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둥 둥 둥─.
허허벌판 위로 북소리가 균열하게 울려 퍼졌다.
약속의 날이 도래함에 따라 혈천신교와 중원 연합이 각각 일백의 고수를 선출해 얼마간 거리를 두며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바글바글하군. 핏빛 바다가 일렁인다면 저런 것일까.”
당천유가 질린다는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작 일백 명으로 뭐 그리 엄살을 피우냐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시선은 혈천신교 일백의 고수 너머 조금 더 뒤쪽으로 향해 있었다.
족히 칠 만에 다다르는 대군이 저 멀리 진을 치고 있었다. 말로는 차륜전을 희망했으나, 수틀리면 밀고 들어오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기에 중원 연합 역시 이 뒤로 자신들의 본대를 가져온 상태였다.
“역시 교관님은 늦으시는가.”
“남궁 소저가 갔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네. 그리고 무려 스무 명이 싸우는 것인데 반나절 안에 끝날 리는 없지 않은가. 자네는 자네 걱정이나 하세.”
당천유는 우뚝 선 악비산의 등을 두드리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이제 고작 스물두 살이 된 그들이다. 강호의 명운을 짊어진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였지만, 악비산은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잘 보고 있게. 내 적들의 사지를 찢어발길 터이니.”
그는 신창을 부여잡으며 날카로운 얼굴로 투지를 벼렸다.
휘릭.
그때 두 진영의 사이로 몇 명의 인원이 난입한다. 모두 같은 복장인 이들로, 오늘 진행될 차륜전을 중재하기 위해 황실에서 나온 동창의 고수들이었다.
“무림의 갈등이 깊어진 것에 대해 황제 폐하께서는 심히 유감을 표시하는 바요. 부디 오늘 이 자리에서 해결해 더 큰 피해가 일어나는 일 없이 원만하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외다.”
“…말은 잘하네.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놈들이.”
당천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식적으로 중원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터줏대감인 자신들을 밀어주어야 함이 옳지 않은가.
대체 얼마를 받아 처먹었길래 저 세외에서 올라온 사이한 종교 집단의 존재까지 용납해주는가.
“어쩌겠나. 저들은 말을 저렇게 했지만, 내심 둘 다 큰 피해를 보길 원할 걸세. 그래야 입맛대로 휘두르기 편하니.”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구만.”
둥 둥 둥─.
다시금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동창의 고수는 양측을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규칙은 설명해주었던 것과 같네. 비무는 서로 승패를 인정할 때까지. 전투 불능이 되거나 사망 시에는 패배로 간주하겠네. 또, 중간에 난입할 시에는 이전 인원을 패배 처리하고 난입한 인원으로 싸움을 이어 나가도록 하지. 모쪼록 공정한 비무가 되길 바라네.”
동창의 고수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각 진영의 첫 번째 선봉장을 내보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타닷.
혈천신교의 진영 내에서 한 인영이 솟구쳐 벌판으로 내려섰다.
코 위를 가리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괴한으로, 혈천신교의 칠혈성 중 하나인 백혈창귀였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무운을 비네.”
중원 연합 역시 차륜전에 출진할 순서는 대략적으로 정해놓은바. 악비산이 그리 말하자 검제 남궁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쿵.
지축을 울리는 광음과 함께 악비산이 백혈창귀의 앞으로 내려섰다.
둘의 기세는 호각, 덩치도, 쓰는 창의 길이도, 분위기도 닮은 것이 마치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악가의 가주, 악비산이다.”
“창왕(槍王)인가. 이거 또 거창한 이름이 상대로 나왔군. 본인은 백혈창귀라 한다.”
“알고 있다. 혈천신교의 칠혈성 중 한 명이라지.”
악비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창을 움켜쥐었다.
혈천신교의 전부가 선우연의 원수였지만, 그중에서도 칠혈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위천강이 알려준 바로 선우연을 죽인 것이 바로 그 수장인 적혈마검이라 하지 않았는가.
악비산은 오늘 별호에 혈(血)이 들어가는 놈을 모조리 쳐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나는 혈천신교의 교도이지만, 한 명의 무인으로서 고수와 겨루는 것을 좋아한다네. 그렇기에 평소였다면 느긋하게 비무를 즐겼겠지만, 아쉽게도 높으신 분들이 지켜봐서 말이야.”
“기꺼운 이야기군. 난 네놈들의 사지를 전부 찢어버릴 것이다.”
잡담은 여기까지라는 의미로 악비산은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창사(槍士)의 간극은 검사의 그것보다 훨씬 길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찔러 들어오는 날 끝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날카로운바. 경지에 오른 고수들의 싸움이 그렇듯 대게 단 한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흡!”
악비산은 날카롭게 창을 내질렀다.
저들은 암천(暗天)이라는 기묘한 수법을 쓰는 것으로 원래의 몇 배나 되는 힘을 손에 얻었다.
물론 제 살을 깎아 먹는 역천의 수법. 당장은 그것을 발동할 틈도 주지 않고 휘몰아칠 생각이었다.
쐐애액-!
시작은 완성에 이른 악가의 절기들이었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그 날카로움과 정밀도가 얼마 전에 타계한 전대 가주보다 낫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움을 표했다.
“창왕, 창왕 하더니. 대단하군. 저 나이에 벌써 전대 가주를 뛰어넘었어.”
“가히 악가를 대표할 고수라 할법하군. 솔직히 검제와 신승의 인선에 의문을 품었는데 말이야.”
신창의 궤적이 허공에 어지러이 그려지며 마치 빼곡한 면을 그려내는 듯했다.
종래에는 더 피할 곳이 없을 정도. 파죽지세로 밀려 나갔던 백혈귀창은 가면 안쪽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거칠게 창대를 휘어잡았지만, 악비산은 물러나지 않은 채 오히려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쾅! 콰아앙!
빗나간 창끝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커다란 구덩이가 파인다. 어찌나 강렬한 힘이 담겼는지 흩날린 파편들이 멀찍이 물러나 있는 고수들에게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호언장담한 것치고는 실력이 별로인데.”
아직 서로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지만, 얼핏 보기엔 우열이 명확했다.
악비산이 그것을 꼬집자 백혈귀창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을 토해냈다.
“기고만장하는 것도 여기까지…….”
“누가 그럴 틈을 준다고 했었나.”
후욱─!
백혈귀창이 암천을 발동하기도 전 신창의 창대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초식도 뭣도 아닌 단순한 종 베기. 하지만 그 위에 담긴 막대한 힘에 창을 쥔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큭.”
아래에서 그 공격을 막는 중인 백혈귀창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 암천을 발동하는 것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상대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암천을 알고 있는 것인가.’
창왕(槍王) 악비산.
신교의 정보로는 산동악가의 가주이면서도 백호의 무공을 이어받았다고 추정되는 계승자였다.
이쪽과도 몇 번 교전 경험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정보는 파악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바. 하지만 암천의 존재 여부까지 알고 있을 줄은 가늠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백혈귀창은 눈앞에 있는 악비산보다 무분별하게 전력을 노출한 채로 죽은 다른 칠혈성들이 원망스러웠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후폭풍이 더 커지지만.”
“……!”
콰아악-!
창을 맞대고 있던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암천이 발동되었다.
곧 백혈귀창의 온몸의 핏줄을 타고 시커먼 흑색의 마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틈은 주지 않았을 터인데.”
“그래, 틈은 주지 않았지. 하지만 암천을 발동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더는 신창을 막는 그 팔이 떨리지 않았다.
핏줄을 타고 퍼진 마기가 순식간에 피부를 검게 물들인다. 백혈귀창은 맞대고 있던 창 너머로 짙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캉-!
힘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몸을 옥죄고 있던 족쇄를 푼 사람처럼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를 보이는 백혈귀창은 거칠게 창을 휘둘러 자신을 찍어 누르던 신창을 튕겨냈다.
“일단 가볍게 가볼까.”
쉬시시식─!
귀창의 끝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나한 자신의 전력을 실은 것과 같은 위력을 지닌바. 하지만 이미 상정한 상황이었기에 악비산은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창을 바꿔 잡았다.
“여력을 두고 있는 것이 너 혼자만일 줄 알았느냐.”
여유를 두지 않고 백혈귀창을 몰아쳤던 것은 무리한 상황에서의 암천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생명을 갉아먹는 역천의 수법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한바. 악비산은 그사이 최대한 때려 박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의 자멸을 노렸다.
백호창법 금각쇄(金角碎)
붕붕붕붕─!
창대가 원을 그리며 거칠게 회전한다. 상대의 살을 깎아 먹는 거친 수법.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주위의 시야를 가렸다.
“같잖은 수를!”
백혈창귀는 어깨를 당긴 것으로 한계까지 창끝에 힘을 실었다.
창대를 손안에서 회전시켜 원을 그리다니 그만큼 비효율적인 것도 없는바. 단숨에 일점을 꿰뚫어 창을 부수고 그 심장을 찢어발길 작정이었다.
카가가가가각─!
일점을 찌른 창끝과 맹렬하게 회전하는 창대가 서로 불똥을 튀어 올리며 한 치의 밀림 없는 대결을 펼쳤다.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쳐 갈려 나가고 종래엔 서로의 창만이 맨살을 드러낸바. 백혈창귀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악비산이 손에 쥔 창은 백호의 이름을 딴 신창(神槍). 주호의 것이었던 신검(神劍) 청룡과 맞먹는 절세의 병기였다.
파각.
“……!”
창대에 생긴 균열에 백혈창귀의 두 눈이 경악에 잠겼다.
서로의 실력은 호각. 하지만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황급히 창을 회수하며 이격을 노리려 했지만, 어느덧 회전을 멈춘 악비산의 창이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꿰뚫었다.
퍽!
하얀 가면을 쓴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진 채 튀어 올랐다.
핏줄기를 뿌리며 얼마간 허공을 선회하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툭툭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가 멈춰 섰을 따름이었다.
쿵.
머리를 잃은 몸이 한 박자 늦게 쓰러져 내린다. 악비산은 그제야 가슴 가득히 들어찼던 긴장을 풀며 힘껏 내질렀던 신창을 회수했다.
콱-!
꽉 쥔 주먹이 허공 위에 들렸다.
상처 하나 없는 압도적인 승리. 악비산은 산동악가의 차기 가주로서의 능력을 입증해냈을 뿐만 아니라, 창왕(槍王)이라는 별호가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수백, 아니 수만의 군중 가운데 증명했다.
“…적혈.”
혈천신교의 고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싸움을 감상하고 있던 혼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예.”
“저 녀석의 목을 가져와라.”
“존명.”
콰아악!
신임 적혈마검의 온몸이 암천의 기운으로 물든다. 혼돈의 명을 받은 그가 가볍게 땅을 박차자 한달음에 걸음이 좁혀지며 악비산의 지척까지 이르렀다.
“……!”
승리의 여운에 취해 있던 악비산이 그 살기를 눈치챈 것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던바. 두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창을 들었지만,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캉!
거친 고성이 좌중에 울려 퍼진다. 악비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익숙한 등을 보며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천강.”
“물러나게. 검객은 검객이 마주해야 맞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군.”
위천강의 말에 씩 웃은 악비산은 미련 없는 태도로 물러났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