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관-1화 (1/202)

귀환무관 1화

촛불이 놓인 커다란 원탁을 중심으로 열 명의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교의 부교주와 혈교의 수석 장로, 암천회의 부회주 등.

중원에서 마주쳤다면 서로의 피를 탐했을 이들이 웬일인지 얌전히 앉아 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화의 논제는 기가 막히게도 ‘누가 더 불쌍하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원에 진출하기 위해 준비한 세월이 무려 백 년이오. 그런데 그 자라 같은 자식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소.”

“구체적인 피해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소?”

“전력의 오 할이 그놈 손에 죽었소.”

말을 마친 마교의 부교주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양호한 거요. 우리는 무인이 오 할, 주술사는 팔 할이 죽었소. 거기다 어렵사리 만든 활강시들까지 파괴되고 말았지.”

“지, 진짜 활강시를 만들었소?”

전설로만 전해지는 활강시를 제조했다는 사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활강시의 제조법은 무사하오?”

“다행히 무사하오. 무사한데…….”

혈교의 수석 장로가 말을 하다 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요?”

“활강시를 만들 돈이 없소.”

자금 부족은 백서휘과 싸웠던 거의 모든 단체가 겪고 있는 문제였다.

“비자금이 있을 거 아니오.”

“그놈이 싹 다 쓸어갔소.”

“음…….”

모여 있는 모두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에게 자금을 융통해줄 수 있는 곳이 있소?”

동굴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혈교의 수석 장로와 눈이 마주치려고 하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당장 보릿고개만 넘을 돈만 있으면 되오.”

“미안하외다.”

“이쪽도 사정이 좋지 않아서…….”

본인들만 털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혈교의 수석 장로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빌려주겠소.”

한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암천회의 부회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 정말이오?”

“대신 조건이 있소.”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다 들어주리다.”

“남은 주술사 모두를 우리에게 지원해주시오.”

“그들을 어디에 쓰는지 얘기해준다면 지원해드리겠소.”

“꼭 밝혀야 하오?”

“남은 주술사가 몸 성히 돌아와야 우리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소.”

“……좋소, 밝히리다.”

다들 긴장된 얼굴로 암천회의 부회주의 입을 바라봤다.

암천회의 부회주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차원의 신을 소환하려 하오.”

“이런 미친!”

“당신 제정신이오?”

혈교를 포함해 주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단체는 암천회의 부회주를 비난했다.

“다들 진정하시오.”

“암천회 때문에 다 죽게 생겼는데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다 이유가 있어서 소환하는 거요.”

“그 소환 때문에 중원에 사는 모든 인간이 죽을 수 있잖소.”

혈교의 수석 장로가 악을 썼다.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보시오. 그러면 내가 왜 외차원의 신을 소환하려는지 이해하게 될 거요.”

“들어보는 게 어때요?”

사독곡의 부곡주가 암천회의 부회주를 지원하고 나섰다.

그녀에게 반한 포달랍궁의 부궁주도 얘기를 들어보는 쪽으로 의견을 보탰다.

“두 분의 의견이 그러하니 이야기를 들어는 보겠소.”

“고맙소이다.”

“어서 그 이유나 밝히시오.”

“이유는 간단하외다. 그놈을 죽일 방법은 외차원의 신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 먹을 수 있다는 건 아시오?”

“그놈은 벼룩이 아니라 천재지변이오. 천재지변을 막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말이 통하지 않는구려.”

“그리 말하니 묻겠소. 그놈 본신의 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는 분 있소? 있다면 손을 한번 들어주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평범하게 무사 몇 보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나도 외차원의 신을 소환할 생각 같은 건 안 했을 거요.”

“더는 못 봐주겠군.”

삿갓을 푹 눌러 쓰고 있던 남자가 삿갓을 검지로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모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백서휘는 검환을 흩뿌려 모임에 참석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밖에는 회담에 참여한 단체의 무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돌격!”

백서휘는 한심하다는 듯 무사를 바라보더니 검강이 서려 있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주위에 있던 무인들의 목이 한순간에 땅에 떨어졌다.

“이 정도 했으면 다들 삼십 년은 조용하겠지.”

백서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 * *

‘이젠 좀 쉬어도 되겠지.’

젊은 놈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웃기지만, 지금의 자신은 모든 것을 새하얗게 불태운 것 같았다.

그럴 만한 것이 10살 무렵에 노인에게 납치당한 이후로 자신은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15살까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무공을 수련했다.

20살부터는 노인과 함께 중원을 노리는 암중단체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그때 쌓은 원한과 노인이 죽으며 남긴 ‘의무’란 이름의 짐으로 인해 자신은 바로 어제까지 중원을 지키느라 바빴다.

‘오늘부터는 달라.’

중원을 노리는 암중단체들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최소 30년은 조용할 거라 예상됐다.

‘30년을 이제 알차게 보내야지.’

피풍의에 삿갓을 푹 눌러쓴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무관을 찾아갔다.

‘너무 많이 변해서 하나도 모르겠군.’

그때 익숙한 가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난초포목점이다!’

죽마고우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송가푸줏간! 제일잡화점!’

무관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다들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부모님과 누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무관이 눈앞에 있었다.

백서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두들겼다.

쾅쾅!

민머리 사내가 문을 열고 걸어 나오더니 백서휘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누구요!”

“이 집 아들입니다.”

“지금 관주님 아들이라고 했소?”

민머리 사내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습니다.”

백서휘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머리 사내는 백서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다시 한번 묻겠소. 도련님이요? 아니면 도련님이 보낸 심부름꾼이란 거요?”

“당연히 도련님 아니겠습니까.”

“미친놈.”

민머리 사내는 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허허!”

민머리 사내의 반응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실종된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되었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들기자 민머리 사내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이번엔 뭐 때문에 문을 두들긴 거지? 또 아들이라고 하려고?”

“관주님 좀 불러주십시오. 관주님만 불러주면 내가 이 집 아들이란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맞을래? 아니면 그냥 갈래?”

“증명할 수 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백서휘가 당당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건 관주님을 불러주면 그때 가서 말하겠습니다.”

“관주님은 출타 중이신데?”

“어디 가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련님을 만나러 하남성에 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말이 안 되긴.”

“그럼 사모님을 불러주십시오.”

“사모님도 같이 가셨다.”

“그, 그럼 누나를…….”

“누나? 관주님 슬하에 딸은 없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 여기 자하무관(紫霞武館) 아닙니까?”

민머리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판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서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현판에는 자하무관이 아니라 금강무관(金剛武館)이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 이곳에서 무관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모르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민머리 사내가 다시 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저기요!”

문을 두드렸지만, 민머리 사내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차림새가 허름해서인지 다들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쌩하니 사라졌다.

“제기랄!”

어떻게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자그마한 키를 가진 소녀가 백서휘에게 말을 걸었다.

“자하무관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꼭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 이유가 뭔데요?”

“그건 밝히기가 어려워.”

“이유가 뭔지 알려주시면 자하무관까지 안내해줄게요.”

“꼭 다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하무관에 가려는 거야.”

“좋아요, 절 따라오세요.”

“고맙다.”

“안 고마워하셔도 돼요. 사실 아저씨 아니어도 그쪽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내 언젠가 이 은혜를 꼭 갚을게.”

“꼭 갚아요. 아셨죠?”

소녀가 백서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응?’

소녀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 자하무관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소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건물을 가리켰다.

‘이게 자하무관이라고?’

이사를 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기억 속의 자하무관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건물이 너무 낡았다.

안 무너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집안이 이 정도로 영락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백서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짜 여기가 자하무관 맞아?”

소녀가 아무런 말 없이 현판을 가리켰다.

현판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자하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맞구나…….’

백서휘가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소녀가 대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소녀가 마당을 지나쳐 자하무관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백서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소녀의 뒤를 쫓았다.

“아빠!”

소녀의 외침에 백서휘는 걷는 걸 멈추었다.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현판을 확인했다.

“꼭 무관을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

무관 안쪽 깊숙한 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드르륵!

비실비실한 몸을 가진 남자가 마당을 걸어나왔다.

“관원이 되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요.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누구를 찾으러 온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백상훈이란 함자를 쓰시는 분을 찾아 왔습니다.”

“빙장께서는 작고하셨습니다.”

“도, 돌아가셨다고요? 그럼 설화란이란 함자를 쓰시는 분은…….”

“빙모 역시…….”

세상이 무너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로 빙장 어른을 찾아오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그분의 아들입니다.”

백서휘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이요?”

남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 붉은 경장을 입은 장발의 여자가 미닫이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나타났다.

드르륵!

백서휘는 기억을 더듬거리며 여자가 누군지 유추해봤다.

‘무관 뒤쪽에서 나온 걸 보면 가족이란 뜻인데……. 잠깐! 가족?’

머릿속에 꼈던 먹구름이 사라지며 ‘백은하’란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이에요?”

“보면 알겠지만, 당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또 찾아왔소.”

“또요?”

목소리를 들으니 확신이 섰다.

백서휘가 백은하를 향해 달려갔다.

당황한 백은하는 그를 제압할 준비를 했다.

“누나!”

백서휘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백은하는 엄청난 속도로 금나수를 펼쳤다.

파바밧!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백은하의 금나수는 결코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서휘는 본능적인 움직임만으로 백은하의 금나수를 한순간에 파훼해버렸다.

백서휘에게 안긴 백은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고 싶었어.”

“으윽! 이 사기꾼 자식! 누가 네 누나야! 이거 놔!”

“사기꾼이라니? 나 진짜 백서휘 맞아.”

“감히 죽은 동생을 사칭해? 가만두지 않겠어!”

챙!

백은하가 백서휘를 밀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검을 뽑아!”

20년 전의 백은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벌레 하나 못 죽이는 순한 사람이 이렇게 사납게 변한 걸 보면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어디서 조사를 많이 해온 모양인데…….”

“조사라니! 진짜 나 맞다니까!”

백서휘가 삿갓을 위로 올리고는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백은하가 보기엔 피부가 탄 것만 빼면 아버지의 얼굴과 똑같았다.

백서휘가 기대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백은하를 쳐다봤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남동생이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20년 만에.

백은하는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