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화
쏴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백서휘는 빗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들어오게 될 관원을 어떤 식으로 가르칠지 고민했다.
‘태평이처럼 재능이 없는 사람이 관원으로 들어오면 어떡하지? 기본기만 계속 가르치면 재미없어서 금방 그만둘 것 같은데…….’
실력을 상승시키면서 배우는 재미까지 줘야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하던 중에 누군가가 무관의 대문을 두드렸다.
급한 마음이 없었던 백서휘는 우산을 쓰고 느긋하게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밖에서 다급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알아차린 백서휘가 빠르게 들려가 대문을 열었다.
밖엔 도롱이를 입은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백서휘는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도롱이를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헉헉! 여기가 백 표사님 댁 맞습니까?”
‘백’이란 성씨와 ‘표사’란 단어가 합쳐지며 백은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맞는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백 표사님이 칼에 맞아 다쳤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칼에 맞아 다쳤다고?”
“네.”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거지? 많이 심각한가? 지금 장사로 돌아오는 중인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있는지 알려줘. 내가 직접 가보겠다.”
“백 표사님께서는 지금 저희 흑웅표국(黑熊標局)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흑웅표국으로 먼저 가보겠다. 매형과 조카를 부탁한다.”
“매형? 조카?”
도롱이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백서휘는 우산을 던져버리고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흑웅표국으로 향했다.
날 듯이 달린 덕분일까.
무관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흑웅표국’이라고 적힌 깃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이군.’
백서휘는 자신을 중심점에 두고 기감을 빠르게 넓혀갔다.
그러자 근방에 있는 모든 생물체의 상태와 움직임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찾았다.’
백은하의 기운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녀가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흑웅표국과 가까워지니 정문을 지키는 표사들이 보였다.
“멈추시오!”
백서휘는 달리는 속도를 조금씩 늦추다가 문 앞에서 완전히 멈추었다.
“소속과 방문목적을 말하시오.”
“자하무관의 백서휘. 누나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어서 이렇게 찾아 왔다.”
“누나라면 정확히 누굴 말하는 것이오?”
“객원 표사로 일하고 있는 백은하.”
“백 표사에게 남편이랑 자식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남동생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소. 남동생인 거 확실하오?”
안면을 튼 적이 없어서 그런지 표사들은 자신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표사들이 슬금슬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게 보였다.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다시 만났다. 이게 거짓말 같으면 안에 있는 누나에게 물어봐.”
“거기 가만히 있으시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검을 뽑아 들 것이오.”
백서휘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끝에 있는 표사가 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표사가 돌아오지를 않았다.
참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을 때, 표국 안에 들어갔던 표사가 소리쳤다.
“동생 맞대! 문 열어!”
표사들은 검으로 가져갔던 손을 원위치로 가져갔다.
“미안하오. 이번 표행에서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습격을 받은 터라 경계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었소.”
“이번 표행이라면 의창행을 말하는 건가?”
“그렇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때 저 멀리서 마차가 흑웅표국을 향해 달려왔다.
“자세한 건 백 표사에게 들으시오.”
표사들이 다시 진형을 잡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백서휘는 그들을 뒤로하고 백은하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기감으로 이미 위치를 파악한 덕분에 헤매지 않고 바로 올 수 있었다.
문밖으로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들 다쳤나 보군.’
백서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침상 위에는 수많은 부상자가 누워 있었고, 몇 안 되는 의원들이 계속 그들을 돌봤다.
‘좌측에서 세 번째, 위에서 두 번째였지?’
백서휘는 침상에 누워 있는 백은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백은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누나.”
“서휘니?”
백은하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상처가 덧날수도 있으니까 그냥 누워 있어.”
“그래.”
“오다 들어보니까 계획적인 습격이었다는데 진짜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모르겠고 의창행 표행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음(湘陰)을 막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복면을 쓴 자들이 습격했어. 그리고 그들은 우리도 모르던 표물을 찾아서 가져갔지.”
표단에 운송출발지점, 의뢰비, 화물의 명칭, 수량 등을 적고 서로 ‘확인’한 후에 쌍방이 도장을 찍는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에 표국에선 이 과정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진행하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확인한다.
그런데 표단에 없는 표물이 나왔다?
표국 내부에 있는 자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서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눈치를 보다 물었다.
“누가 수작질을 한 거야?”
“홍 장궤(掌櫃) 같아. 소식을 듣자마자 목숨을 끊었다고 하거든.”
“같이 따라간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뭐라고 말 안 해? 그자들이 의뢰한 거잖아.”
“……그 사람들 모두 죽었어.”
“뭐?”
제갈세가가 다른 오대세가에 비해 못하다지만 평균적인 다른 무림인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강했다.
그런 자들이 죽었다는 건 습격자들이 진짜 단단히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은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그들이 습격자들을 많이 죽인 덕분에 이나마 우리가 살아올 수 있었어.”
“누굴까. 녹림도들이 그런 무력을 보여줄 리는 없고…….”
“녹림도는 확실히 아니야.”
근래에 녹림도들은 표국에 대놓고 통행료를 받았으면 받았지 웬만해서는 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어. 근데 내가 상대한 놈들은 무공이 조금 이상했어.”
“어떤 점이?”
“실력도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우습긴 한데…….”
“아니, 괜찮아. 말해봐.”
“나를 상대한 사람의 초식이 어떤 건 조잡하고 체계가 없는 반면, 어떤 건 되게 정교하고 체계가 딱딱 잡혀 있었어.”
“낭인이라서 그런 걸 거야.”
“낭인?”
표사의 일을 객원으로 잠깐씩 하는 데다 호남성 근방만 돌아다녀서 백은하의 견문이 좁아진 것 같았다.
“낭인들 대부분이 정식으로 무공을 사사 받은 적이 없다 보니 자주 사용하는 초식은 정교하게 변하고, 잘 안 쓰는 초식은 계속 안 쓰다 보니 조잡해져.”
표사들과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당할 정도면 급하게 돈이 필요한 고수들이 정체를 숨기고 낭인 행세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튼, 누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우리를 습격한 건 분명해.”
“확실히 그렇지.”
산채나 낭인 집단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표사가 많이 붙은 표행을 노리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습격을 해서 성공해봐야 본전, 실패하면 모두 목숨을 잃으니까.
그런데도 습격을 감행했다는 건 습격자들이 가져간 표물의 가치가 엄청나다고 봐야 했다.
“습격자들이 가지고 간 표물이 뭔지는 모르지?”
“전투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데 ‘한빙단’이라고 그랬던 것 같아. 습격한 자중에서도 고수 축에 속한 자가 ‘빨리 한빙단이 담긴 목갑을 찾아!’라고 했거든.”
“한빙단?”
한빙단은 북해빙궁(北海氷宮)의 대표 영단으로 음기를 근원으로 하는 무공을 익힌 경우나 강력한 양기를 억제하는 경우에 한해 소림의 대환단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문제는 이 둘의 경우가 아닌데 먹을 때 발생한다.
일반적인 무인이 그냥 한빙단을 먹으면 음양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 최소가 주화입마이고 최대가 사망이었다.
“음…….”
백서휘는 암중단체들의 수많은 음모와 모략을 분쇄했다.
적은 단서로 의도를 추측하는 건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단서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결론을 내놓았다.
‘제갈세가는 적이 대충 누군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표국을 고용한 거지.’
생판 남을 고용한 건 ‘제갈세가’라는 이름 아래 있는 무사들보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더 믿을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터였다.
‘빙공을 익힌 사람이 없는데 한빙단을 원한다?’
지금 제갈세가에는 강력한 양기를 억제해야만 하는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제갈세가에 아주 중요한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양기가 너무 커 제어가 안 되는 일은 남자에게서만 발생한다는 걸 생각하면…….’
백서휘의 입가에 미소가 진하게 지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왜 납치한 걸까?”
“뭐? 사람을 납치했다고? 자세히 말해봐.”
“나도 기절해서 잘은 모르는데 사람들 얘기로는 몇몇 습격자가 다른 습격자들하고 싸우면서까지 멀쩡한 사람들을 묶어서 따로 데려갔다고 했어.”
“그중에 무공을 배운 사람이 얼마나 있지?”
“없어. 무공을 배운 자는 습격을 막기 위해 싸웠거든.”
“그럼 지금 납치당한 자들은 화계나 쟁자수들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무공을 익힌 자와 익히지 못한 자가 무리를 이루게 되면 이동 속도가 느려진다.
경공을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가 말도 안 되게 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공을 못 쓰면 붙잡기가 쉬워지지.’
“습격한 놈들 특징이랑 어디쯤에서 습격을 받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갑자기 그건 왜?”
“그놈들 잡아보려고.”
“뭐? 그러지 마. 너무 위험해.”
“내가 검기 뽑아내는 거 봤잖아.”
“안 돼. 절대 말 안 할 거야.”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 수도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백은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랑 싸운 놈들의 특징밖에 기억 못 해.”
“기억 나는 놈들만 말해줘도 돼.”
“일단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은 키가 되게 작은 데다 두 개의 낫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싸웠어. 또 어떤 특징이 있더라……. 아! 이마에 주름이 되게 깊고 많았어.”
“늙었다는 거네?”
“아마도?”
“다른 놈들은?”
“맨 처음에 나랑 싸우다가…….”
백은하는 자기가 기억하는 모든 인물의 생김새를 말해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모르지?”
“군산(君山) 쪽으로 갔다고 들었어.”
“아직 군산에 오르지는 못했겠지?”
“몰라.”
백서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은하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나는 이만 가볼게.”
“돌아오는 거지? 옛날처럼 사라지는 거 아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그래, 금방 올게.”
백서휘는 백은하에게 확신을 주고 무관으로 돌아왔다.
무관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은하의 소식을 듣고 놀란 정하진과 정수련이 문을 잠그지도 않고 표국으로 떠난 것 같았다.
‘열쇠 챙길 정신도 없었을 것 같으니 문은 열어놓고 가야겠다.’
무관 내에 훔쳐 갈 만큼 비싼 물건은 자신의 삿갓과 피풍의, 혁대, 배낭 말고는 없었다.
‘설마……. 없어진 건 아니겠지.’
백서휘가 무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작업복을 찾기 시작했다.
양상군자가 들리지 않았는지 물건들은 모두 무사했다.
‘다행이다.’
백서휘는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는 혁대를 허리에 차고 배낭을 멨다.
그다음 위에 피풍의를 걸치고 머리에 삿갓까지 푹 눌러썼다.
‘이제 군산을……. 아니, 하오문에 들러서 마지막 단서를 찾아야겠어.’
백서휘는 도화루를 향해 응룡비천신법을 전력으로 펼쳤다.
빗방울이 그를 미친 듯이 때렸지만, 방수 처리가 된 피풍의가 막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루가 모여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백서휘는 도화루 안으로 들어와 문신이 있는 점소이에게 말을 걸었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따라오시죠.”
“복사꽃 띄워 물은……. 음?”
백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소이를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