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살려, 살려주십시오!”
“끄아아악, 몸이 내 몸이!”
신마가 혈천신교의 무리를 휩쓸며 그들의 생명을 갈취하고 있을 때, 주호는 천천히 검을 세웠다.
흡성대법이 계속될수록 신마의 기운은 커지고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빼앗은 힘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주호는 능히 그것을 벨 자신이 있었다.
“으윽!”
“언니!!!”
그때, 등 뒤로부터 귀를 찌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는 신마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주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것이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피투성이의 혼돈이 천우희를 인질로 잡은 채 그 목에 검 끝을 가져다 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놈! 이게 무슨 짓이냐!”
“무인답게 싸워라!”
정신을 차린 고수들이 그를 둘러싸며 천우희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혼돈은 오로지 주호만을 바라보며 악을 질렀다.
“신마께서는 이렇게 쓰러져선 안 된다!”
“놈!”
주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때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나서지 않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괴물들. 인질 하나 잡는 것 따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마의 영혼을 넘겨라!”
“어림없는 소리!”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신마는 여기서 죽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는 그의 앞을 막아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리라.
“…미안해.”
천우희는 창백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와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안 돼!”
천우희의 얼굴에 서린 담담한 각오를 읽어낸 주호가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피가 터지며 그 신형이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혼돈은 점혈을 풀고 억지로 혀를 씹은 그녀의 행동에 혀를 차곤 재차 혈도를 점했다.
그러곤 억지로 입을 벌려 손을 넣은 뒤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곤 혀가 말려 들어가지 않게 조치했다.
까득.
주호는 핏발 선 눈으로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혼돈에게 달려들어 그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천우희의 목을 반쯤 파고든 칼날이 눈에 박혔다.
그러나 그 한순간의 틈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탁!
“……!”
바로 뒤쪽에서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무언가에 주호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신마는 핏빛 호신강기로 그 일격을 막아내고 게걸스럽게 주호의 팔을 탐했을 따름이었다.
콰드득!
뼈가 뒤틀리며 다량의 원기(原氣)가 빠져나갔다.
문제는 단전 한 구석에서 혼원일극신공의 구결에 따라 운용되고 있던 적해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컥!”
신공이 흐트러져 내상을 입은 주호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그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신마는 악착같이 그의 진기를 흡수했고, 기어코 적해의 기운까지 빼앗아 가는 데 성공했다.
“안… 돼!”
웅웅웅!
잿빛 검강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며 신마의 몸을 타격했다.
그 탓에 신마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지만, 이미 적해의 기운은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 뒤였다.
“…으윽.”
주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뼈가 뒤틀린 팔 위로 신마의 손자국이 선명하다. 그는 뼈를 바로잡으며 경직된 얼굴로 신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뒤쪽에 있던 혼돈은 이제 가치가 없어진 천우희를 내팽개치고는 신마에게로 달려갔다.
무너진 땅의 잔해를 파헤치며 신마의 신형을 찾는 듯했지만, 이내 무언가가 바닥을 뚫고 지상으로 솟아올랐다.
촤아악!
“……!”
정체 모를 무언가에 얻어맞은 혼돈은 손쓸 도리도 없이 휩쓸려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 존재감을 생각하면 초라한 결말이었지만, 주호는 그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투둑.
잔해더미를 헤치고 신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부는 메마른 대지가 갈라지듯 균열이 일어났고, 몸 이곳저곳이 떨어져 나간 상태.
하지만 그는 두 눈을 깊게 감은 채 제자리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욱─.
바람의 농도가 달라졌다.
이때까지 있었던 싸움의 여파로 밀려났던 먹구름이 재차 하늘을 뒤덮으며 핏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마의 상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균열이 일어났던 피부는 생기를 되찾고, 손실되었던 신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되었다.
노인의 그것처럼 새하얗게 바랬던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색으로 물들어갔으니, 흡사 반로환동이라도 한 모습이었다.
슈우욱.
화룡점정으로 그의 주위에서 미쳐 날뛰던 막대한 혈기(血氣)가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장을 뒤덮었던 그 막대한 기운이 내부로 갈무리되었을 때가 돼서야 신마는 두 눈을 뜨며 깊은 어둠을 품은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었다.”
이전의 광인(狂人) 같았던 발작은 모두 사라져 흡사 지식이 깊은 학자처럼 고고한 모습이었다.
온전한 영혼을 되찾은 신마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내려 자신 앞에 선 미약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네게는 감사를 표하마.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본좌의 반절을 품고 있었던 덕분에 이리 되찾을 수 있었으니.”
“…….”
주호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린 채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상정하지 않은 경우였다.
차라리 목숨을 끊으면 끊었지, 신마에게 적해를 빼앗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설마 이리 허무히 그에게 적해를 넘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특수 시퀀스를 가동합니다.]
[개체명 「신마」의 정보를 분석.]
시야 한쪽으로 상태창의 글귀가 떠오르며 무언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여유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했다.
두둑.
뒤틀린 팔의 뼈를 다잡은 주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해의 기운이 빠져나간 탓에 막대한 공백이 생겼다. 이대로는 혼원일극신공의 제대로 된 운용을 할 수 없게 된 상황. 무언가 방법을 갈구해야 했다.
“음.”
신마는 잠시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이 신체를 구축하는 데 힘을 써서 그런지 잔여 마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있던 혈천신교의 교도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애초에 너희는 내 양식이었을 따름이다.”
쉬시식!
신마의 신형이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재차 등장한 곳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교도들의 뒤. 그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슈우욱!
“컥, 컥…….”
반항할 틈도 없었다.
마치 간식거리를 빼앗아 먹는 듯 신마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들의 힘을 흡수했다.
텅 비어 있던 기운이 점차 차올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마는 원래에 가까운 힘을 되찾아갔다.
“후.”
주호는 필사적으로 천마신공을 운용하며 적해의 빈자리를 채우려 노력했다.
적해의 기운이 전부 사라져버린 지금 청룡신공과 천마신공의 균형에는 큰 격차가 생겼다.
검 위로 잿빛 기운이 일렁거렸지만, 이전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수준. 물론 이것만으로도 중원에서 그를 대적할 고수는 없겠지만, 신마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그리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되었나.”
신마는 교도들의 힘을 흡수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 역시 전성기와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했지만, 눈앞에 닥친 벌레들을 정리하기엔 충분했다.
쐐애애액!
주호는 그에게 더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불완전한 신공의 기운을 지닌 채 몸을 날렸다.
적해를 빼앗아 갔다고 해도 다시 영혼을 규합하는 데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 그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 직후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반탄력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꾸나.”
신마는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손을 펼쳤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막대한 마기가 주위를 뒤덮는다. 적해의 기억 속에서 무황과 싸울 당시에 보았던 온전한 신마의 힘. 지반을 뚫고 핏빛 기류가 솟구친다. 그것은 이내 주호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크윽.”
숨 쉴 틈도 없는 연격.
신마는 단 한 순간의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농락하듯 주호를 몰아붙였다.
그가 끝까지 겨우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서 천마와 싸웠던 경험들 덕분이었다.
이 초식 유성(流星)
손에 쥔 검을 버릴 각오로 두 번째 초식을 발했다.
하늘 높이 올라간 검이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듯 눈부신 빛이 되어 떨어져 내린다. 이전보다 더 강렬해진 위력이었으나, 혼원일극신공이 완전치 않아 어딘가 불완전한 기색이 있었다.
“가소롭다.”
신마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런 도중 이내 팔이 덜컥 멈추며 움직이지 않던바. 그 직후 유성의 끄트머리가 신마의 뺨을 스치며 저 너머로 날아가 큰 폭발을 만들어냈다.
주르륵.
백옥 같던 피부 위로 한 줄기 실선이 새겨지며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신마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것을 매만지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영혼을 다 되찾았지만, 수백 년만의 일인지라 균열을 수복하는 데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해진 지금, 삼백여 년 전의 무황이 다시 도래하지 않는 이상 인세(人世)에 자신을 감당할 자는 없었다.
저저적─.
가볍게 내리그은 것이 개벽의 일 검이 되었다.
전장을 넘어 한참 뒤쪽에 있는 연합군의 본대까지 다다른 그것은 순식간에 수백의 목숨을 앗아가며 아비규환을 자아냈다.
재해(災害)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며 전면전을 준비하던 연합군의 무인들 역시 그 압도적인 신위에 얼어붙어 절망에 빠졌다.
“다, 다 끝났네.”
“흐으윽. 이리 죽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많은 이들이 흐느끼며 눈앞까지 닥쳐온 죽음에 좌절했다.
뒤이어 돌아가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하월벽과 현무가 전장에 합류했지만, 그들로서는 신마가 내뿜는 기파의 끄트머리조차 감당하기 힘들 따름이었다.
“주호….”
“부디 저 친구가 해내길 바랄 수밖에 없는가.”
모두 분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경직되어 있다.
강호의 운명이 한 사람의 손에 달린 상황. 정작 그 본인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신마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네놈을 끝으로 과거의 잔재와는 결별이다. 본좌가 열 새 시대에 무황과 같은 구닥다리는 들어갈 구멍이 없을 것이니.”
주호는 이를 악물고 혼원일극신공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조차 신마가 내뱉은 콧바람에 휩쓸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졌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직 청룡신공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주호는 구결을 따라 운기하며 어떻게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을 때, 문득 깨닫고 말았다.
‘난 이미 졌구나.’
승리에 대한 의문을 지닌 순간부터 패배한 것이리라.
그것을 자각하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자 신마의 검에서부터 발해진 죽음이 자신의 코앞까지 닥쳐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미안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 그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주호의 앞으로 뛰어드는 인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