를 구하러 왔다.”
“낭인이랑 제갈세가요?”
“왜? 정보가 없나?”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낭인에 대한 정보는 다 있어요. 제갈세가에 대한 정보도 많고요.”
“그 낭인에 대한 정보 말인데, 특징만으로도 찾을 수 있나?”
“유명하다면요.”
“특징을 말할 테니까 알고 있는 놈이라면 정보를 줘.”
“알겠어요.”
“키가 작고 많이 늙은 놈이야. 무기는 낫인데 양손에 하나씩 들고 싸운다더군.”
“쌍겸노(雙鎌老) 금학선 같은데 그자의 정보라면 확실하게 있어요.”
“다행이군. 이제 제갈세가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는데, 혹시 제갈세가의 후계자나 가주에게 병이 있나?”
“……그건 특급 정보라 돈을 주셔야 해요.”
“둘 중 하나에게 병이 있나 보군. 됐어. 그것으로 답변은 됐다. 금학선에 대한 정보나 가져와.”
“네…….”
화란이 한쪽 다리를 쩔뚝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백서휘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더 따라오면 죽이겠다고 자신은 분명 경고를 했었다.
다리를 저는 건 그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더 따라붙으려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손속에 사정을 둔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니 그녀는 평생 자신의 자비에 감사하며 살아야 했다.
‘언제쯤 오려나.’
화란이 밀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그녀가 두루마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타났다.
백서휘는 그 두루마리를 받아 꼼꼼히 읽어나갔다.
하나는 금학선의 용모파기와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상명세서였다.
‘호북성 의창 출신의 무인으로 나이는 칠십 대 중반이다. 오 척 단신에 양손잡이고 무공의 경지는 일류에서 절정 사이로 추정된다.’
정보를 다 읽은 백서휘는 두루마리를 다시 화란에게 건넸다.
화란은 두루마리를 받아다가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꼈다.
“정보료는 저번에 약속했던 3번의 기회에서 제하는 거로 하지.”
“남은 기회는 이제 2번뿐이에요.”
“그래.”
밖으로 나온 백서휘는 형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 * *
백서휘가 낭인들의 흔적을 발견한 건 추적에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흔적을 없애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최고 수준의 추종술(追從術)을 익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진짜 군산으로 갔군.’
낭인들이 남긴 모든 흔적이 군산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백서휘는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의 계획은 낭인들이 군산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낭인들이 쓸데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바람에 시간을 더 쏟을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백서휘는 군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걷는 내내 꼼꼼히 흔적을 살폈지만, 낭인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젠장!’
입산 시점이 늦어서인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백서휘는 내공으로 안력을 키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그는 눈에 집중했던 내공을 거두고 기감에 집중했다.
흔적 말고 ‘사람 그 자체’를 찾는 데는 기감이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백서휘는 본인을 중심점에 두고 기감을 원 모양으로 조금씩 넓혀갔다.
이름이 난 고수조차 백서휘의 기감 범위를 보고 놀랄 정도가 됐을 무렵.
사람 하나가 그 원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잡혔다.
그 사람은 오 척 단신에 손에 든 두 개의 낫을 미친 듯이 휘두르고 있었다.
‘찾았……. 뭐야, 싸우고 있잖아?’
백서휘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학선이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에는 낭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저놈들은 또 뭐지?’
낭인들만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다른 무인들의 등장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역시 앉아서 머리 굴리는 놈을 믿으면 안 된다니까!”
“닥치고 검이나 휘둘러!”
“제갈가의 개들아! 날 반드시 죽이는 게 좋을 거다! 살아 돌아가면 너희들이 한 짓을 모두 폭로할 거거든!”
“미친놈아! 그런 소리를 하면……. 커헉!”
모여 있는 숫자에 비해 고수가 적었던 낭인들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에게 조금씩 밀렸다.
열세에 처하자 낭인들은 고수, 하수 가리지 않고 도망부터 가고 봤다.
“우리가 훨씬 인원이 많아! 이길 수 있어!”
나이만큼이나 경험이 많은 금학선이 사기를 끌어 올렸다.
남아 있는 낭인들이 기합 소리로 화답하며 절초를 상대에게 날렸다.
“금강파(金剛破)!”
“야월단파(夜月短破)!”
“편화칠성(偏花七星)!”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낭인들이 날린 회심의 일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그때였다.
금학선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하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그가 사라진 걸 모르는 낭인들은 이를 악물고 제갈세가의 무인과 싸웠다.
백서휘는 금학선을 쫓아야 할지, 싸움에 끼어들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음모의 윤곽은 대충 나왔어.’
백서휘는 누나의 복수를 위해 금학선을 아주 은밀하게 뒤쫓았다.
싸움이 일어난 공터에서 한참 멀어질 때까지 둘은 달리기만 했다.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금학선은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는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꺼냈다.
“욕심부렸다가 하마터면 황천에 갈 뻔했군. 흐흐!”
“갈 뻔한 게 아니라 가게 될 거다.”
“누구냐!”
“복수.”
백서휘는 나무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금학선의 마혈을 빠르게 점혈했다.
뒤를 잡힌 금학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압되어버렸다.
“……대, 대협,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은 노괴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백서휘는 그의 눈치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넌 내가 한 질문에 아는 모든 걸 대답해야 돼.”
“그, 그럼 살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대답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최,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습니다.”
“질문 전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미 알고 있는 걸 확인하는 것에 가까우니까 거짓말을 하거나, 수작질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아들었나?”
“네, 넵!”
“의뢰주는 제갈세가 맞나?”
“정확히는 제갈세가의 이공자 밑에 있는 놈들입니다.”
“확신하나?”
“낭인천 놈들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들은 정보입니다.”
“좋아, 이공자 밑에 있는 놈들이라고 치고 그들이 정확히 뭐라고 의뢰했지?”
“하늘색 무복을 입은 자들을 집중공격해서 죽이고 표물 사이에 숨겨져 있는 한빙단을 탈취해오라고 했습니다.”
“그 품에 든 게 한빙단인가?”
“그렇습니다.”
“공터에서 서로 싸운 이유는?”
“잔금을 안 주고 저희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싸운거다?”
“네.”
“사람은 왜 납치한 거지? 의뢰 내용엔 사람을 납치하란 말은 없는 것 같은데?”
“그, 그건…….”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나?”
“……암상(暗商)에 팔아서 부수입을 벌려고 그랬습니다.”
“그렇군.”
예상했던 그대로란 걸 확인한 백서휘는 혁대에 달린 주머니 중 하나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그, 그건?”
“감각을 증폭시킬 때 먹는 물약이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복용하면 이것만큼 좋은 게 없지.”
“저, 전투요?”
“입 벌려.”
“예?”
“입 벌리라고.”
금학선은 공포가 어린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백서휘는 그의 목구멍에 물약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약효가 돌 때까지 기다렸다.
“됐다.”
“뭐, 뭐가 된 건……. 히익!”
금학선은 모든 감각이 증폭되는 느낌에 기겁했다.
‘절대 편하게 죽게 하지 않는다.’
싸우던 도중에 금학선이 모르고 가슴 쪽을 찔렀다면 백은하는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랬을 경우, 자신은 생이별했다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누나를 잃는 것이고, 정하진은 인생을 함께할 아내를, 정수련은 하나밖에 없는 엄마를 잃는 거였다.
‘100배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지.’
백서휘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을 펼치기 위해 역(逆)의 성질이 담긴 진기를 금학선의 혈도와 혈맥에 주입했다.
금학선의 몸에 있는 진기의 이동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역방향으로 움직였다.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금학선이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됐다.’
약을 먹지 않은 사람은 평범한 감각을 가져 분근착골의 고통을 1로 느낀다면, 약을 먹어 감각이 예민해진 금학선은 고통을 100으로 느끼게 된다.
‘곧 끝나겠군.’
잠시 후, 금학선의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산산이 조각났으며 온몸의 기혈이 터졌다.
백서휘는 그의 품속을 뒤져 적갈색빛의 목갑을 꺼냈다.
목갑 안에는 호두알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큰 환단이 들어 있었다.
백서휘는 그 환단을 들어 조심스럽게 향을 맡아봤다.
박하향이 나는 것과 동시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수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향을 맡기만 했는데 이 정도로 음기가 강하게 느껴진다니…….’
역시 한빙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백은하에겐 절대 주면 안 되고, 그냥 먹어버리기엔 자신의 경지가 너무 높아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팔기엔 한빙단 자체가 쓰이는 경우가 한정되어 있어 일반적인 문파나 방회에서는 매입해주지 않았다.
처분하려면 암상을 가야 하는데 원래 매물이 많은 물건이 아니라 누가 팔았는지 특정이 바로 된다.
‘거기다 비싸게 사주지도 않지.’
추적을 피하는데 드는 수고와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물건이라 헐값에 한빙단이 팔릴 걸 생각하면 제갈세가와 거래하는 쪽이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할 것 같았다.
‘공터로 돌아가자.’
백서휘는 금학선의 시체를 뒤로하고 공터로 향했다.
“다들 샅샅이 뒤져봐! 분명 이놈들한테 한빙단이 있을 거다.”
“예!”
공터에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낭인들의 시체를 뒤지며 한빙단을 찾고 있었다.
백서휘는 삿갓을 푹 눌러쓰고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기척을 느낀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정체라……. 한빙단의 현재 소유자라고 해두지.”
백서휘는 품속에 목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놈! 그건 제갈세가의 물건이다!”
자기들보다 약해 보이는 건지 제갈세가의 무사는 소속을 거침없이 밝혔다.
“가지고 싶다면 사흘 후까지 돈을 가지고 이곳으로 와라. 금액이 맘에 들지 않으면 한빙단의 원래 주인에게 넘길 예정이니까 가방에 돈을 좀 많이 채워놓는 게 좋을 거야.”
백서휘는 짧게 말하고 공터에서 사라졌다.
“찾아라!”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조를 나누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