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시간이 정지했다.
적어도 주호는 그렇게 느꼈다.
머리 위에 떨어진 신마의 칼날은 못 박힌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 곁을 선회하는 핏빛 기류 역시 멈춰 서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주호의 사고(思考)뿐. 정지한 세상 가운데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떠오른 글귀를 바라보았다.
[상태창을 삭제 중입니다.]
[진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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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에서 삼 년, 중원에서 이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상태창이 사라져간다. 그 끄트머리부터 형태가 무너져 내렸고, 먼지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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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막막한 심정이 들었다.
인생의 두 번째 막은 상태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 삼 년.
때로는 말벗을 해주던 친우였으며, 때로는 엄하게 가르침을 내리던 스승이었고, 때로는 길 잃은 자신에게 방향을 가리키던 이정표였다.
중원에서의 이 년.
이 덕분에 천우희를 비롯해 사신문과 관계되고 사흉수와 혈천신교의 음모를 저지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인연이, 관계가 상태창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엮이며 이곳까지 도달했다.
[진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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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더 앞의 경지를 위해 상태창은 스스로 자신을 불살랐다.
자신의 진일보를 쌓인 역사를, 이야기를 지우고 무(無)로 돌아갔다.
‘내가 잊지 않으마.’
검신(劍神) 주호.
그 이름은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어진 운명을 위해 아니, 등 뒤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주호는 기꺼이 그 업을 감당키로 했다.
[진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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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각─.
상태창의 틀을 이루던 형태가 부서졌다.
그 안에 쓰인 푸른 글귀는 바람에 쓸려나가는 모래알처럼 덧없이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진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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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저저저적─.
세계가 부서져 내렸다.
적어도 주호는 그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 떠오른 글귀가 바람에 쓸려나감과 동시에 머리를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긴고아(緊箍兒)에서 해방된 제천대성이 바로 이러한 기분이었을까.
이때까지 상태창에서 처리해주던 막대한 정보가 물밀듯 밀려 들어와 일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뚝.
일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량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호의 감각이 수십 배로 확장되었다.
“……!”
주호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세상이 이리도 넓었는가.
그 안에 속한 자신의 존재는 한 톨의 먼지처럼 하찮기만 하다. 눈앞의 신마도, 이름을 알리는 다른 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원의 수호, 혈천의 업.
자신과 신마가 부르짖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던 것인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작은 것에 사로잡혀 이토록 긴 세월 동안 고통 가운데 속해 있는가.
정지된 시간 가운데 주호는 들끓어 오르는 모든 세속의 잔여를 토해내었다.
속은 텅 비었고, 허무라는 단어가 들어맞을 정도로 채워진 것이 없었다.
오욕칠정, 희로애락.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감정들이 그 끄트머리부터 사라져갔다.
무극(無極).
윤회를 거쳐 이어지는 고리를 끊을 준비가 끝났다.
그 너머로 펼쳐진 길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미지의 것. 하지만 주호는 막연하게 작금 닥친 현상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등선(登仙).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선으로 다다르는 경지. 죽음 따위가 아니라 별개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했다.
주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낸다면 모든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다. 더는 이런 추악하고 처절한 싸움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몸은 이미 한계가 왔다며 비명을 지르고, 손발 끝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며 경련했다.
저 빛에 닿으면 편해질 수 있다.
그 강렬한 유혹에 삼켜지기 직전.
“…아.”
주호의 두 눈이 다시 한 번 커다래졌다.
자신이 아득바득 바닥을 기면서 이리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술을 거나하게 마신 것처럼 머리가 멍해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떠오른 빛에 시선이 못 박힌 상태에서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대의를 쫓지 않았다.
그저 손에 닿는 이들을 도우며 모두가 함께 행복해졌으면 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앞선 발자취를 좇으며 열등에 빠져 있던 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가문의 굴레란 늪에 얽혀 있으면서도 올곧게 강함을 추구하던 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과거의 실수에 얽매어 있던 이에게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
가족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이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불합리함을 안고 있어 웅크려 있을 수밖에 없던 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메마른 대지처럼 삭막한 삶을 살아가던 이에게 풍성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진심을 드러낼 수 없어 항상 가면을 쓰고 있던 이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망막에 익숙한 얼굴들이 맺혔다.
주호는 그들을 버리고 자신만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망설임을 버렸고, 오히려 힘껏 손을 뻗어 그 빛을 움켜쥐었다.
‘좋다. 등선이든 뭐든 해주마.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원하는 것은 신마를 꺾을 힘.
부처든 나찰이든 상관치 않는다. 자신에게 힘을 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주호는 뇌리를 휩쓰는 벼락과도 같은 충격에 두 눈을 부릅떴다.
“……!”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전신에 닥쳐와 할 수 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신경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 정지된 시간 가운데 억겁이라 말할 수 있는 찰나가 흐른 끝에 모든 빛이 주호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쉬아아악!
그와 동시에 멈춰 있던 세계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신마는 지척에 다다른 자신의 검이 주호를 베어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직전 조금 전까지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했던 그가 돌연 강하게 땅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놈!”
그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띄운 뒤 옆으로 튕겨 나갔다.
신마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갈을 내지르며 검의 궤적을 바꿨지만, 이내 제자리에 못이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
신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피부 위로 소름이 돋게 만드는 이 가증스러운 기세를.
“네, 놈!”
계승자의 몸을 빌려 삼백 년 이후의 세상에 도래한 것인가.
신마는 분노에 차 검 끝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본좌에게 윤회의 순리를 지껄였으면서 정작 네놈 역시 그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본좌의 앞길을 막고 싶으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주호는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부릅뜬 눈동자에 세상이 맺힌다. 그중 신마는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였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 끝이다.”
주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남궁연의 검은 이미 산산조각이나 형태조차 남기지 않고 부서진 상태. 하지만 이제 검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대체 무황은 얼마나 높은 경지였던 것이지.’
입신지경.
신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무언가.
무의 극의라 표할 수 있는 영역을 딛고 선 주호는 아직도 자신이 기억 속의 무황에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신마는 달랐다.
그 역시 입신지경의 끝에 다다라 천외천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안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디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무황에게 패배했고.
“내게 패배하는 것이다.”
앞으로 내민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의 끝이 신마를 가리켰다.
“네놈-!”
신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삼백 년 전, 자신의 영혼을 갈가리 찢었던 그것을 주호가 재현하려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궁─.
하늘이 핏빛으로 뒤덮였다.
너무나도 강력한 기운의 발현에 신마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뒤틀리며 왜곡이 발생했고, 마치 이 세상을 전부 쓸어버리려는 듯 강대한 해일이 휘몰아쳤다.
재해 앞에 홀로 선 인간.
얼핏 보면 덧없이 휩쓸려 나갈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실제로 주호의 단전에 남은 내공이라곤 한 줌도 되지 않는 양뿐. 사력을 다한 싸움 가운데 진원진기까지 가져다 썼기에 한계에 다다랐다.
“허나, 물러날 이유는 없다.”
천지간에 떠도는 자연지기가 요동치며 새로이 탄생한 주인을 반기고 있지 않은가.
쭉 뻗어진 팔이 돌아가며 손등이 지상으로 향했다.
신마는 어림없다는 표정과 함께 핏빛 해일과 닥쳐왔지만, 주호는 단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만을 까딱였을 뿐이었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대지로부터 솟구쳤다.
물밀듯 밀려오던 핏빛 해일은 무너진 지반으로부터 뿜어진 빛줄기에 꿰뚫렸고, 이내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며 무너져 내렸다.
“끄아아아아아!!”
신마는 절규를 내질렀다.
원망스러웠고, 절망스러웠다.
어찌 하늘은 자신을 낳고 무황을 보냈고, 주호를 보냈는가.
피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하는 자신의 행보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수백 년의 기다림이었다.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준비했고, 단 두 사람만 없었더라면 자신의 대업은 분명 성공했으리라.
신마의 눈이 탁하게 변하며 입과 함께 시뻘건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봉합되어 있던 신마의 혼백이 빛무리에 휩쓸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수백 갈래로 찢어지려는 것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악인이 잘못을 받는다는 뻔하디뻔한 결말.
우스운 이야기다. 처음부터 악인이었던 자가 어디 있겠는가.
신마 역시 자신의 신념이, 자신의 행동이 세간의 기준에 빗대어 보았을 때 그릇된 것임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세상은 먼저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걸음을 내디뎌 방향을 잡아주는 것으로 아둔한 이들을 이끌어 주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고독한 선도자(先導者)이자, 갈 길을 밝히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이었다.
그렇기에 혈천이란 이름의 교를 만들었고, 제 뜻에 동조하는 이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었다.
세상이 자신들을 부정한다면, 그 세상의 기준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이리 물러날 수 없다.
이제는 사명밖에 남지 않은 신념.
육체를 벗어난 신마의 혼백은 귀기 어린 악귀의 형상을 이루며 영혼의 파편으로 만들어낸 수백 자루의 검 끝을 주호에게 겨눴다.
쉬이이이익─!
핏빛 유성이 떨어져 내리듯 온 세상의 악의와 분노가 한 존재에게로 집약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주호는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그 앞에 올곧게 섰다.
“새로이 열릴 시대에 구시대의 망령이 존재할 자리 따윈 어디에도 없다.”
그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남궁연에게 빌려온 검은 이미 부서져 없다. 그러니 만들면 되었다.
마음속으로 한 자루의 검을 제련했다.
스산한 푸른빛이 모여들어 익숙한 형태를 이루었다.
곧게 뻗은 새하얀 검날 위로 승천하는 듯한 청룡의 자태가 음각되어 있다. 손잡이는 푸른 수실로 장식되어 익숙한 감촉이 손바닥 안으로 달라붙어 왔다.
이전 신마와의 싸움에서 파손되어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된 그의 애검.
신검(神劍) 청룡(靑龍).
웅웅─.
날카롭게 벼려진 신검이 오랜만의 재회를 기뻐하며 검명을 토해냈다.
주호는 그리운 미소를 지으며 검신을 쓰다듬은 뒤 천천히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온갖 적의를 바라보았다.
“역시, 끝은 이걸로 해야겠지.”
눈부신 광휘가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렸다.
어찌 장엄한 광경인지 지켜보던 이들은 신마를 막기 위해 천계로부터 상제라 강림한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사 초식.”
사 초식 개벽(開闢).
핏빛 하늘이 거쳐 갔다.
청명함은 그 푸름을 되찾았고, 세상을 가득 뒤덮었던 망령은 제자리를 잃고 쫓겨나 유일한 안식처인 볼품없는 육신으로 도망쳤다.
쏴아아아─.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린 빛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기를 정화했다.
손에 든 신검이 형태를 잃고 흐트러졌을 때, 주호는 울컥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래선 몸 안의 피가 남아나질 않겠군.”
아쉽게도 경지에 올라 이전의 상처들이 모두 회복된다는 형편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은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
팔다리가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럴, 순 없다.”
상태가 피폐한 것은 신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백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졌고, 윤기가 흐르던 피부는 빗겨 나갔던 세월의 여파를 한 번에 받은 듯 색이 바래 고목의 껍질처럼 쪼그라들었다.
더는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은 듯 덜덜 떨리는 두 다리로 땅을 짚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혼돈! 본좌의 충실한 충복이여! 어서 오너라! 본좌의 팔과 다리가 되어라!”
“……!”
신마는 흡성대법으로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할 수 있었다.
물론 수백 명을 흡수한다고 할지라도 조금을 버티기 힘들었으나, 혼돈 정도 되는 고수가 남아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백호! 지금 그를 죽여야 합니다!”
주호 역시 뒤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외쳤다.
만일 혼돈이 직접 적으로 나서거나, 신마에게 자신의 생명을 양도해 찰나의 틈을 벌어준다면 더는 그를 막아설 사람이 없었다.
“어서 빨리 본좌의……!”
푹─!
거의 울부짖듯이 외치던 신마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그의 가슴 정중앙을 꿰뚫고 삐죽 솟아오른 한 자루의 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