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창궁무애검법 오의 만천검우
절세의 기재가 창안한 초식이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 재능은 분명 하늘에 닿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드높은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겠지만, 야속하게도 젊음이란 순간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어 맸다.
“연아!”
주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그 익숙한 신형에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입신지경의 고수들조차 신마가 내뿜는 이 권역의 무게에 짓눌려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찌 자신의 앞까지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만천검우의 초식이 단 촌각조차 신마의 공격을 지연시키지 못했다.
불가해의 재해. 이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무수한 폭력 가운데도 그녀는 굳건히 주호 앞을 지켰다.
‘교관님께서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어.’
검을 바로 세웠다.
가능성, 잠재력. 자신에게 내재된 것은 그러한 종류의 이름일 터.
탈각을 이루고 경지를 넘어서 찬란히 꽃 피울 경지가 머지않았음을 본인 역시 막연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남궁연은 그 미래를 모두 버렸다.
단 한 순간을 위해.
그가 일어나 몸을 추스를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해도 상관없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찰나의 번뜩임이 섬광처럼 뇌리 가운데 내려앉는다. 핏빛 해일과도 같이 밀려오는 저것을 막아내려면 어찌해야 할까.
생각해라. 끊임없이 사고하라.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가르침이다. 남궁연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로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들었다.
쉬이익─!
극한에 다다른 집중력이 한 차원 정신을 진화시킨다. 성장 따위가 아니었다. 좀 더 높은 격을 바라보는 개화(開花).
처음 그녀를 맞이한 것은 고요한 침묵 가운데 정지된 세계였다.
‘…아니.’
정지된 세계가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신마의 검이 자신에게로 닥쳐오고 있었다.
“……!”
남궁연을 바라보는 신마의 두 눈이 사뭇 커졌다. 그 역시 이곳에 발을 걸쳐 있었지만, 온전히 사고하며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녀만이 유일했다.
검신이라 불리는 주호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와 무공을 떠나 무(武)의 본질을 완성한 구도자들만이 엿볼 수 있는 신성한 성역.
남궁연은 자신이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촌각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신체 관절이 삐걱거리며 한계가 머지않았음을 호소해왔다.
단지 성역에 걸치는 것뿐이거늘 이러한 반동이다. 의지를 지닌 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한 번일 터.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필요했던 것은 한순간의 틈. 그녀는 완전한 일검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축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
첫 번째로 세상을 없앴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무너져 내린 대지, 주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고수들까지.
모든 존재가 지워지며 백색 빛으로 물든다. 적막에 적막이 더해지자 정신이 피폐해질 것만 같은 외로움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자신의 뒤로 주저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주호의 존재만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세웠다.
「버린 뒤에야 채울 수 있으리라」
신묘한 무리(武理)가 벼락처럼 뇌리를 스친다. 모든 것을 지워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손에 쥔 한 자루의 검뿐이었다.
평범한 검으론 안 된다. 휘둘러야 할 것은 흐트러짐 없는 온전한 일 검.
신마의 심장에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임은 안다. 그러니 하다못해 그의 몸에 큰 상흔을 새기자. 팔 한 짝이라도 벨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의지는 곧 마음이 투영. 검 끝을 날카롭게 벼리고자 하는 의지가 적을 베고자 하는 마음을 재단해냈다.
수단은 마련되었다.
하지만 원료가 부족했다.
자신에게 깃들어 있던 가능성과 잠재력은 이 영역에 들기 위하여 전부 바쳤다.
‘그렇다면.’
남궁연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무공. 남궁세가의 수없이 긴 역사 가운데 완성된 절기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검 위로 스며들었다.
…부족하다.
가장 많이 경험해왔고, 눈에 익숙해진 친우들의 검을 떠올렸다.
천후, 위천강, 악비산, 선우연, 당천유, 철대환.
그들이 익히고 행한 모든 무공을 조각내었다.
…부족하다.
주호.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강한 남자. 검제라 불리는 자신의 아버지조차 뛰어넘은 입신지경의 고수. 본래라면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웠겠지만, 성역에 들어선 지금은 어렵지 않았다.
…부족하다.
완전하지 않다. 검선의, 신승의, 검제의, 매화검선에, 백호의. 그 누구의 무공을 해체해 자신의 검 위에 더해도 부족했다.
‘어떻게 해야.’
방법을 갈구한다. 사고에 사고가 꼬리를 물었고, 노학자조차 탄식을 머금을 깊은 고뇌가 뇌리를 뒤덮었다.
“…….”
문득 눈앞의 광경이 들어왔다.
그 사이 신마의 검은 딱 한 치, 한 치만큼 움직여 가까워져 있었다.
거의 정지된 시간 속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신속에 가까운 빠르기라 할 수 있을 터.
무수히 많은 고수를 물리치고 주호조차 궁지에 몰아넣은 강자.
신마의 검이라면, 그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적을 베기 위해 적의 검을 훔친다. 남궁연은 뇌리를 번뜩이는 그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신마의 검은 올곧다. 마인의 종주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으며 직선적이었다.
하지만 궤적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는 그 무공을 빼앗아 왔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남궁연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으, 읏.”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못한 몸으로 그 너머의 무리를 탐한다.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희생한 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쉬아악.
두 눈에 핏물이 배어 나옴과 동시에 백회부터 그녀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을 쥔 손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그만큼 신마의 검은 높았으며 강대했다.
남궁연이 훔칠 수 있던 것은 그 일부. 하지만 이때까지 집약한 조각들과 함께 신마에게 도달할 수 있는 최소치를 달성했다.
뒤이어 성역이 그녀에게 허락한 시간이 끝을 고했다.
지워졌던 세상이 다시금 채워 넣어지고 시간의 흐름이 정상을 찾기 시작했다.
남궁연은 그 가운데 신마의 검이 휘둘러지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일 검을 휘둘렀다.
극의 백야(白夜)
성역에서 겪은 완전한 적막의 풍경을 담은 이름의 초식. 그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그녀의 검은 신마의 기운을 베어 가르며 그 위에 들이닥쳤다.
쉬아아아악─!
신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짤막한 찰나에 무슨 일이 진행된 것인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아직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무(武)의 경지. 몇백 년이란 세월을 지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무언가였다.
‘막아야…….’
본능적으로 든 경각심.
오히려 그것이 신마의 행동을 옭아맸다.
촤아악!
남궁연의 일 검은 사실상 신마의 기운을 파헤치고 그 앞까지 도달하는데 여력이 다했다.
그럼에도 그 왼쪽 눈에 자상을 입힌 것은 복합적인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다.
“……!”
일순간 한쪽 시야가 암전된 신마의 검이 기묘하게 비틀린다. 그럼에도 그 궤적은 흉포하게 남궁연을 덮치는바. 목적을 완수한 그녀는 사뭇 아쉬운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했지만, 등 뒤에서 자신의 몸을 휘감는 굵은 팔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파가가각!
주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을 펼쳐 기어코 신마의 한쪽 눈을 앗아간 남궁연의 몸을 끌어안고는 땅을 박찼다.
신묘한 보법을 펼친 것도 아닌지라 몇 발자국 떼지 못한 채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어떻게든 둘 다 신마의 공격에서 벗어나 살아있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호!”
“그 아이를 데리고 물러나게!”
신마가 상처 입은 순간을 노린 사신문주 하월벽과 현무가 전장에 난입해왔다.
그와 동시에 오로지 신마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사신문 일백의 정예가 일 장로의 지시에 따라 방진을 구성하며 그를 둘러쌌다.
“…괜찮으냐.”
“저, 잘했죠?”
주호의 품에 안긴 남궁연은 그의 옷깃을 잡고 가슴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일순간 도달했던 영역에서 쫓겨난 아쉬움, 모든 잠재력을 끌어다 쓴 끝에 비어버린 허탈감,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주호를 구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
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아귀 사이로 들어온 그녀의 머리카락은 노인의 그것처럼 전부 색이 바래져 있었다.
피부는 윤기를 잃은 채 푸석거렸고,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자신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이 부족해서.
자신이 포기하려 했기에 그녀가 큰 희생을 한 것이리라.
신마의 기운을 가르고 그 눈에 상처 입힌 검이 무엇인지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검을 완성하기 위해 그녀가 무수히 많은 것들을 포기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 교관님. 등에 상처가.”
남궁연은 그를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손에 묻어 나온 흥건한 피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었다.
힘껏 몸을 날렸지만, 전부 피해내지 못한 것인지 등에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주호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남궁연의 등을 토닥여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라.”
“이제 두 번 다시는 못해요.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지지 마세요.”
저주와 같은 속박이었다.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우희.”
“괜찮아?”
천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호의 등을 살폈다.
입신지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인간의 육신을 지닌 사람이다. 그간 축적된 충격도 적지 않을 터인데 이 정도 피를 흘리다니. 그녀는 주호에게 회복을 위한 단환을 내밀고는 황급히 지혈에 들어갔다.
“…넌, 괜찮은가.”
“보다시피.”
천우희는 붕대를 감은 목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은 신마가 주호로부터 자신의 반절을 되찾자 미련 없이 그녀를 버렸다.
그 덕분에 목이 찔린 것 이외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일단 전부 끝난 다음에 해.”
“알겠다.”
주호는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은 천우희에게 남궁연의 신형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안겨 있는 자세로,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어 하는 듯 미련이 느껴졌다.
“연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다음은 나중에.”
남궁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천우희에게 넘겨졌을 때, 곧바로 의식을 잃으며 두 눈을 감았다.
“…….”
주호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자신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한 명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
자신의 목숨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닌바. 더는 포기하지 않을 각오를 되새겼다.
촤르륵─!
그 시각, 화월벽과 현무를 비롯한 사신문의 고수들은 주호와 남궁연이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금주(禁呪)의 술법이 담긴 주박의 사슬이 일백여 명의 손에 쥐어 찰나의 허점을 드러낸 신마의 몸을 속박했다.
방진의 중심인 일 장로는 그 가운데서 봉인을 위한 술법을 완성하고자 집중한 채 주문을 외우고 있는바. 꼼짝할 수 없이 묶여버린 신마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기억을 되새겼다.
“정했노라.”
보통의 고수였다면 이미 그 몸은 수십 갈래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압력.
하지만 신마는 한쪽 눈을 잃은 상황에서도 환희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저 계집을 내 반려로 취하겠다.”
수백 년에 다다를 긴 시간의 끝.
신마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