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누굴 반려로 삼아?’
사신문의 고수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회복을 위해 운기하고 있던 주호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신마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은 발언이다. 천상천하로 고고히 유아독존 할 것 같던 그가 무슨 반려 운운한단 말인가.
하나 더 생겨버린 절대 질 수 없는 이유에 주호는 각오를 다졌다.
“…교관님.”
촌각 후, 그에게 다가오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위천강은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로 주호 주위로 다가가 호법을 서며 슬쩍 그를 불렀다.
“들리십니까, 교관님?”
“…다들 무사하느냐.”
운기를 하는 중 말을 거는 것은 주화입마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
하지만 입신지경에 오른 주호라면 그 한계에서 벗어났지 않을까 싶어 말을 건 것이었다.
그로부터 대답이 나오자 위천강은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있긴 하지만, 저희는 다 무사합니다. 다만, 다른 쪽은…….”
마검, 권마가 죽었고 신승, 검제, 백호, 매화검선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참전이 불가능해졌다.
위천강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이라고 욕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신교의 마인. 이런 곳에서 죽을 인재들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주호 역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각오했던 희생과 비교해보자면 기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고 안면을 익히고 인연을 쌓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참, 이런 소식을 전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데.”
위천강은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들며 한껏 진지해진 기색으로 물었다.
“교관님께서는 혹 천마신공을 익히셨습니까?”
“음.”
그 말에 주호는 입을 닫았다.
본래라면 완벽한 혼원일극신공의 운용으로 기운이 새어 나갈 일이 없었지만, 적해를 빼앗기면서부터 그 균형에 금이 가서 외부로 빠져나간 듯싶었다.
“익혔다.”
“어디서, 아니. 이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겠지요. 마정(魔晶)은 있으십니까?”
“…마정?”
“역시로군요. 교관님으로부터 느껴지는 신공의 마기가 날것 그대로의 느낌인지라 의심이 들었는데.”
위천강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쉰 뒤 사신문의 고수들에게 속박당한 신마를 슬쩍 바라보곤 재차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정은 신교의 후계자가 빠르게 강해질 수 있도록 당대의 교주가 넘겨주는 힘의 결정체입니다. 저 역시 물려받았지요. 신교에서 재회했을 당시 갑작스럽게 다른 이들보다 경지가 높아진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천마 위태무는 천마신공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마정의 이야기가 없던 것을 보니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마정은 계승자의 무위에 따라 그 효용 가치를 달리합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무위를 높인 뒤에 계승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 입신지경에 올라서신 교관님이 마정을 받으신다면 저보다 더 큰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위천강은 그 말 직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진짜 중요한 겁니다. 마정을 넘겨줄 수 있는 건 한 번이라 제 후계자는 못 받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넘겨주면 되지 않느냐.”
“…그렇네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위천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호는 가볍게 손을 내밀며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주거라. 내 나중에 충분한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마.”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요.”
“천마 위태무의 심득이면 충분하겠지.”
“헉!”
천마 위태무란 이름에 위천강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진짜, 진짜입니까?”
“그렇다. 본인 말로는 역대 천마 중 최강이라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구나.”
천마 위태무.
주호의 말대로 역대 천마 중 최강을 자랑하며 그 위명은 현세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신교의 후계자인 그로서는 모를 수 없는 이름. 하지만 주호는 마치 그와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러마. 너와도 깊게 관련된 것들이니.”
천마 위태무 역시 천마신공을 비롯한 모든 심득을 물려주는 것으로 그러한 조건을 내걸었다.
위천강은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아주십시오. 그런데 이거 주는 쪽은 괜찮지만, 받는 쪽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꼬박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겨우 정신을 차릴 정도였지요.”
“괜찮다.”
신마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런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도중에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비명도 안 되고요.”
“알겠다.”
사신문의 고수들이 얼마나 더 신마를 붙잡아 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 그러니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위천강과 손을 붙잡는 순간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느라 혀를 깨물어야 했다.
‘끄윽.’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었던 고통이 전신에 들이닥쳤다.
신마의 강력한 힘에 짓눌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닌바. 신교의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새삼스럽게 위천강이 대단해 보이는 주호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위천강은 굵은 땀을 흘리며 그리 외쳤다.
사실 마정을 넘겨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천마 신공끼리의 공명을 통해 길을 만들고 그 안으로 마정을 옮기면 되는 간단한 일. 문제는 주호의 천마신공이 위천강의 것보다 더 경지가 높았다는 것이었다.
슈우욱─!
“허어억!”
마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기까지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한 무언가에 위천강은 비명을 토해냈다.
탁!
황급히 손을 놓고 숨을 가다듬었지만, 그 짤막한 찰나에 절반에 달하는 마기가 흡수되었다.
“흐, 흡성….”
흡성대법이라도 익힌 것입니까.
위천강이 그리 물을 찰나,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웅웅웅─.
주호의 전신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듯 붉어진 피부 위로 불뚝 솟아오른 핏줄 위에는 마기로 보이는 시커먼 기운이 요동치며 몸 곳곳을 헤엄치고 있는바. 위천강으로선 생전 처음 보는 현상에 어찌할 도리를 찾지 못한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정(魔晶)을 획득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천마신공과 마정이 반응합니다.]
위태무 이후 천마들의 정수가 담긴 집약체인 마정이 주호의 천마신공에 녹아들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쉬아악─!
몸을 뒤덮은 짙은 마기가 한 방향을 따라 선회하며 올라간다. 그것은 곧 백회에 멈춰 서더니 특정한 형태를 만들려는 듯 응집되었다.
하지만 이내 실패하더니 그대로 주호의 백회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교관님?”
“후.”
위천강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촌각 끝에 그의 입이 열렸다.
주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바닥에 엎어지며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목을 움켜쥐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위천강은 행여나 마정의 전달이 잘못되었나 싶어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주호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건재함을 알려왔다.
“괜찮다. 다만, 예상 이상의 고통이로군.”
“비명 한번 없이 버텨내신 것이 대단한 겁니다. 저는 마혈과 아혈을 전부 점하고 난동부리지 못하도록 전신을 구속한 상태에서 진행했습니다.”
“…하하.”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신마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자신 역시 바닥을 구르며 절규를 토해냈으리라.
하지만 감히 남궁연을 자신의 반려로 삼겠다는 말을 지껄인 신마를 베어내기 위해서라도 결사의 각오로 그 고통을 감내해냈다.
“신공은 어떻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전보다 확연하게 나아진 것은 확실하다.”
본래 마정은 원활한 신공의 성장을 위한 보조의 역할이었지만, 상태창은 마정에 응집된 기운을 모조리 녹여내었다.
마치 영물의 내단과도 같은 모양새로, 단번에 단전 안에 막대한 마기가 들어찼다.
“…이것이 마정.”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소중히 가지고 계셨다가 제 후계자에게 물려주신다는 말씀.”
“걱정하지 말아라.”
이미 마정은 그의 마기에 녹아 반쯤 사라졌지만, 주호는 개의치 않았다.
천마 위태무의 심득이라면 마정만큼의 효과는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 더욱이 천마신공의 경지가 발전한다면 새로운 마정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저는 물러나 다른 이들과 함께 기회를 엿보겠습니다.”
“결정적일 때에 부탁하마.”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은 주호와 사신문 고수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후방으로 물러나 상처를 가다듬고 태세를 살피며 날카로운 눈으로 결정적일 순간을 노리는 중이었다.
“몸조심하십시오.”
“마정이 있으니까 말이지.”
“…꼭 그런 게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주호가 농을 던지자 위천강은 투덜거리며 떠나간다. 그를 보고 씩 웃어준 주호는 발치에 놓여 있던 남궁연의 검을 쥐어 들었다.
쾌검을 주로 사용하기에 일반 검보다 살짝 가벼운, 그러면서도 단단하며 기품있는 검신. 마치 주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주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크윽!”
“한계입니다!”
그 순간 사신문의 고수들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왔다.
수없이 긴 시간 동안 담금질하며 만들어낸 주박의 사슬 위로 균열이 일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조각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주, 결정을 내려야 하오!”
“문주!”
후퇴해서 정비한 뒤 이다음을 도모하던지, 아니라면 모두 결사의 각오로 몸을 던지던지.
현무와 일 장로의 부름에 사신문주 하월벽은 사슬을 놓고 두 눈을 감으며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이 한목숨 바쳐 질긴 악연을 끊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바랄 것이 없으니.”
모두가 목숨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사신문주로, 역대 사신문주들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
사신문주의 무공은 사신수와 달리 특별한 개체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행(五行).”
오행, 우주의 이치이자 만물의 상징을 어루만지는 순리.
신마가 역천의 존재라면 그야말로 순리의 상징이니.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오행의 속성이 그 검에 깃들어 완전을 이룬다. 검은 하월벽의 손을 떠나 한 줄기 빛이 되어 신마의 가슴으로 향했다.
“우주검(宇宙劍).”
극한에 다다른 이기어검.
사신문주로서 모든 것을 건 일격이었다.
하지만 기어코 제 몸을 감싼 주박의 사슬을 찢어낸 신마는 코웃음을 치며 제 검을 들어 올렸다.
“계집아이가 펼쳐낸 일 검만도 못하구나.”
선명한 핏빛 기운이 다시금 그 위로 휘몰아쳤다.
하늘에 낀 먹구름이 그 기류를 따라 뇌성을 뿜어내며 신화의 재현을 알려왔다.
저저적─!
검 끝이 떨어져 내렸을 때, 폭풍이 갈라지며 적색 해일이 들이닥쳤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재항의 현현. 사신문주 하월벽이 자신의 전부를 담아낸 우주검 역시 너무나도 허무히 검째로 소멸해버렸다.
“모두 피하거……!”
현무는 사색이 된 채 방패를 들며 소리쳤다.
신마의 힘이 강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막는다고 하여도 다른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턱 끝까지 도달한 그 여파에 현무가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쉬아아악!
잿빛 섬광이 그 중심을 자르며 폭풍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