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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290화 (290/300)

#290화

시뻘건 한 쌍의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대한 존재감에 몸이 덜컥 얼어붙었지만, 마검은 혀를 씹으며 느려진 육신을 각성시켰다.

“놈!”

전부를 건 일생일대의 일 검.

죽더라도 팔 한 짝은 빼앗아 가리라. 마도의 정수가 마검의 검 끝으로 모여 휘몰아친다. 설사 신승의 천수관음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막아내기 힘든 막대한 마기의 응집이었다.

“어리석구나.”

신마의 눈빛으로 한기가 스쳤다.

권마는 일격에 쓰러뜨렸지만, 그 말고도 입신지경의 고수는 셋이나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쐐애액!

가볍게 내질러진 검 끝이 기류를 찢어발기며 직선으로 찔러졌다.

“마도종검(魔道宗劍)─!”

마검은 단 한 발자국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세를 받아치며 맹렬하게 자신의 최절초를 펼쳤고.

파아앗!

장렬하게 부서졌다.

마검(魔劍)을 상징하는 흑색 검신이 무참히 깨어져 나간다. 그 파편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혀 든바. 마검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가면서도 짙은 미소를 지었다.

쉬아아악!

그 양옆으로 닥쳐온 검제와 백호의 일섬이 거센 파공성을 내뿜으며 휘둘러졌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으로 보였다.

신마의 사각은 그 앞에 있던 마검과 권마를 상대하느라 완전히 무방비가 된 상태. 그렇기에 검제와 백호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슬리는구나.”

신마의 안광이 핏빛 궤적을 그린다. 마치 정지된 세상 속에서 홀로 움직이는 것이 허락된 듯한 이질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그그극!

백호의 묵창이 신마의 검에 가로막혀 샛노란 불똥을 튀어 올린다. 검제는 그 사이 둘의 품으로 파고들어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제왕검형(帝王劍形)

오의 제왕진천하(帝王震天下)

콰르르릉─!

극성에 달한 공력이 천지간에 우렁찬 뇌성을 울리며 신마의 목을 노렸다.

신마가 한 행동은 단순히 그 위로 빈손을 뻗은 것뿐. 검제 남궁한은 그 행동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터무니없는 오만이다.’

신마(神魔)라 불리니 정말로 신이라도 된 듯 착각이라도 하는 것인가.

신승이 불러낸 천수관음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인지(認知)를 벗어난 존재임을 깨달았지만, 서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임은 다름이 없는 사실. 감히 자신의 전력을 다한 제왕검형의 오의를 맨손으로 받아낼 수 있을까.

턱.

“……!”

하지만 그 직후 남궁한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제왕진천하의 강기가 넘실거리는 가운데 신마는 너무나도 태연히 검날을 잡아내고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마치 아이가 휘두른 목검을 잡아채듯 간결한 손놀림이었다.

“…이럴 수가.”

지독한 허탈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평생을 수련해온 검이거늘 이리도 손쉽게 잡혀 버리다니.

천하제일세를 자랑하는 남궁세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검제로 추앙받았던 모든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무력해진 순간이었다.

“네놈들로는 내 터럭 하나 조차 벨 수 없다.”

궤가 다르다는 가소롭다는 눈빛.

남궁한은 그것이 입술을 깨물면서도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지금이오!”

쉬아아악!

이때까지 기척을 숨기고 신마의 사각을 파고들며 거리를 좁혔던 매화검선 선청우가 신마의 등 뒤에서 몸을 날렸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천지를 뒤덮는 농밀한 매화 향기가 퍼짐과 동시에 높게 치켜세운 검이 신마의 백회를 향해 떨어졌다.

“교주님!”

혈천신교 진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부 고수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입할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필두에 있던 혼돈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림으로 그들의 행동을 일축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하지만!”

“이때까지 저들보다 드높은 명성과 무공을 지녔던 고수들과 마주하셨다. 그런 가운데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지 않으셨던 분이다.”

삼백여 년 전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었던 무황을 빼고 신마는 무패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고작 입신지경 셋의 저력으로는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조차 내기 힘들 따름이었다.

파각-!

신마의 움직임은 명쾌했다.

검에 여력을 더해 창을 맞대고 있던 백호의 가슴에 기다란 상처를 남겼고, 믿기지 않는 악력으로 남궁한의 검신을 부쉈다. 그러곤 그 반 토막 난 조각을 집어 들어 자신의 뒤를 노린 선청우에게 내던졌을 따름이었다.

퍽!

고작해야 쇠 쪼가리일 뿐이었다.

눈앞에서 당가주의 만천화우가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단 하나조차 명중을 허락하지 않은 채 막아낼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선청우다.

하지만 그는 신마가 던진 철 쪼가리를 막아내지 못해 가슴을 꿰뚫었다.

“…컥!”

신마는 선청우가 튕겨 나감과 동시에 바로 앞에 있던 남궁한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 막대한 충격에 남궁한은 눈코입 전부에서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진바. 오직 멀쩡한 백호만이 이를 악물며 창을 내질러왔다.

백호창법 오의 분광백아(分光白牙)

묵색 창끝이 쉬지 않고 신마를 찔렀다.

가슴의 상처를 지혈할 틈도 없이 진한 핏줄기가 허공에 잔뜩 흩뿌려진다. 하지만 백호는 창을 멈추지 않은 채 이를 악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분광백아를 펼쳤다.

푹!

그 노력이 통한 것인지 창끝이 신마의 몸을 파고들었다.

백호는 그대로 그의 몸을 갈가리 찢으려 했지만, 파고든 것은 몸이 아니라 팔과 몸 사이의 공간. 신마가 의도적으로 창끝을 붙잡은 것이었다.

“분광백아. 백호(白虎)인가. 사신수답게 이 아랫것들보단 조금 났구나. 허나.”

쉬아아악!

백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목격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넝마가 된 상태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끄으으.”

그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던 묵색 창은 조각조각 부서져 그 잔해만이 남아 있게 되었을 뿐. 곧 진득한 피 웅덩이 가운데 백호는 의식을 잃었다.

“으하하하하하!”

엉망이 되어버린 전장 가운데 신마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실성한 자처럼 허리까지 젖혀가며 숨을 토해냈지만, 그 앞에 선 누구도 신마를 막을 수 없었다.

“다음은 누구지? 청룡은 아직이더냐?”

신마는 쓰러진 이들을 도외시한 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패배자들은 살아 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나오지 않겠다면…….”

중원 연합의 남은 고수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다시금 솟구친 핏빛 혈류가 검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그 직후 신마의 몸이 비틀거리며 지상으로 무릎이 꺾였다.

“…컥, 커억.”

시뻘건 피가 토해져 나왔다.

도륙난 대지를 흥건히 물들일 정도로 많은 양. 아무리 그래도 그것엔 혼돈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주님.”

“…움직이지 마라!”

신마는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핏발 선 눈으로 일갈을 내질렀다.

“천하를 발아래 두는 것은 내 과업일지니. 혈천이란 이름 아래 그 누구도 움직일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지독한 광기마져 느껴졌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선명하기를 반복한다. 더불어 영혼의 균열도 위태로운 것이 톡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끊임없이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떠한가.

신마는 입가에 서린 피를 닦고 전장의 공기를 들이쉬며 큰소리로 외쳤다.

“무황도! 대비금강도! 본좌의 앞을 막아섰던 그 숱한 고수들도 이제는 스러지고 없다! 이 땅에 오롯이 선 것은 바로 본좌 하나뿐이다!”

핏줄 선 눈동자 위로 진득한 살기가 번들거린다. 그 가운데 신마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누가 감히 본좌의 앞길을 막을 것이냐.”

방금 그 광경을 보았다면.

중원을 대표하는 고수들이 합공하여도 터럭조차 상처 입히지 못하는 그 모습을 봤다면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함이 맞았다.

그저 두려움에 온몸을 떨며 날카로운 칼날이 무사히 자신을 스쳐 지나가기를 바래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지만 신마는 기어코 자신의 앞으로 나온 이들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래야 중원이지. 밟아도 밟아도 밟아도! 잡초처럼 끊이질 않는 질긴 목숨이야.”

그러니 땅을 들어내 뿌리째 없애 버리리라.

“…다들 각오를 다져. 저건 어떤 희생이 있어도 이 땅에서 쓰러뜨려야 할 존재야.”

천우희가 주작신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도맹주 무정검 철위령.

천마 위천강.

도왕 천후.

창왕 악비산.

독왕 당천유

권왕 철대환.

천공검 신창원.

그리고 그 이외의 고수들까지 그녀의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며 결사의 각오를 마쳤다.

“피를 토한 것을 보니 온전한 상태가 아닌 듯하다. 하긴 그 정도 고수들을 상대하고도 정상일 리가 없겠지.”

사도맹주 무정검 철위령은 흘깃 제 아들인 권왕 철대환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철대환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그 말을 흘려들었을 뿐이었다.

“마지막 싸움이라. 잘 하면 교관님이 오시기 전에 끝낼 수 있겠군.”

“좋든 나쁘든 말이네.”

악비산의 말에 당천유가 농을 던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천후가 피식 웃으며 홍령도의 손잡이를 다잡았다.

“자네, 웃은 것이지? 그렇지?”

“…웃지 않았네.”

“웃지 않았긴. 누굴 바보로 아는가.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감정 없는 석상인 줄로만 알았던 자네도 웃는 것을 봤으니 말일세.”

“웃는 것 정도야 나중에 실컷 보여줄 테니. 그러니 살게.”

천후 역시 농에 농으로 맞받아치며 응수한다. 좌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모두 가슴 한편에 경직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중 최소 절반은 죽는다.

아니, 혹은 전부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도 도망치는 이가 없었으며, 두려움을 표하는 이도 없었다.

“우리도 돕겠소!”

그때 후퇴한 줄로만 알았던 수십의 고수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들은 전장에 쓰러진 고수들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더니 저마다 몸을 날리며 선두에 선 신마에게로 쇄도해갔다.

“가자-!”

그 기세에 휩쓸리듯 천우희가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거의 일백에 다다르는 물결이 마치 파도처럼 거센 기세로 신마에게 닥쳐갔다.

푹.

신마는 바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러곤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만을 세우고는 그 앞으로 쭉 내리그었을 따름이었다.

“네놈들 따위에겐 검을 쓰기도 아깝구나.”

저저적─!

선두에 선 것은 입신지경의 고수들이었다.

정도, 사도, 마도 가리지 않은 채 그들은 서로를 합심해 신마가 내지른 붉은 궤적을 막고자 각자 기세를 피워올렸다.

신승, 검제, 마검, 권마, 백호, 매화검선.

여섯의 고수가 만들어준 기회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 기회를 열어야 했다.

“으아아아아!”

누구랄 것도 없는 간절한 외침.

그 가운데 핏빛 해일이 휘몰아쳤다.

“…….”

천우희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거의 최선두에서 신마의 공격을 다른 이들과 함께 감당했다.

뒤에 닥쳐오는 이들에게 활로를 열어주고자 전력을 다했고, 그대로 여파를 이기지 못한 채 찰나 동안 의식을 잃었다.

“…아.”

온몸에 심한 탈력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어코 몸을 일으켰고, 그제야 주위의 상황을 둘러볼 수 있었다.

“…….”

일순간 진한 피비린내가 훅 들어왔다.

시체, 시체, 시체, 시체.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쓸려나간 듯 그 주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륙의 파편이 잔뜩 흘려져 있다.

“아아…….”

천우희는 손끝을 떨었다.

피와 시체로 가득한 지옥.

그들은 그 누구도 신마에게 닿지 못했다.

틱.

늘러 붙은 살점에 엉겨있던 주작신도가 도신 위로 금이 가며 부러져 내렸다.

툭.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그녀의 앞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천우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새빨간 흉신악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아아아”

애초에 성립되는 싸움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쳐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한순간의 그릇된 생각으로 죽어선 안 될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주작인가. 네년은 형편없군. 볼 것도 없……!”

신마는 천우희의 경지가 아직 입신지경에 다다르지도 못한 것을 보곤 그녀의 목을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측면에서 닥쳐온 강렬한 기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온 것이로구나.”

처음으로 신마의 입가에 농밀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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