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자네!”
“몸은 괜찮은가!”
신마의 기운을 일도양단하며 등장한 주호의 모습에 현무와 하월벽이 화색을 띠며 말해왔다.
“어느 정도 회복했습니다. 제가 선두에 서겠으니 두 분께서 보조해주시지요.”
“알겠네.”
주호의 말에 깊게 고개를 끄덕인 둘은 양옆으로 나란히 늘어섰다.
바로 직전에 비해 단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천군만마를 얻은 것같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주호는 그들의 기세가 올라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애써 침중한 표정을 감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위천강이 넘겨준 마정을 흡수해 녹여내었어도 본래 마기를 충당했던 적해와 비교하자면 고작 삼 할에 불과했다.
지금은 약 반절이 조금 넘게 흡수한 정도니 다 합쳐 봐야 겨우 오 할에 다다를 터.
본래의 혼원일극신공에 한참 미치지 못하니 싸움을 길게 끌어보아야 좋은 것이 없었다.
“남은 건 우리뿐인가. 뭐, 좋다. 애초에 저들을 막아내는 것은 사신문의 역할이었으니.”
현무가 기운을 가라앉히며 의욕을 드러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하고 길었던 싸움의 종착역이 닥쳐온바. 목숨을 바친 싸움은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슈우욱─.
높이 세워진 신마의 검 끝으로 다시금 하늘이 일렁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이 일 검에 핏빛 해일을 일으켜 자신들을 쓸어내려는 것일 터.
주호가 검을 들었을 찰나, 현무가 앞으로 나서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건 내게 맡기고 문주와 청룡은 역공을 준비하게!”
쿵.
현무의 두 팔에 달린 반원 형태의 묵색 귀갑이 서로 합쳐지며 완전한 원을 그렸다.
신검과 마찬가지로 현무를 상징하는 신물임을 증명하려는 듯 귀갑은 그들의 머리를 감싸며 떨어져 내리는 해일을 막아냈다.
“…큭!”
현무의 두 다리가 비틀거리며 무릎이 꿇렸다.
앙다문 입에는 피가 토해져 나왔고, 부릅뜬 눈은 실핏줄이 터져 눈가를 타고 시뻘건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너무나도 강대한 힘에 일순간 내부가 진탕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 기어코 신마의 일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오행.”
주호와 하월벽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강대한 공격을 해온다면 필연적으로 큰 틈이 생기기 마련. 먼저 현무의 앞으로 나선 하월벽이 다시금 검을 날카롭게 벼리며 허공으로 떠올렸다.
쉬아아악!
오행의 최고 절초인 우주검.
이미 한 번 막혀버린 검이었지만, 요동치는 핏빛 해일을 찢고 신마에게까지 도달하는 길을 열기에는 충분할 터.
하월벽의 의도를 읽은 주호는 그가 만들어낸 궤적을 따라 땅을 박찼다.
‘단기 결전으로 끝낸다.’
신마에게 통하는 검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 초식밖에 없었다.
그중 최강은 나찰(羅刹). 천마 위태무와 가상의 공간에서 만들어낸 네 번째 초식이 있었으나, 완전한 혼원일극신공으로도 펼치는 것이 힘들었다.
가뜩이나 그 기운이 반 토막 난 지금은 섣불리 펼치기 저어될 따름이었다.
촤아악!
우주검의 궤적 끝.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신마의 시선과 마주쳤다.
내질러진 그의 검이 다시 회수되었을 때, 주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품지 않은 채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삼 초식 나찰(羅刹).
악불(惡佛)을 죽이는 수라의 날갯짓이 거세게도 울려 퍼졌다.
더 없이 패도적이고 이 일격으로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검이었다.
캉!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신마는 어렵지 않게 주호의 검을 막아내었다.
“…한쪽 눈으로 잘도 막아내는군.”
“확실히. 대단한 계집이다. 지난 수백 년간 무황을 제외하고는 감히 본좌에게 닿는 것조차 가능한 이가 없었거늘.”
그극─.
“그녀는 한 사람의 무인이다. 그 더러운 주둥아리로 깎아내리지 말도록.”
“하핫. 인정하는 바이다. 그래야 내 반려로 삼기에 충분할지니.”
“정신이 나간 것이군. 연신 헛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니 말이야.”
주호는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르는 눈으로 맞댄 검에 사력을 다해 힘을 주었다.
시시각각으로 기하급수적인 공력이 소모되고 있었지만, 여기서부터는 기세 싸움. 절대로 밀릴 수 없는 판국이었다.
쐐애액!
그때 보랏빛 궤적이 주호의 옆을 지나 신마에게 닥쳐갔다.
망령을 봉하는 주박의 사슬. 일 장로가 주호를 돕기 위해 뻗어온 것이었다.
“같잖은.”
일백의 고수와 함께 닥쳐와야 겨우 속박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 한 줄기의 사슬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기에 가볍게 왼손을 털어냈지만, 사슬의 궤적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기묘하게 꺾이며 손을 휘감았다.
촤르륵!
“……!”
애초에 그 목적은 왼손을 봉인하는 것. 신마가 인상을 쓰며 그것을 찢으려 할 찰나 주호의 양옆으로 두 인영이 따라붙었다.
후욱!
좌측에선 현무가 귀갑의 끝을 날카롭게 세우며 닥쳐왔고, 우측에선 사신문주 하월벽이 오행 중 화검(火劍)을 피워 올리며 기다란 궤적을 그었다.
“이쪽도 잊으면 안 되지.”
화룡점정을 찍듯 주호의 등 뒤로부터 누군가 땅을 박차고 도약해 신마의 심장을 노렸다.
사도맹주 무정검 철위령이었다.
그는 동귀어진의 살초로 검을 비틀며 반드시 신마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선보였다.
“같잖은!”
신마는 노호를 터트리며 주박의 사슬에 묶인 손으로 그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주호와 정면에서 맞서며 보인 눈부신 신위라 할 수 있는바.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붕붕붕─!
신창(神槍) 백호.
그 새하얀 날이 거센 파공성을 울리며 날카롭게 닥쳐왔다.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홍령도 위로 절정의 주작신공이 펼쳐졌고, 악비산과 천후가 신마의 빈틈을 찔러 넣었다.
머리 위의 사각에선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당천유가 오로지 신마를 일점으로 겨냥한 만천화우를 쏟아내고, 철대환은 마치 백보신권처럼 먼 거리에서 강대한 권강을 뿜어냈다.
“일식(一式).”
천마검식(天魔劍式)
일식 극마(極魔)
쉬아아아악!
주호에게 마정을 넘겨준 뒤 영약으로 겨우 몸을 추스른 위천강 역시 마기를 쥐어 짜내 절초를 펼쳤다.
오왕일마를 비롯한 고수들은 태세를 가다듬으며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싸움의 행방은 주호의 손에 달린바. 그렇기에 그 틈을 노렸고, 누가 신호하지 않았음에도 모두 목숨을 걸고 신마에게 쇄도한 것이었다.
쏴아아!
신교 측 고수를 흉내 내고 있던 쉰 가량의 목내이들이 주인의 위기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은 중원 연합 측의 진영에서 지원 온 무승들, 죽음을 불사한 백팔나한에 가로막혀 신마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저들은 우리에게 맡기시오!”
나한승 중 한 명이 비장한 얼굴로 외쳐왔다.
그렇게 중원 무림의 모든 역량과 신경이 신마에게 집중되었을 찰나, 유일하게 그와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던 주호는 분노로 일그러졌던 신마의 얼굴이 어느덧 담담하게 변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에도 같았지.”
짤막한 읊조림.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수많은 공격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신마는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았다.
“범인은 언제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저 신념이니 대의니 하는 것을 핑계 삼아 자신의 나약함을 포장하며 불나방처럼 몸을 던져오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할 뿐이었다.
혈천(血天).
하늘을 피로 물들인다. 애초에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무림인의 멸살.
피로 물든 순환을 끊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리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이미 잊어버렸다.
아니, 떠올리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나의 영혼이 수백 갈래의 조각으로 찢겨나가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이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설사 그 경지가 하늘에 닿아 있다고 한들 등선하지 못한 이상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신마가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 때문. 그는 이 수백 년 가운데 오로지 그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이곳까지 도달했다.
“너희들은 항상 어리석었다.”
눈앞의 존재를 직시하지 못하고, 세상의 그릇됨을 알아보지 못하며,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모두 죽었다.
“이 수많은 군중 가운데 그 여인만한 자가 없는 것이 아쉽구나. 너희 모두를 합쳐도 그녀보다 못하다.”
신마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으며 검을 들었다.
꺼질 듯 위태로이 일렁거리던 핏빛 불꽃이 기름을 끼얹은 듯 다시금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와 여전히 검을 맞대고 있던 주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모두 신마의 함정이었다.
그 역시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몸이 성하지 않은바. 그렇기에 최대한 자신들을 끌어들인 다음 한 번에 처리하려는 듯싶었다.
황급히 뒤를 바라보며 저들에게 물러나라 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 선을 넘어도 한참이나 넘었다.
“자신의 무지에 한탄하며 죽도록 하여라.”
쉬아아악!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류가 휘몰아쳤다.
주호는 이를 악물며 신마의 검을 놓아주지 않으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지만, 곧 폭풍에 휘말려 지반 째로 쓸려나갔다.
콰르릉─.
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반으로 쪼개진다. 인간이 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규모의 여파.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가운데 주호는 자신이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함을 깨달았다.
“…어째서?”
그 정도 공격을 정면에서 받았다.
적어도 사지가 박살나야 정상일 터인 상황.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제자들을 비롯해 다른 고수들 역시 땅에 파묻혀 있지만, 죽을 정도에 이른 이는 거의 없었다.
컥.
“……!”
직후 바로 앞에서 들려온 토악질 소리에 주호의 신경이 곤두섰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자신 앞으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던 하월벽과 현무를 볼 수 있었다.
“문주! 현무!”
둘 덕분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과연 사신문을 대표하는 고수들의 저력이라 할 수 있었기에 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그들의 발밑에 고인 기이할 정도로 많은 피의 양을 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철퍽.
현무의 신형이 피 웅덩이로 쓰러져 내렸다.
귀갑이 달려 있던 두 팔은 형태도 없이 사라진 참혹한 상태. 아무리 현무라 할지라도 내장이 다 뭉개진 여파는 견뎌내지 못했다.
“…뒤를, 부탁하네.”
하월벽의 고개가 아주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고, 이내 현무와 같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읏!”
주호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려가 하월벽의 신형을 안아 들었다.
하지만 가슴이 짓뭉개져 심장이 망가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확률은 무에 수렴했다.
“…….”
상당량의 피가 출혈로 빠져나간 탓인지 노쇠한 몸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런 가운데 주호는 저 앞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토악질 소리에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컥, 커억.”
신마는 남궁연에게 베인 눈을 부여잡고는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것이 한계를 한참 넘었다고 알려주는바. 하지만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몸을 일으키는 그의 기세는 여전히 막중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더.”
얼마나 더 사람을 죽여야 만족하겠느냐.
주호는 하월벽의 신형을 내려놓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궁연의 검을 움켜쥐었다.
핏발 선 눈에 푸른 귀화가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얼마 남지 않은 청룡신공의 기운과 마정의 마기가 합쳐지며 혼원일극신공의 운용을 극한으로 이루어내었다.
파앗-!
일 초식 일섬(一閃) 삼 연격.
땅을 박찬 그의 검이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신마의 목숨을 끊어내기 위한 필사의 초식. 신마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그것을 막아내며 피로 물든 미소를 지었다.
“감정에 휩쓸리는 것. 좋지 않은 버릇이군. 그것이 언젠가 네 발목을 잡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르지.”
“닥-쳐!!”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이 신마의 전신을 난자했다.
이전이었더라면 단 하나의 상처 없이 막아내었겠지만, 몸이 성치 않은 그로서는 잠시 호흡을 추스를 여유가 필요했다.
이 초식 유성(流星)
삼 초식 나찰(羅刹)
비장의 절초들이 다시금 아낌없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신마의 피를 흩뿌리게 할 뿐 확실한 결정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월벽과 현무, 그리고 모두가 목숨을 바쳐서 만들어준 기회다. 어떻게든 이것을 물고 늘어져 신마의 숨통을 끊어내야 했다.
“…사 초식.”
남은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전부 검 위로 집약되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초식. 하지만 그렇기에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불완전함. 주호는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쉬아아악─!
새파란 귀화가 피어오른 두 눈에 목숨을 쥐어짠 간절함이 담겼다.
동시에 검 끝이 하늘을 쪼갤 듯 휘둘러진다. 베인 궤적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염원을 담은 일격이었다.
사 초식 개벽(開闢)
핏빛 하늘을 뭉개며 닥쳐오는 막중한 기세에 신마는 가슴을 활짝 펴며 광소를 터트렸다.
“오너라! 삼백 년 전의 마지막 싸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재현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