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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289화 (289/300)

#289화

전장 위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어 하늘 위를 뒤덮었다.

청명했던 그 색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지상은 점차 색조가 바래지며 음침한 기조를 내뿜었다.

그것은 후방의 불을 끄기 위해 발을 돌렸던 고수들의 이목까지 잡아끄는 불길함인바. 그들은 그 중간에 서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 당주.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음.”

누군가의 물음에 난매검 선진경은 난감한 표정을 띠었다.

주축 고수가 전부 빠져나가 있는 지금 문파가 습격을 당했다면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회군함이 옳았다.

하지만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자 가슴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불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고요한 폭풍이 코앞까지 닥쳐온 듯한 감각이었다.

“…….”

장문인 대리를 맡은 매화검선 선청우가 저곳에 남아 있었기에 후방은 청옥당 당주인 그가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주변의 굵직한 문파들 역시 비슷한 위치의 고수들이 자리한바. 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했고, 모두 선진경을 바라보며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을 때, 하늘로부터 붉은 혜성이 떨어져 내렸다.

“저건!”

“무슨 일이오!”

옛적부터 혜성의 출현은 흉조(凶兆)로 알려져 있다.

큰 전쟁 중인 지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자 동요를 하지 않을 수 없는바. 하지만 그들은 금세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쐐애애액-!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것은 혜성 따위가 아니었다.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기의 파동. 그 진원지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 서린 바람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선진경뿐만 아니라 저마다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 두 팔을 교차한 채 몸을 숙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장육부가 전부 터져나가 버릴 것만 같은 막대한 압력이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대체.”

“대체 저기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기에.”

모두 봉두난발이 된 채 혼비백산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그 가운데 선진경은 마음을 굳힌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시 전장으로 가겠소. 화산은 그깟 기습에 무너질 정도로 약하지 않소.”

“우리는…….”

후방의 고수들이 서로의 거취를 두고 고민할 때, 전장은 때아닌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후우.”

신승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히는 핏빛 일격은 그야말로 재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를 비롯해 검제, 마검 등의 고수가 나서서 충격을 해소한 끝에야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여파를 흘려낼 수 있었다.

“이게 신마라는 존재인가. 무지막지한 힘이로군.”

마검은 시뻘겋게 일어난 제 손바닥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마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신교의 교주인 천마 정도로 생각했다.

이 정도 인원이 있으면 쓰러뜨리지 못할 리가 없다. 하물며 천마와 비교되는 신승까지 있지 않은가.

항마(降魔)의 기조를 세우는 소림이라면 능히 그를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막상 그 존재를 눈앞에서 마주하니 막막한 느낌만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아미타불. 상의한 대로 본승이 먼저 나서겠소이다. 유사시에는 부탁드리겠소.”

“알겠네.”

“위험해질 것 같으면 가세하겠소.”

검제와 마검, 그리고 사신문 측 고수들과 함께 있던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입신지경의 고수들은 여럿 있었지만, 감히 신마 앞에 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그들은 혈천신교 내의 다른 고수들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저벅.

신승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두려움을 지우며 그 가운데로 나아갔다.

“…아미타불.”

신마를 눈앞에 두자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불호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몸으로 이 어찌 이리도 악랄한 기운을 품고 있는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신승은 그를 필멸해야 할 적이라 규정했다.

“소림의 중인가.”

“부족한 몸이나마 본승이 상대를 맡게 되었소.”

“같잖구나… 전부 한꺼번에 덤비라 했거늘.”

신마의 눈동자로 한 줄기 싸늘함이 깃든다. 그것을 본 신승은 더 동요하지 않고자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전력을 끌어냈다.

파아앗-!

신승의 발끝이 지상에서부터 천천히 떠올랐다.

일전 소림에서 주호와 대환단을 걸고 비무했던 승무전에서보다 더 심후한 공력이 주위를 장악하며 소림의 기상을 나타냈다.

“아미타불─.”

허공에 떠오른 그의 몸이 가부좌의 자세를 취한다. 왼손과 오른손이 가지런히 단전 중앙에 모인 좌선의 자세. 그와 동시에 신승의 뒤로 찬란한 후광이 피어오르며 거대한 천수관음의 형상이 나타났다.

“천수관음. 오랜만에 보는구나. 날 이토록 나락에 떨어뜨린 가증스러운 존재여.”

구우우웅─.

신마가 검을 다잡았을 때,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열렸다.

지상과 선계가 잠시나마 연결됨을 알리는 개벽(開闢)의 증거. 소림의 무공이 자아내는 빛과는 사뭇 다른 그 상서로운 서기에 신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릇된 망령이여.

단지 소림의 절학이 형상을 이룬 것으로 생각했던 천수관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으하, 으하하하하하!”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자 신마는 광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들고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수관음과 시선을 마주쳤다.

“대비금강(大悲金剛)이여. 어지간히도 안달이 난 모양이로구나.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손수 지상계에 현신할 줄이야.”

-이 아이가 일으킨 몸에 잠시 빌린 것뿐입니다.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선계에서 지상계로 직접 간섭을 하다니. 이제 어떻게 할 텐가. 그 수많은 눈으로 날 꿰뚫어보며, 그 수많은 팔로 내 몸을 짓누를 텐가!”

신마는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듯 두 팔을 활짝 들어올렸다.

하지만 천수관음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찌하여 스스로 계속해서 고통받기를 원하는 겁니까.

“고통?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이 몸이 스러져 영혼조차 한 조각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마는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전과 같이 붉은빛이 세상을 뒤덮으며 혜성처럼 떨어져 내린바. 하지만 천수관음은 가볍게 손을 내저은 것으로 그 모든 여력을 해소했다.

“이제는 그 같잖은 무선(武仙)을 내려보내지도 못하겠지. 이제는 알 수 있다. 삼백 년 전 무황(武皇)을 끝으로 네놈들의 인과율이 다하지 않았느냐.”

무황(武皇).

그 이름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좌중은 경악했다.

고금제일인이자 무림이 생겨난 이후 최고수로 평가받는 그가 사실은 선계에서 내려온 무선이라니.

-아니요. 그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습구나. 설마 그 작은 아이를 말하는 것이냐. 고작해야 이립도 채 되지 않은 핏덩이를?”

-무선(武仙)만이 당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로구나.”

신마는 자신의 격을 사정없이 풀어헤쳤다.

이때까지는 영혼 가운데 생긴 균열의 봉합이 완전하지 않아 자중하고 있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 중 하나인 천수관음이 지껄이는 말에 이성이 뚝 끊긴 것이었다.

구우우웅─.

새하얗던 백발이 점차 핏빛 색으로 물들어간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린 검 위로 넘실거리는 적해(赤海)가 깃들었으니, 그 기세는 가히 세상을 뒤덮을 정도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라.”

신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든다. 그는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로 고개를 들며 사나운 미소로 천수관음을 바라보았다.

“혈천(血天)의 시대가 도래했노라.”

“와─!!!”

혈천신교의 교도들이 그 말에 환호를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더러는 서로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오직 단 한 명, 혼돈만이 담담한 얼굴로 눈앞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 몸을 내려다보는 그 같잖은 목부터 떨구고 시작하자꾸나.”

탓-!

발을 박참과 동시에 신마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오른 천수관음의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상서로운 서기가 서린 눈동자와 모든 것을 집어 삼길 핏빛 적안(赤眼)이 서로 마주했다.

쉬이이익-!

천수관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려 천 개에 다다른 팔이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세상을 뒤덮을 듯 닥쳐온다. 하지만 신마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비틀었을 따름이었다.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라면 그 같잖은 인형 놀이는 그만두어라.”

서걱─!

상서로운 서기는 곧 핏빛으로 물들었다.

신마에게로 향하는 것 중 어느 궤적도 예외 없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 커다란 몸도 왼쪽 어깨서부터 사선으로 베여 반으로 쪼개졌다.

“…….”

공중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던 신승 역시 그 여파에 휩쓸렸다.

단 일격. 단 일격에 소림의 정점에 오른 무공이 파훼되자 좌중은 또 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타다닥-!

검제와 백호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앞으로 마검 역시 대지를 가로질러 그 둘이 신승을 받아낼 때까지 신마의 앞에서 대적했다.

“돕겠네.”

“고맙군.”

직전까지 도철과 사투를 벌이던 권마가 그 옆으로 섰다.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목숨을 바친다면 적어도 촌각은 벌 수 있을 터.

신마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으며 허무히 사라져가는 천수관음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서 바라보아라. 네놈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지상계가 파멸하는 모습을 말이야.”

단 한 놈도 남겨두지 않겠다.

신마는 그런 필살의 의지를 보이며 감히 자신 앞을 막아선 버러지들을 바라보았다.

“신승, 괜찮소?”

“…으음.”

천수관음이 단번에 무너지자 신승은 큰 내상을 입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다시 운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은바. 조심스럽게 다가온 천공검 신창원이 그 신형을 부축해 물러났고, 검제와 백호는 앞으로 나아가 마검과 권마 옆에 섰다.

“귀찮으니 한 번에 오도록 하여라.”

신마는 피식 웃으며 검을 까딱였다.

자신들을 눈엣가시로도 여기지 않는 그 태도에 울컥할 법도 했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한 치의 동요조차 하지 않은 채 진중한 얼굴로 서로 전음을 나눴다.

-나와 권마가 정면을 맡겠다. 검제, 백호 당신들은 측면을 공략하도록.

-알겠네.

-부탁하지.

서로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신마 앞에선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검과 권마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 신마의 정면으로부터 달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검제와 백호 역시 몸을 날렸다.

쉬아아악-!

입신지경의 고수 넷이 벌이는 합공. 지켜보던 이들은 아무리 신마라 할지라도 그것에 정면으로 견뎌내기 힘들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마는 단 한 발자국조차 물러나지 않은 채 가벼이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저저적─!

허공으로 핏빛 궤적이 새겨진다. 아무린 살기도 느껴지지 않은 공격에 마검과 권마는 피해를 감수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측면을 공격하는 검제와 백호가 움직일 수 있는 찰나의 여유를 벌 수 있다면 만족이었으니.

서걱.

“……!”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흩뿌려지는 피는 정말 예상외의 것이었다.

“권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깊이 가슴을 베인 권마가 땅을 굴렀을 때, 마검은 코앞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숨결에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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