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완력이 대단하고 두뇌 또한 명석해, 약관이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작은 마을의 포졸을 이끄는 포두가 되었다.
성격에 모난 곳이 없어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렸고,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관직인지라 배곯을 일도 없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몇 해가 지나선 참한 여인을 소개받아 혼인했고 두 해가 더 지났을 때 슬하에 딸아이를 얻어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세상천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아닐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행복의 역치가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전란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황실은 부패했고, 권력가들의 탐욕은 끊이질 않았다.
곳곳에선 스스로 하늘을 바꾸리라 천명하며 봉기하는 반군이라는 이름의 도적 떼들이 들끓었다.
남자가 사는 마을 역시 몇 번이고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타고난 완력에 더불어 경험까지 쌓여 노련해진 남자는 휘하의 포졸들과 함께 그 침입을 모두 격퇴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엔 근처 산에 산적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에 남자는 야음을 틈타 수하들을 이끌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나섰다.
방비를 튼튼히 해놓았으니 하룻밤 정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남자에게 당한 산적 무리가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짜놓은 간계였다.
남자를 비롯한 포졸들이 산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단의 무리가 마을을 습격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도 쉽사리 당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큰 피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산적의 우두머리가 그들에게 외쳤다.
자신들의 목적은 포두뿐이다.
그의 가족을 내놓는다면 더 이상의 공격 없이 물러나겠노라.
이대로 더 싸운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기에 궁지에 몰린 마을 사람들은 포두의 아내와 딸을 내어놓기로 했다.
아내는 하다못해 딸이라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뱃속에 둘째를 임신한 와중이어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간절히 빌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그들을 마을 밖으로 내몰았다.
한편 산적을 쫓기 위해 산을 수색하던 남자는 이상함을 느꼈다.
산길에 산적은커녕 사람이 오갔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땅에 찍힌 발자국이라곤 산짐승들의 것뿐이었다.
영문 모를 불안함을 느낀 남자는 산에서 내려왔고, 마을 어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산적 무리와 마주했다.
“…아.”
남자는 메마른 숨을 삼키며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산적들의 선두.
높이 솟은 장대 위에 익숙한 안면의 여인이 머리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죄질이 악랄한 범죄자에게만 한다는 효수형.
어째서 자신의 부인이, 자신의 딸이 저렇게 되어 있는가.
남자는 질 나쁜 악몽을 꾸고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진득한 피 냄새는 그가 현실 가운데 있음을 여실 없이 알려주었다.
남자는 절규했다.
포졸들이 말림에도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고, 장대를 부러뜨려 매달려 있던 아내와 딸아이의 수급을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도적 떼와 웃고 있던 우두머리가 외쳤다.
“네가 지키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어떠한가. 저들은 그 알량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네 아내와 딸을 팔았노라.”
가장 잔혹한 복수였다.
우두머리는 인간의 탈을 쓴 금수였기에 어떻게 하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
남자는 곧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들을 자신 뒤에 내려놓았다.
행여나 흙이 묻을까 상의를 벗어 깔고 그 위에 올려놓았고, 새빨개진 눈에선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죽여라.”
우두머리는 그리 말했다.
그리도 강했던 장사가 무너지는 흡족한 광경이었다. 녀석에게 당한 수모는 이것으로 되갚아 주었으니 이제 저 수급을 취할 차례였다.
도적 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로 나아갔다.
뒤쪽에서 얼어붙어 있던 포졸들이 그 움직임을 눈치채고 황급히 나섰지만, 도적들의 창칼이 더 빨랐다.
탁.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남자의 몸에 닿지 못했다.
심지어 누군가 휘두른 창대가 그 손에 붙잡혀 쏟아지는 병장기를 모조리 막아냈다.
“오늘.”
남자는 전신에 핏줄이 불거진 상태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누구도 이곳을 살아나가지 못한다.”
퍽.
가벼운 주먹질 한 방에 가장 가까이 있던 도적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 직후 남자는 양 떼 사이에서 날뛰는 범처럼 사정없이 도적들의 몸을 찢어발기며 미친 듯이 나아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기 어리고 슬퍼 보였던지 포졸 중 감히 누구 하나 나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수십에 달하는 도적이 한 사람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우두머리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팔다리가 뭉개진 상황 가운데서도 피를 토해내며 흐릿한 조소를 지었다.
“네놈이나 나나 다를 바가 없구나. 누가 금수인지 모르겠어.”
쓰디쓴 단말마였다.
도적 떼를 전부 쳐죽인 남자는 곧바로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한참 전부터 마을 어귀에서 남자가 도적 떼를 때려잡는 신위를 보며 얼어붙어 있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말해 보시오.”
어째서 나를 믿지 못하였소.
어째서 부인과 딸을 내버렸소.
어째서 그 짧은 시간을 기다…….
푹.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창 한 자루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의 장정이 겁에 질린 얼굴로 창을 내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
남자는 입가를 비틀었다.
얼굴은 일그러졌고, 막대한 자괴감이 가슴 속에 사무쳤다.
지금까지 난 무엇을 한 것인가.
이들에게서 난 무엇이었나.
가볍게 손을 휘둘러 창대를 부수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장정은 어어, 하는 사이 끌려왔고 남자의 일수에 머리가 부서지며 단숨에 절명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남자는 시뻘건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이들이나, 저 뒤에 자신에게 박살난 도적 떼들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포두님!”
“그만두십시오!”
무차별적인 살인을 시작한 남자의 앞으로 포졸들이 닥쳐왔다.
반평생 함께 다녔던 그들이 필사적으로 말림에도 요지부동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창칼을 마주했지만, 남자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마을은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멸망했다.
남자는 머리만 남은 아내와 아이를 안고 그 가운데서 절규했다.
바닥에 고인 피가 눌어붙고, 파리가 꼬이고, 목이 찢어질 때까지 며칠 밤낮이나 울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누군가 그 시체 더미를 밟으며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아이야, 어찌하여 그리 서럽게 울고 있느냐.”
새하얀 백발을 지닌 한 청년이었다.
남자는 핏줄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가시오. 이곳은 지옥이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떠나지 않는 것이냐.”
남자는 귀찮았다.
그저 이대로 죽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 청년은 시체가 수두룩한 이 가운데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것인가.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순수한 눈동자에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그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남자는 짤막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토해내었다.
청년은 잠시간 턱을 쓰다듬으며 숙고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로 물들었다 하여, 혈천인가.”
“무슨 소리요.”
“아이야, 너는 네 행동을 후회하고 있느냐.”
“…후회하지 않소. 그저 아내와 딸에게 미안할 뿐이오. 그래서 스스로 목숨조차 끊지 못하고 있소.”
“내가 도와주면 되겠느냐.”
“되었소.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당신의 손을 더럽힐 이유가 있겠소.”
“너는 의인이로구나.”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남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남을 위하고 걱정할 줄 알지 않느냐. 의인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요. 당신이 지나온 길에 있던 모든 시신은 내 손으로 만든 것이오. 그래도 의인이라 할 수 있소?”
“이미 지나간 일이 무에 상관있겠느냐. 아이야, 너는 의인이 맞다.”
“하하….”
남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싶더니 미치광이였나.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현상에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슈아악─.
장내에 쌓인 시체들로부터 핏줄기가 솟구쳐 청년의 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날 며칠이 지나 말라붙었을 터임이 분명함에도 그 손에 응집된 것은 갓 뽑아낸 것처럼 새빨간 피였다.
“아이야, 나는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의인이 필요하구나. 너는 어떠하냐.”
세상을 바꾸려 한다.
허울 좋은 울림이었지만,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 안에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세상은 이미 끝났소.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를 알아보시오.”
“새로이 도래하는 세상에서 네 부인과 딸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따라오겠느냐.”
부인과 딸을 살릴 수 있다.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죽은 이를 소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죽음이 자욱한 이 가운데 올곧게 서서 그리 말하는 청년의 말은 어째서인지 진실로 들려왔다.
“…나는.”
남자는 고민했다.
고민하고 고민한 뒤에 입을 열 찰나, 앞쪽으로부터 쇠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 돈. 네가 어찌…….”
과거를 회상하던 기억이 깨어져 나갔다.
남자, 혼돈은 핏발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마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뭐, 원망하진 마시오. 날 밑으로 들인 것 역시 당신이었고, 삼백 년 전 무황에게 패배해 대계를 헛되이 실패해버린 것 역시 당신이었소.”
혼돈은 딱하다는 시선으로 신마를 바라보았다.
삼백 년 전의 그 위풍당당했던,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믿던 구도자는 이제 여기에 없었다.
남은 것은 과거의 아집과 환상에 젖어 숱한 피 보라를 일으키는 과거의 망령뿐.
“…커, 어억.”
신마의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 피부는 시커멓게 썩어들어 갔고, 새하얀 머리카락 역시 누렇게 변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린 너무 멀리 왔소.”
삼백 년이 넘는 세월.
혼백이 신마에게 종속된 혼돈은 늙는 것도, 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계는 있는 법. 정신은 마모되었고, 눈은 깎여나가 빛을 잃었다.
“나는 이제 그만 그들이 보고 싶소.”
신마는 구도자였다.
그렇기에 혼돈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고자, 죽은 아내와 딸을 소생시키고자 그의 뒤를 따랐다.
무고한 이를 죽여 손에 피를 묻혔을 때도, 살려달라 울부짖으며 발밑에 엎드리는 이를 짓밟았을 때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그 죽음을 당연시했고,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한 것은 삼백 년 전 무황과의 싸움에서였다.
그간 준비했던 모든 대계가 그 한 명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심지어 이때껏 앞길을 가로막는 이를 모두 쓰러뜨린 신마조차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은바. 혼백이 종속되어 감히 신마를 거스를 수 없는 혼돈의 가슴 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잘못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아닐까.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후회로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혼백을 종속당한 그는 언제까지고 신마를 위해서 일해야 했다.
조각난 신마의 혼백을 기워 맞추고, 무너진 혈천신교의 세력을 천천히 보강해나갔다.
신마는 이제 구도자가 아니었다.
앞서 나가던 그조차 길을 잃고 헤매어 혈천(血天)이라는 기묘한 사상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선 신마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선 그 영혼을 모두 하나로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종속 관계인 자신의 손으로 실행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그만한 대적자가 나타나야 했다.
그런 가운데 주호의 존재는 혼돈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패였다.
어쩌면, 그가 무황의 대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후에 그가 무황의 계승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여기까지 이르는 대국을 구성했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각 세력이 주호의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을 막았고, 그를 노리는 이들을 사전에 처단해 암중에서 지켜주었다.
“…어찌하여.”
혼돈은 백호와 천우희에게 부축을 받으며 멍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는 주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자네에게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이야.”
“…신마를 제치고 혈천신교를 집어삼키는 것이 네놈의 목적이었나?”
“설마.”
혼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본인 역시 여기까지 와서 구차하게 사정을 설명하거나 이해를 바랄 생각은 없었다.
파스스스─.
신마는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바닥에 스러져 한 줌의 재가 되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혼돈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언젠가 내가 물었소. 만일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나는 어찌하면 되느냐고.”
신마는 이리 답했다.
‘앞서 걷고 있는 나는 필시 그것을 모르겠지. 그리한다면 의인인 자네가 알려주게나.’
신마로서 세외와 중원을 정복하고 천하를 발아래 두기 직전이던 거인은 덧없이 그 존재가 지워졌다.
혼돈은 검을 땅에 꽂아 넣고 고개를 들어 주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자네가 옳다고 믿는가?”
“…그렇다.”
비록 전신이 피폐해져 있지만, 그 눈빛만은 성성했다.
그 안에 서린 눈부신 빛은 일전 신마가 자신에게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뜬 혼돈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야말로 의인이야. 부디 자네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네.”
“…무슨.”
주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혼돈은 그 말을 끝으로 주저앉았다. 아니, 다리가 없어져 더는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대가를 치르는가.’
혼백이 종속당한 상태에서 계약을 배신한 대가는 혹독했다.
손과 발끝이 멈춰 있던 시간의 흐름을 맞이해 급속도로 노화되며 가루로 흩어져갔다.
삶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바. 막상 이때가 닥쳐오자 사뭇 씁쓸한 감정이 들었기에 혼돈은 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심하게. 가장 큰 적은 사라졌지만, 이 세상에 닥친 환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인이라 불렸던 남자의 마지막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