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99화 (299/300)

#299화

신마가 소멸하고, 혼돈이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적막에 빠진 전장 가운데 주호는 어깨에 힘을 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 난 거지?”

옆에 있던 천우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호의 몸을 받아주며 혼돈과 신마가 사라져버린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삭풍이 그들의 남은 잔재를 깨끗이 씻어 보낸다. 얼마간 세상을 떠돌겠지만, 이전처럼 부활해 자신들 앞에 되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혼돈이 말하지 않았나. 가장 큰 적은 쓰러졌지만, 환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

천우희의 시선이 지평선 너머를 향했다.

그곳엔 아직 수만에 달하는 혈천신교의 본대가 남아 있었다.

비록 그들의 수장인 신마와 혼돈을 비롯해 주축 고수들이 죽었지만, 중원 정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들이 순순히 물러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저들은 혈천신교뿐만 아니라 세외와 남만의 세력들이 섞여 있다. 연 단위로 전쟁을 지속했으니 저마다 최소한의 이득을 보고 싶어 하겠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 우리 역할은 끝난 것 같네.”

뒤쪽으로부터 중원 연합의 고수들이 닥쳐왔다.

저마다 깊은 상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부상 병동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들은 더없이 맑은 눈으로 주호를 바라봐왔다.

“신마는, 신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는 대로네. 검신(劍神)이 신마(神魔)를 꺾었네.”

백호는 파리한 안색이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져온 고수에게 대답해주었다.

“…신마가 죽었다고?”

옆에 있던 다른 이가 그 말을 받았다.

곧 그 소식은 바람을 타고 전염되듯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주위는 순식간에 환호에 휩싸였다.

와아아아-!

검신 대협 만세!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강함을 자랑하던 적의 수괴가 쓰러졌다.

그것도 중원을 대표하는 검신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면, 뒤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주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신마와의 싸움에서 모든 기력을 소모한 그의 몸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지금까지 눈을 뜨고 있던 것이 기적으로, 곧바로 천우희의 품 안으로 쓰러져 내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고생했어. 다시 깨어났을 땐 전부 정리되어 있을 거야.”

천우희는 조심스레 그를 품에 안아 들었다.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잠자코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백호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청룡이 큰 활약을 해주었으니, 뒷정리는 이쪽이 해야겠지.”

쿵 쿵 쿵 쿵.

신마와 혼돈이 죽은 것을 눈치챘는지 혈천신교의 본대가 천천히 이쪽으로 나아오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들이 함께 진군해왔다면 중원은 손쓸 도리 없이 무너졌으리라.

하지만 신마는 오만했고, 자신의 절대적인 강함을 믿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다.

물론 주호 같은 걸출한 영웅이 없었더라면 그의 야욕은 전 중원을 뒤덮고도 남았을 터.

“오너라, 주인을 잃은 잔당들이여.”

마지막 싸움을 앞둔 중원 연합의 고수들은 최후의 투지를 불태웠다.

***

혈천신교의 상징인 신마(神魔), 그리고 사흉수의 수좌인 혼돈(混沌)이 죽었다.

신마는 혈천신교의 상징으로서, 혼돈은 혈천신교의 대소사를 모두 도맡아 하는 맹주로서 있었다.

그렇기에 그 둘의 부재는 혈천신교 내에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을 불러일으켰다.

그 압도적인 힘에 굴복해 고개를 조아렸던 세외와 남만의 세력들은 하나둘씩 불손한 기색을 품으며 틈을 노렸고, 그것은 끝내 서로가 서로의 뒤를 치는 파국에 치달았다.

한 달.

중원 연합으로선 딱 한 달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혈천신교의 여러 세력은 사오 분열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찾기 위해 중원으로 나아왔다.

하지만 중원 연합은 아직 저력을 유지하고 있는바. 신마와 혼돈이 없는 가운데 꽁꽁 뭉쳐도 모자랄 판에 서로 각기 다른 세력을 이루어 공격해오니 그보다 더 상대하기 쉬운 오합지졸들은 없었다.

“본인은! 무림맹의 차기 맹주로서! 우리 중원 연합이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바이오!”

전 맹주인 검선(劍仙) 단철량의 존재감은 이미 희미해졌다.

정도 무림은 대신 맹주 자리를 꿰찬 검제(劍帝) 남궁한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물론 단철량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그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할 예정인바. 지금 당장은 전쟁의 뒤처리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남궁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몇 년에 이어진 전쟁으로 중원 전체가 피폐해져 있었다.

전쟁 가운데 죽어 차디찬 땅에서 얼어붙은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어디 한 군데씩 상처를 입은 채 훈장을 지닌 이들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대문파들조차 얼마간은 봉문한 채 내실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정도의 큰 피해.

그렇기에 명문이라 불리는 그들 역시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을 가리지 않고 남궁한의 체제에 따르며 상처 회복에 들어갔다.

“…혈천신교와 화평을 맺었다네요. 그렇게 치열하게 싸운 것 치고는 시시한 결말이죠?”

남궁연은 주호가 떠먹여 준 죽을 꿀꺽 삼키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추가 피해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화평이 체결되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을 거다.”

“그래도요. 뭔가 허무해요. 그간 질리도록 고생했는데 이렇게 딱 끝나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잖아요.”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이 있다.”

“…하긴 그러네요. 배부른 투정이었어요.”

남궁연은 혀를 내밀며 미소를 지어왔다.

신마를 막아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다 쓴 남궁연은 심기체(心氣體)에 큰 상처를 입었다.

기와 체는 남궁한과 주호가 구해온 온갖 영약으로 얼추 치료했다고 하지만, 금이 간 심(心), 정신 쪽은 여전히 불안정했기에 항상 누군가 붙어 있어야 했다.

“우희 언니는요?”

“사천에 있다. 사신문의 고수들과 함께 남은 혈천신교의 잔당을 추적하는 모양이야.”

“방금 화평을 맺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화평은 중원 연합이 맺은 것이지, 사신문이 맺은 것은 아니니 말이야.”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언제가 자신들 사이에 스며들어와 치명적인 비수가 될 것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남궁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제 머리카락 끝을 비비 꼬았다.

새하얗게 새어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이 나는 백회 쪽의 모근 쪽도 전부 새하얗게 되어버려 태생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남았다.

“사실은 언니를 따라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

“어째서?”

“그냥, 그렇잖아요.”

남궁연은 살짝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머리색도 이렇게 됐고, 단전도 손상되고 내상도 커서 당분간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됐는데 귀찮은 게 당연하죠.”

침울한 기색이 얼굴을 뒤덮었다.

주호는 잠시 입을 열다가도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날 구하려다 이리된 것이 아니더냐.”

“…읏.”

예상치 못한 행동인 듯 남궁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심(心)이, 정신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은 비유의 표현이 아니었다.

재능을 넘어선 무언가를 엿본 대가는 그녀의 머리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마치 무언가의 병에 걸린 것처럼 온종일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생각이 불쑥 튀어 올라 스스로 기겁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아무런 상처 하나 없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호가 옆에서 바로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널 처음 안았을 때부터, 평생 책임지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

남궁연은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자신의 약지에 끼여진 옥가락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거!”

“그래. 부족한 몸이지만, 나와 혼인해주겠느냐.”

남궁연은 힘껏 주호를 끌어안았다.

망가진 몸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했기에 내심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자신을 받아줄까.

더군다나 그에겐 천우희도 있지 않은가.

정말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어쩌면 이대로 버려져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겠다는 가정을 막연하게 하곤 했다.

하지만 약지에 끼인 옥가락지와 힘껏 껴안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귓가에서 속삭이던 저주 같은 의심의 목소리가 전부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의심했어요. 교관님이 이렇게 되어버린 절 버리지 않을까.”

“설마 내가 그러겠느냐.”

“그러니까요.”

감정이 복받쳤는지 그녀는 주호의 목에 매달려 훌쩍거렸다.

이전의 당당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리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주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장 하자는 것은 아니다. 네 상태가 좋아진 뒤에 성대하게 하자구나. 학관의 교관, 후기지수, 구파일방, 세가 연합, 사신문 등등 될 수 있는 한 많이 부르는 게 좋겠어.”

“우희 언니는요? 언니랑은 이야기해봤나요?”

“우희가 먼저 꺼낸 이야기다.”

“…누가 첫 번째에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주호는 난감하단 표정으로 뺨을 긁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혼인하자고 한 것은 네게 먼저 말했다.”

여러 여인과 혼인하는 것이 딱히 흠인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첩실이 많을수록 남자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았다.

하지만 주호는 그런 것으로 자신과 그녀들의 관계를 재단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포기하지 못했기에 그저 그녀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그런 부분은 언니랑 예전부터 계속 이야기해왔으니까요.”

“…예전부터?”

“네. 둘 다 죽어도 교관님 포기 못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저랑 언니가 전부라서. 아, 후보군이 너무 뛰어나서 다 제풀에 떨어져 나간 걸까요?”

훌쩍이던 남궁연은 이내 기분이 풀렸는지 코맹맹이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끼이익.

한 번 더 그녀를 꽉 안아준 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내부를 환기하기 위함이었지만, 활짝 열린 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삭막했던 겨울은 어느새 끝나고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나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창가에 기댄 그의 곁으로 아직은 한기를 품은 한 줄기 바람이 천천히 훑으며 지나갔다.

창밖에선 한 아이가 손수 깎아 다듬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호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지녔던 때였다.

아이는 곧 약관이 되었고, 당당히 출가를 선언해 그토록 동경하던 강호에 몸을 담갔다.

비록 생각한 것만큼 낭만 넘치는 일이 아니었지만, 뒷골목을 전전하던 그때의 삶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존재할 수 없었을 터.

햇빛 한 점 비치지 않은 비동에서의 삶은 지금 생각해도 지옥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삼 년이란 시간 끝에 비동을 나와서 격변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흐름에 휩쓸렸다.

정천 학관의 교관인 주호에서 검절(劍絶) 주호로. 검절 주호에서 검신(劍神) 주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여정을 지나왔다.

“그러게요. 많은 일이 있었죠.”

남궁연은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기어코 침상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들어 올렸고,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함께 창밖을 구경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있을 거고요.”

“전부 행복한 일일 수는 없겠지만, 기대해도 되겠지.”

“그래도, 당신이 쭉 함께해준다면.”

남궁연은 고개를 들어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러니 이 앞에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한들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소한 불행 한두 개 정도는 눈감아드릴게요.”

봄은 이미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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