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87화 (287/300)

#287화

복수를 천명한 것은 악비산 뿐이 아니었다.

“하하.”

폐부를 훑는 싸늘한 살기에 위천강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은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한될 일이 아니다. 크게는 강호 전체의 명운을 가르는 것이고, 작게는 자신이 천마신교의 후계로 적합한지에 대해 증명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모두 상관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적을 갈가리 찢어 그 사지를 천지에 흩뿌려야 이 머리를 터지게 할 정도로 뜨끈거리는 열을 해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그그극─.

검과 검을 맞댄 가운데 위천강은 진득한 마기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 너머의 적혈마검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가면이로군. 벌써 새로운 적혈마검을 뽑았나? 신교도 그렇게 휙휙 갈아치우진 않는데 말이야.”

“…….”

도발 어린 말에도 적혈마검은 침묵을 지켰다.

기세는 바위와 같이 단단했고, 맞댄 검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힘은 묵직했다.

“이전의 놈보다 낫구나. 아, 알진 모르겠지만.”

그극.

검이 비틀어진다. 짤막하게 만들어진 균형이 어긋났고, 위천강의 검 위로 마화(魔火)의 강기가 피어올랐다.

“네 전임자의 목을 딴 것이 바로 나다.”

무월십이검 일월(日月) 화마의 달.

마치 불꽃의 파도가 휘몰아치듯 시커먼 불꽃이 사방을 뒤덮었다.

좀 전의 백혈창귀였다면 막대한 기세에 뒷걸음질 쳤겠지만, 초장부터 암천을 발동시킨 채 전장에 난입한 적혈마검은 그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슈아아악-!

핏빛 곡선이 어지러이 펼쳐지자 화마는 그것을 집어삼키려 아가리를 쩍 벌렸다.

하지만 강한 압력에 의한 공간의 일그러짐이 진공 상태를 만들며 주위를 뒤덮은 불꽃을 전부 빨아드렸다.

캉!

위천강은 목덜미의 지척까지 이른 궤적에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격.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묵직한 충격이 손아귀를 욱신거리게 했다.

“이전의 그놈이랑은 다르다, 이 말인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며 짙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전의 백혈창귀처럼 손쉽게 당해주면 재미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분노가 해소될 때까지 그 피로 갈증을 적셔주었으면 했다.

휘릭.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위천강은 날카롭게 몸을 회전했다.

검날이 그가 선회한 궤적을 따라 첨예한 날카로움을 뿜어내는바. 적혈마검이 제 검을 들어 앞을 막자 찰나에 시뻘건 불똥이 수십 번은 튀며 듣기 싫은 소음을 뿜어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자의 검치고는 경박하기 짝이 없군.”

상처 하나 없이 그것을 막아낸 적혈마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죽거림에 피식 조소를 흘린 위천강은 검을 고쳐 잡고는 검 끝에 마기를 그러모았다.

“어디 계속 그딴 광오한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인지 볼까.”

쐐애애액!

지척에서 수십 줄기의 검강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여력을 아끼지 않은 폭풍과도 같은 공격이었으나, 위천강은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담담한 기색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간 먹은 영약으로 성 하나를 살 수 있을진대 이 정도로 버거워하면 안 되지.’

일개 마두 주제에 감히 신교의 소교주와 맞먹으려 하다니.

그 가소롭다는 눈빛에 적혈마검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좋다.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베어냄으로써 마도의 명맥을 이 손으로 끊어내겠다!”

쿵.

소극적으로 수세에 머물던 그의 기세가 반전했다.

위천강의 실력을 파악하는 건 끝났다는 듯 살벌한 마기를 피워 올리며 발을 내디뎠다.

“받아보아라.”

마기는 더 큰 마기에 집어삼켜진다. 설사 천마신교의 소교주라 할지라도 그 절대적인 법칙은 변함이 없었다.

천지의 모든 어둠이 그 가운데로 모인다. 적혈마검의 검이 마치 하늘로 솟은 기둥처럼 큰 존재감을 나타냈을 때, 위천강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적의 실력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버러지 따위가 이 몸의 목숨을 운운하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위천강은 분노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공세를 던져오던 모습을 버리곤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그의 수법도 악비산과 같았다.

가장 효율적인 한 수. 적의 전력에 자신의 전력을 부딪쳐 더 큰 힘으로 잡아먹는다. 도망칠 구석 따위는 그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았다.

천마검식 일식(一式) 극마(極魔)

경지에 오른 천마검식은 마기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대의 적혈마검과 싸웠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쳤다.

쉬아아아아악─!

허공을 뒤덮는 건 무광의 일섬.

폭발적인 힘이 모조리 하나의 선으로 압축되어 정제된 궤적을 그려내었다.

이윽고 그것이 적혈마검의 검과 맞닿았을 때, 귀결되는 결과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퍼석.

적혈마검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마기에 잡아먹혔고, 그 신체는 정확히 반절로 나뉘어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잠시간의 공백을 만들어냈다.

위천강은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눈밭을 바라보았다.

생명이란 이토록 덧없는 것이다. 이 남자는 홀로 수십 년을 살아왔을진대 그 생사의 판가름이 단 한 순간에 나질 않았는가.

애도는 하지 않았다.

끓어오른 분노도 식지 않았다.

“다음 나와.”

그렇기에 그는 검 끝을 까딱이며 혈천신교의 진영에 확고한 뜻을 내비쳤을 따름이었다.

***

“훌륭하다.”

중원 연합의 인원 중 천마신교의 교인은 고작해야 스물 남짓한 인원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숨길 수 없는바. 그 한 명 한 명이 중원에서 악명을 날리는 마두로, 공통의 적을 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이들이었다.

“훌륭하도다.”

그 가운데 천마신교의 장로원주를 맡은 마검은 굵직한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취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위천강은 그를 두고 권력욕에 취해 자신을 하수인으로 부리는 노망난 늙은이라 칭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작금 천마신교가 혈천신교에 휘둘리면서도 나름대로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로원주인 마검이 그 중심을 굳건하게 지킨 덕분이었다.

대대로 원로원주는 중립을 표방하며 교의 방향성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바. 전대 천마가 혈천신교와 손을 잡고 중원 전복의 계획을 획책할 때도 거리를 두고 태도를 고수했다.

마검은 그런 자신을 두고 밑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알고 있었다.

원로원주라는 자리를 더 비싸게 팔려 하는 배신자이니, 확실한 유력자에게 붙으려는 기회주의자이니 온갖 오명이 따라붙었다.

심지어 함께 하는 수하들조차 의문을 보일 지경이었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천마신교의 존속을 원했다.

그렇기에 혼돈이 막대한 대가를 제시하며 자신들과 손잡을 것을 권했을 때도 지지부진하게 결정을 고민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고, 강호로 나간 소교주의 행적이 노출되지 않도록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의 노력이 지금 눈앞에서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대단하시군. 교주님께서도 저 나이대에 저 경지에 오르지 못하셨거늘.”

옆에 있던 권마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마의 유일한 이해자로 짐짓 변절한 척 혈천신교와 손을 잡은 이중 첩자의 연기를 지내왔다.

그 덕분에 위천강이 천마신교를 수복한 가운데 배신의 대가를 물어 축출당할 뻔했지만, 검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막아준 덕분에 무마되었다.

“어떤가.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 사실 반신반의했다네. 과연 소교주가 천마신공을 잘 계승했을지 말이야.”

마검은 자신들이 끝까지 살아 이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천마신교가 거의 넘어간 시점에서 이때까지 자신들과 손을 잡지 않는 그를 혈천시교는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으니.

굳이 거부하는 친우를 저쪽 편에 꽂아 넣은 것이 마검이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보험이었다.

한편 훌륭하게 백혈창귀를 무찌르고 진영으로 돌아온 악비산 역시 큰 환대를 받았다.

이제 당당히 악가의 가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창왕으로서의 위엄까지 갖추었으니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졌을 따름이었다.

“…신나게 날뛰고 있군.”

하지만 그 환호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소교주인 위천강이 보이는 압도적인 신위는 악비산의 것보다 더욱 큰 충격을 가져왔으니.

“어떻게 보는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

둘 다 적을 쓰러뜨리는 시간은 비슷하게 걸렸다.

하지만 위천강은 그 뒤로 조금의 지친 기색도 없이 새로운 적을 불러내었고, 지금도 시종일관 밀어 붙이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힘들 것 같군.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짐작했지만, 역시 마교의 소교주라 이건가.”

“천후 자네는 어떤가?”

당천유가 슬쩍 고개를 돌려 담담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천후를 향했다.

일행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천후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 기대대로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백여 합까지는 밀리지 않고 동등하게 싸울 수 있겠군. 그 이후는 모르겠네.”

위천강이 천마신공을 익혔다면 그 자신 역시 뒤지지 않는 주작신공을 익혔다.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누가 승기를 거머쥘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승자 역시 멀쩡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크악!”

그 직후 전장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적혈마검 이후 당당히 나선 마두가 이전과 같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져 내린 것이었다.

이걸로 두 명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공검 신창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다 쓰러뜨릴 셈인가. 내가 나설 차례는 없겠군.”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혈천신교의 고수들이 자리한 곳을 살폈다.

여기까지는 초절정에 달한 고수들 간의 싸움. 하지만 진정한 승패의 결과는 입신지경에 다다른 절대 강자 간의 힘겨루기에 따라 갈릴 것이었다.

서걱-!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가를 스친다. 혈천신교의 네 번째, 그리고 위천강으로부터 비롯된 세 번째 희생양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와아아아-!

서로 걷는 길은 달라도 중원 연합의 고수들은 위천강의 분전을 진심으로 환호했다.

뒤쪽에서 나중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신승과 검제를 비롯한 입신지경 역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옅은 기대감을 드러내었다.

반면 혈천신교의 진영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하기만 했다.

자신들이 내보낸 고수가 전부 썰려가고 있으니 침울해하거나 무거운 분위기여야 정상일 터인데 처음과 같이 아무런 변화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도철.”

“쯧, 귀찮게.”

그 가운데 느긋한 태도로 앉아 있던 혼돈이 입을 열자, 뒤쪽에 있던 더벅머리의 남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평범한 사람보다 주먹이 두 배는 더 큰 것을 보니 권법을 주로 사용하는 고수인바. 그의 정체는 사흉수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도철(屠綴)이었다.

그는 일전에 나섰던 혈천신교의 고수들처럼 힘차게 나서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면서 가볍게 움켜쥔 주먹을 들어 위천강을 향해 내질렀을 뿐이었다.

“…윽!”

막, 상대를 쓰러뜨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위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위압감.

인간으로서 한계를 넘어서 감히 신(神)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이름이 붙여진 경지의 고수.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앞을 가렸지만, 막대한 힘이 그 위를 강타했다.

지금껏 압도적인 신위를 보이며 파죽지세로 적들을 쓰러뜨렸던 그의 신형이 속절없이 밀려났고, 신교의 보물이라 칭할 만한 검 위로 균열이 생겨났다.

“애송아. 까부는 것도 정도껏 봐가면서 하는 거다. 덕분에 내가 귀찮아지지 않았느냐.”

“……!”

위천강은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자신의 코앞에 다다른 한 남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명백한 입신지경의 고수.

승부를 포기하고 물러나야 함이 옳지만,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자존심이 그의 발목을 옭아맸다.

“객기가 담긴 용기는 만용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망설임이 네 운명을 갈랐구나.”

귀찮음이 가득 담긴 주먹이 다시금 내질러진다. 위천강은 찰나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끼고 천마검식의 최절초를 펼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홀연히 다가와 도철의 손목을 붙잡았다.

“허허, 이번엔 이 늙은이와 놀지 않겠느냐.”

천마신교의 거두.

권마(拳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