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권마(拳魔) 진양철은 마도 태생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수십 년 전 존재했던 사도 문파 중 하나인 적호파의 출신으로 본래는 파락호와 진배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강호행을 나왔던 전대 권마의 눈에 들어 제자로 받아들여진 끝에 천마신교에 귀의한 것이었다.
그는 전대 권마에게, 천마신교에게 깊은 감사를 지녔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정잡배에 불과한 자신이 무(武)를 깨우쳐 권마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다시는 없을 행운이었다.
당장 다음날에 칼을 맞아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에서 마교의 장로까지 오르다니.
그렇기에 혈천신교가 막대한 조건을 대가로 자신들과 손을 잡자고 했을 때도 단호히 거부하려 했다.
친우인 마검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들과 대립했을 터.
하지만 신교를 위한 일이라는 말에 꼿꼿이 세웠던 목을 수그렸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고향을 엉망으로 만든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본인도 쌓인 것이 많아서 말이네.”
“다 늙은 주제에.”
도철은 조소를 흘리며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권마는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고, 둘은 곧 그 가운데서 첨예한 기세의 대립을 시작했다.
쿠우우웅─.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의 싸움은 기파의 무게부터 달랐다.
주위로 선 중원 연합의 고수들은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그 여파에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충격을 해소했다.
“말도 안 나오는군. 이게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 간의 싸움인가.”
천공검 신창원은 혀를 내두르며 가늘어진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입신지경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바. 그렇기에 그 초입과는 별로 격차가 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쿵.
둘의 주먹이 정 가운데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맞대어졌다. 그러자 또 한 번의 강렬한 기파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날카롭게 휩쓴바. 견디지 못한 이들은 자리에서 몇 걸음 물러났을 따름이었다.
“…늙은이 주제에 힘도 좋군.”
“늙은이라니. 아직 정정하네.”
권마는 그 대답과 동시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손목을 비틀었다.
꽈드득-!
그와 동시에 도철의 주먹을 감싼 기운이 깎여 나가기 시작한다. 회(回)의 묘리로 나선 강기를 만들어내 호신강기를 찢어발기려 하는 것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쪽도 전심으로 가주지.”
도철은 뻗은 주먹을 거두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권마는 틈을 주지 않고자 곧바로 땅을 박차며 그를 향해 쇄도했지만, 아쉽게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혈천(血天)”
꽈드득─.
도철의 몸으로 새하얀 증기가 흘러나오며 새빨간 핏줄이 툭툭 튀어 올라 그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눈동자까지 새빨개진 것이 마치 인간이 아닌 흉수(凶獸)를 보는 듯한 괴랄한 모습이었다.
“허어.”
도철의 몸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불길한 기운에 권마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도 마도(魔道)를 걷는 몸으로 이때까지 살면서 수없이 많은 해괴한 마공을 봐왔지만, 저처럼 괴이한 것은 처음이었다.
‘단숨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권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누울 생각은 없었다.
신교의 위신을 세운 소교주처럼 몇 명의 적을 꺾고 마도가, 신교가 아직 건재함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었다.
“흐읍─!”
허리춤으로 끌어당긴 두 주먹 끝으로 농밀한 마기가 나선을 그리며 휘몰아친다. 권마의 독문무공 나선흑탄강(螺線黑彈强)이 십성 공력으로 펼쳐진 것이었다.
쿵.
혈천을 발동한 도철은 권마의 숨을 끊기 위해 땅을 박찼다.
발걸음이 그 위에 내디뎌지는 순간 힘을 이기지 못한 대지가 무너져 내리며 무지막지한 신음을 토해내었다.
쐐애애액-!
마치 포탄이 쏘아지듯 도철의 몸이 쇄도한다. 스스로조차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을 정도. 신마가 내린 혈천은 도철에게 그 정도의 강함을 부여했다.
“으하하하하하!”
휘둘러지는 주먹의 궤적과 같이 그 웃음소리가 기다랗게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권마는 자신의 정면에서 휘둘러오는 그 공격에 담담한 표정으로 두 팔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콰아아아앙!
수십 관의 화약을 일시에 터트린 듯한 폭발이 그 주위를 뒤덮었다.
평야는 난데없는 폭풍에 휘말렸고,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일부는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해 피를 토하는 큰 내상까지 입을 정도였다.
“음!”
폭풍의 진원지.
권마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상의는 갈가리 찢어지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낸 두 팔은 너덜너덜해진바. 하지만 그의 전의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쿵.
평생을 밟아온 진각을 내디디며 일권을 내지른다. 마도를 걷는 이라고 볼 수 없는 깨끗한 정권. 그것은 마찬가지로 막대한 충격에 취해 있던 도철의 명치에 정확히 꽂혀 들었다.
“…컥!”
제일 먼저 갈비뼈가 뭉개지고 그 힘을 흘려내지 못한 내장이 줄줄이 터져나간다. 살 거죽이 뻥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타였지만, 도철은 뇌려타곤하는 것으로 여력을 흘려내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권마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구르는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혈천신교의 특정한 고수들이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지닌 것을 알고 있다.
잘린 팔이 하루 만에 다시 완벽하게 붙거나 떨어져 나간 살점을 순식간에 회복하는 기예.
하지만 속을 전부 헤집어 버린 자신의 일격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까.
툭.
권마는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노년에 든 것 같지 않은 근육질의 상체 사이로 핏줄기가 잔뜩 흘러내리지만,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확실한 살의를 담아 상대의 목숨을 끊을 준비를 마쳤다.
“…음?”
그러던 중 권마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도철 쪽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지금껏 중원의 고수들과 같이 이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혈천신교의 고수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뒤쪽으로는 비무가 진행될 때마다 여러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혈천신교 측은 처음부터 이때까지 쭉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목석처럼 그 자리에…….
“생기가 없다?”
“싸움 도중 한눈을 팔다니. 팔자가 좋아?”
“……!”
그 큰 타격을 단시간에 회복한 것인지 바로 도철이 바로 밑의 사각에서부터 기습적으로 쇄도해왔다.
권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두 팔을 교차했지만, 그의 주먹이 한 발자국 더 빨랐을 뿐이었다.
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권마의 몸이 땅을 구른다. 끝에서 겨우 충격을 수습한 것인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입가에 서린 핏줄기를 닦아내었다.
“단숨에 회복하진 못했을 테고, 역시 무리한 것이군.”
“이 정도 따윈 간지럽지도 않다.”
도철은 가슴을 부여잡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권마는 응당 눈앞에 있는 적에게 집중해야 함이 옳은 것을 아나, 그 뒤쪽에 있던 혈천신교의 고수들이 더욱 신경 쓰였다.
가슴을 스치는 이 불안감은 대체 무엇일까.
“…설마.”
“눈치채는 것도 빠르군.”
머릿속이 맹렬하게 굴러가며 하나의 답을 도출해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영락없이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함…!”
“그렇게 둘 순 없지.”
쐐애애액!
도철은 권마가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 무지막지한 연격을 날렸다.
하지만 권마는 그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 뒤로 물러나 본대에 크게 외쳤다.
“함정이다! 저들은 혈천신교에서 만든 강시다! 주축은 다른 곳에 있어!”
“…뭐?”
갑작스럽게 외쳐진 권마의 말에 중원 연합은 혼란에 빠졌다.
특히 신승과 검제는 굳은 낯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만일 사실일 경우엔 위험하오. 최소한의 방비는 해두고 왔다지만, 적의 주축 고수들이 저쪽을 습격했다면.”
“대, 대지급 연락입니다! 현재 종남 화산, 무당, 소림 등 곳곳의 문파로 다수의 적이 습격! 조속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말을 탄 파발이 도착해 그들에게 후방의 소식을 알려왔다.
중원 연합으로서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 혹시 모를 기습에 대해 대비하고,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비롯해 별동대까지 꾸려놓은 계획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매, 맹주!”
“신속히 결정해야 하오!”
“용단을 내려주시오!”
전면전을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병력을 뒤로 돌려 문파를 지킬 것인가.
비무의 중재를 하던 동창의 고수들 역시 어느 순간부터 홀연히 사라진 뒤였기에 신승은 두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신마를 막지 못한다면 문파를 지킨다 한들 가망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다급한 얼굴로 결정을 재촉하는 이의 간절함도 외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 각자 병력을 회군시키도록 하시오.”
“결정이 감사드리오!”
“후방을 정리한 뒤 곧바로 다시 합류하겠소!”
백여 명 중 일흔에 달하는 이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몇만에 달하던 본대 역시 삼분지 일 이상이 회군해 불붙은 후방을 소화하기 위해 떠났을 따름이었다.
“…초라하구나. 이것이 강호의 명운을 건 싸움이라니.”
검제 남궁한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남궁세가도 적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 역시 신승처럼 이곳에서 신마를 막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남는 것을 택했다.
“…어찌하겠소.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일시에 타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미타불. …잠깐, 저길 좀 보시오.”
신승은 불호를 읊으며 한숨을 내쉴 찰나, 이내 전장 끄트머리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에 고개를 들었다.
“…저자는.”
혈천신교의 무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부복한다. 그 가운데 새하얀 백발의 남자가 등장하는바. 살아있는 사람은 맞는 것인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왜인지 가슴이 먹먹해지며 손발이 무거워져 왔다.
“…신마. 저자가 신마요.”
“신마…….”
신승은 그 짤막한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었다.
***
“…지루하구나.”
권마가 혈천신교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을 때, 혈천신교 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태사의에 앉아 전장을 바라보던 신마가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연 것이었다.
“청룡의 소재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 안휘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할진대 그 경로는…….”
“되었다. 어차피 녀석은 이곳으로 올 터이니.”
저벅.
신마는 태사의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곁에 선 이들은 모두 부복하며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했고, 절대자는 그것들을 하등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영혼의 연결이 아직도 불안정하다.’
무황의 계승자와 마주한 순간 흔들린 영혼들은 조각조각 균열이 일어났었다.
얼마간의 시간 끝에 겨우 그것들을 다시 봉합했지만, 그때 이후로 신음을 내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마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더는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직접 일선에 나서서 모든 대업을 이 손으로 끝낼 심산이었다.
“비키도록 하여라.”
핏빛으로 물든 대군이 그 한마디에 질서 정연하게 좌우로 물러났다.
신마는 새하얀 백발을 흩날리며 그사이를 가로질렀고, 이내 전장 위에 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신 위로 붉은 광택이 깃들어 있다. 이름조차 없는, 오로지 신마만을 위해 준비된 검이었다.
“약자 주제에 이것저것 잴 필요는 없다.”
신마는 중원을 향해 선포했다.
“모두 한 번에 덤비도록 하여라. 본좌가 손수 상대해줄 터이니.”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 두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