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다들 괜찮겠죠?”
남궁연이 저 멀리 전장 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비동에서 출발한 지 하루째, 그들은 경이적인 속도로 안휘와 호북을 가로지르며 중원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일어나는 사천에 입성한 상태였다.
“…괜찮길 바라야겠지. 나는 믿는다. 그들은 절대 허무히 쓰러질 만큼 약하지 않다는 것을.”
얼음 골짜기를 부숴 그 안에 서린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주호는 내친김에 머리를 적시며 열을 식혔다.
아무리 입신지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할지라도 그만한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다면 몸에 부하가 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최소 열흘이 걸릴 거리를 단 하루 만에 넘어왔으니 지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주호는 품에서 몸에 활력을 불어주는 단환을 하나 꺼내 먹으며 가볍게 운기 하는 것으로 체내에 쌓인 피로를 다스렸다.
“자, 가자꾸나.”
“네.”
남궁연은 이제 제법 자연스러운 태도로 주호의 등 뒤에 업혔다.
얼음 골짜기의 물로 젖어 있던 의복은 열양지기로 말린 지 오래였으나, 주호의 젖은 몸을 본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주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퉁.
다리는 가볍게 땅을 박찼지만, 그 여파는 심상치 않았다.
눈 덮인 설산이 신음을 토해내며 그 몸을 잘게 떨었다. 주호는 거의 날아가듯 그사이를 가로지르며 전장으로 향했다.
“……!”
그러던 중 전방을 주시하던 주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 겨울 하늘의 청명함을 자랑하던 그 푸른빛 가운데 점차 시커먼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건!”
“심상치 않구나. 속도를 조금 더 올리마. 꽉 잡거라.”
가슴 속으로 불안감이 가득 차올랐다. 그렇기에 주호는 좀 더 속도를 높이며 대지를 가로질렀다.
쿠구궁!
전장을 울리는 뇌성이 이제 귓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주호의 얼굴이 굳어지는바. 이 불길하면서도 강렬한 기운은 신마가 직접 나섰다는 것이었다.
“교관님!”
“…알고 있다.”
슬슬 저 끄트머리에서 보이는 광경에 남궁연이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미친 사람처럼 큰 웃음을 토해내는 신마의 중심으로 쓰러진 이가 못해도 수십. 곳곳에 익숙한 면면이 보였기에 주호는 심장이 두려움에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
이윽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천우희 앞으로 다가간 신마의 모습이 보였다.
“주작인가. 네년은 형편없군. 볼 것도 없……!”
“네놈!”
그녀를 또다시 잃을 수 없었다.
주호는 남궁연의 몸을 내던지듯 하늘 위에 올려놓고는 눈부신 발검과 함께 하나의 유성처럼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그에게로 쇄도했다.
“…드디어 온 것이로구나.”
콰아아앙!
처음으로 신마의 신형이 뒤로 밀려 나갔다.
무너진 대지 위로 깊은 족적이 새겨진 끝에 멈춰 섰고, 맞댄 검 너머로 시선을 마주하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늦었구나. 어떠하냐. 네놈이 사랑한 이들이 모두 본좌의 검에 찢겨나갔다. 모두 네놈의 탓이다. 네놈이 무황의 무공을 제대로 계승 받지 못했기에 이때까지 그토록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 것이다.”
신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검을 다잡으며 시퍼런 불꽃이 서린 눈동자로 신마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로군. 그 원흉인 네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
가각, 가가각─.
주호는 검 위에 힘을 실었다.
이전과 달리 허무히 밀려나지도, 검째로 베어져 쓰러지지도 않을 정도로 격차를 좁혔다.
신마 역시 그것을 눈치챈 듯 살짝 경직된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무림인이다. 각자의 죽음을 각오해 이곳에 섰고, 숭고한 희생을 한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 영혼이 수백 갈래로 찢어진 상태에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간 네놈과는 다르지.”
“수준이 낮아 화도 나지 않는구나. 고작해야 이립도 채 살지 못한 아해가 무엇을 알까. 그저 같잖을 뿐이구나.”
주호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다가온 남궁연이 멍하니 있던 천우희를 수습하고 다른 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죽지는 않은 건가.’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중원 무림의 주축 고수들로부터 시작해 자신이 아끼는 지인과 오왕일마라 불리는 제자들까지 전부 이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만일 이들이 전부 죽었다면 중원 무림은 그야말로 초유의 혼란에 빠져들었을 터.
더는 혈천신교의 공세를 저지할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저들이 신경 쓰이느냐. 네놈이 온 탓에 마무리를 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죽을 이들이다.”
신경 쓰지 말고 자신과의 싸움이나 집중하라는 그 말에 주호는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지금 내 상황에서 남을 걱정하는 건 사치다.’
신마와의 승부는 그 누구도 점칠 수 없었다.
비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필패(必敗)에 가까웠지만, 경지가 극한에 다다른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모래사장의 파도처럼 부서지는 다음 경지야말로 승리의 열쇠가 될 터.
쿵!
거칠게 검을 뿌리친 주호는 혼원일극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싸움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신마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중원의 턱밑까지 칼을 들이민 저들이 쉬이 물러날 생각은 하지 않을 터.
그 이후의 상황까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일 초식.”
일 초식 일섬(一閃)
천마 위태무와의 수백, 수천 번이 넘는 대련으로 완성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게 된 주호만의 오의가 다시금 세상에 드러냈다.
“이미 한 번 본 초식은 통하지 않……!”
이미 한 번 본 초식은 통하지 않는다. 신마는 그리 말하며 검을 세웠지만, 작열하는 빛이 타오르는 잿빛 기운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를 지녔다.
쉬아아아악─!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반으로 베인 것처럼 완벽한 궤적이 그것을 나누었다.
티딕.
이마의 끄트머리로부터 새빨간 피가 흘러내린다. 영혼의 균열을 제외하고 지난 수백 년간 두 번째로 보는 피. 공교롭게도 그 첫 번째 상처를 입혔던 것과 동일인이었다.
척.
주호는 검을 세우며 왼손으로 그 끝을 잡았다.
‘타격이 있다.’
이제껏 자신을 깔보던 신마의 두 눈 위로 진지함이 깃든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재미있구나. 그렇다면.”
쿠구궁.
신마의 주위를 짓누르던 기파가 한층 더 강대해졌다.
그 몸에 서린 핏빛 기운이 맹렬하게 회전했고, 이내 검 끝을 타고 흐르며 쏘아졌다.
“혈룡천하(血龍天下).”
거대한 핏빛 용이 용 트름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 밑에 깔린 지면은 손쓸 도리도 없이 뭉개졌고, 느리면서도 빠르게 주호를 향해 닥쳐왔다.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찰나 주호는 등 뒤에 있던 이들을 떠올렸다.
“…청룡신공.”
잿빛 기운이 순식간에 청명한 푸른색으로 물들어간다. 더없이 정순한 기파가 주위로 퍼져나가며 혈룡이 뿜어낸 사이한 기운을 정화시켰다.
“청룡(靑龍)!”
신마의 혈룡과 반대되는 청룡이 솟구쳤다.
시퍼런 뇌성을 흩뿌리며 맹렬하게 앞으로 쇄도했고, 이내 주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닥쳐온 혈룡과 부딪혔다.
쿠르르릉─!
큰 폭풍이 온 듯 거센 비바람이 흩날린다. 간헐적으로 몰아치는 천둥은 번쩍이는 빛을 내며 두 용의 거센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왔다.
츠즈즈즈.
그 치열한 싸움의 결과는 공멸.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형태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점차 사그라들었다.
쉬아아악!
그 가운데 신마가 몸을 날려왔다.
천지의 모든 것을 베어 가를 듯한 태산 베기의 자세. 주호 역시 검을 검집에 수납하며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일 초식 일섬(一閃).
“또 같은 초식이 통하리라 생각하느냐!”
콰아아앙!
지상을 향해 내리꽂히는 검과 하늘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거친 반동을 뿜어내었다.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경합에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훌쩍 뒤로 물러났고, 남궁연과 천우희는 그나마 멀쩡한 이들과 함께 바닥을 구르던 부상자들을 급히 이송했다.
파각!
서로의 기운이 동수를 이룬 것인지 한 치의 밀림도 없었지만, 주호의 검 위로 균열이 일며 먼저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왔다.
“으하하하! 신검(神劍)이 없는 청룡은 반쪽짜리나 다름없다!”
신마는 이전과 같이 광소를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검신(劍神)에게 검이 없으면 무엇이겠는가. 심검이니,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이니 하는 것은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끼리 싸울 때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툭.
하지만 부러진 검을 내던진 주호는 낙심하지 않고 기수식을 취했다.
‘어차피 예상한 일.’
신검 종류가 아니라면 자신의 힘을, 상대의 공격을 몇 번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이미 각오했다.
“검 다음엔 주먹질이더냐. 어디 한 번 재롱…….”
쿠웨웩.
신마의 입으로 다시 한 번 진득한 피가 토해져 나왔다.
정상적이지 않은 영혼의 상태로 펼친 혈천(血天)의 부작용. 정신이 흔들렸던 것은 찰나에 가까운 틈이지만, 이미 주호의 초식은 완성되어 있었다.
“네놈이 핏빛 세상의 하늘이라면, 난 하늘을 부수어 없애겠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하늘을 부수는 나선의 일격이 그의 주먹 끝에서 휘몰아쳤다.
신마는 황급히 자신의 검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위태로이 일렁이는 핏빛 강기로는 그것을 온전히 막기 어려워 보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신마의 검 또한 반 토막이 났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비산하는 파편을 바라보다 자신의 지척에 다다른 주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이로써 같은 조건이 되었군.”
“…네놈이 감히!”
영혼의 반절을 되찾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영혼의 균열만 도지지 않았더라면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 눌렀을 텐데.
“천벌이다. 과거의 망령이여.”
멸천에 이은 파천(破天)의 초식이 신마의 가슴을 가격했다.
쿠구구궁─!
지축을 흔드는 충격과 함께 신마의 몸이 나가떨어진다. 뒤쪽에 있던 도철이 황급히 나아가 쓰러진 그의 신형을 받아들었다.
“교주님! 교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신마의 얼굴을 본 도철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었다.
-끄어어!
-안 돼! 싫어!
-제발, 난 죽으면 안 된단 말이다!
시시각각으로 형태가 달라지며 각기 다른 목소리로 절규를 뿜어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도철이 멍하니 있을 때, 신마의 두 손이 그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아, 아, 괜찮으십……!”
슈아아악!
기괴한 소리와 함께 도철의 움직임이 멈췄다.
피부는 순식간에 윤기를 잃고 쪼그라들었으며 그 눈동자에 서린 생기는 텅 비어버렸다.
“…끄, 어, 어.”
절정에 달한 흡성대법.
도철의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은 신마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더 많은 힘을 다오!”
쿵.
그의 신형이 혈천신마의 고수들이 응집해 있던 진영으로 쇄도했다.
그러더니 목내이, 인간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그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교주님! 교주님 저입니다!”
“아아아악!”
신마에게 내공과 피를 빼앗긴 이들의 절규가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절그럭.
주호는 그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검을 주워들었다.
이 싸움을 끝낼 때가 머지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