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85화 (285/300)

#285화

“후우…….”

남궁연은 천천히 비동 안으로 나아갔다.

뻥 뚫린 입구 때문에 찬바람이 휘몰아쳐 내부의 온도를 떨어뜨린다. 중간중간 막힌 부분도 있어 다시 검을 휘둘러 토사를 파냈고, 얼마간 더 들어간 끝에 벽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똑.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며 적막한 비동 안으로 균일한 솜을 냈다.

이 안에 자신과 저 끄트머리에 있을 주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남궁연의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타닥.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차피 외길이었기에 방향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바. 이윽고 그녀는 비동의 끝, 무황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재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교관님?”

입구에 선 남궁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주호를 불렀다.

원래면 벽에 층층히 박혀 있는 야명주가 내부를 밝혔을 터이지만, 어째서인지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내공으로 안력을 좀 더 돋우자 그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던 주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관님!”

남궁연은 환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머지않아 등골을 스치는 이질적인 기운에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

머리는 산발이었고 수염은 덥수룩하기 그지없다. 의복은 여전히 깨끗했지만, 그 몸만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온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츠즈즈즈-.

주호의 손에 쥐어진 검을 따라 옅은 기운이 일어나 어둠 가운데 푸른 궤적을 그려냈다.

그 직후 남궁연이 검을 뽑아 든 것은 정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캉!

샛노란 불똥이 튀어 오르며 검과 검이 마주했다. 남궁연은 크게 뜬 눈으로 코앞까지 닥쳐온 주호를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교관님! 저예요!”

“…….”

하지만 주호는 묵묵부답이었다.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주화입마에 든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것인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이런.”

검 위에 깃든 기운이 점차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종래엔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의 강기가 휘몰아치며 그녀에게로 닥쳐왔다.

어둠 속에서 둘은 쉴 새 없이 검을 나눴다.

남궁연은 어떻게든 그에게 다가가 정신을 일깨우려 했지만, 한 치의 접근조차 허락지 않는 주호의 공세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자꾸 이러면……!”

여기까지 오는 것으로도 인내심이 한계가 도달한 남궁연의 두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뺨이라도 때려서 정신을 일깨우리라.

파아앗-!

창궁무애검법의 유려한 궤적이 허공에 어지러이 수놓아진다. 어찌나 절묘한 기의 운용인지 강대한 두 기운이 부딪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내에는 아무런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

남궁연이 강한 힘을 발할수록 주호가 내뿜는 기운 역시 점차 강해졌다.

딱히 무공이랄 것은 없었다. 그저 막고 공격하기의 반복. 원래 경지는 주호 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지만, 남궁연 역시 그러한 공격에 당할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캉!

남궁연의 검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얼핏 보면 상대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채 검을 놓친 것처럼 보였지만,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내 유도한 것이었다.

쐐애액-!

주호의 검 끝이 심장을 노려왔다.

남궁연은 그 공격을 노린 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전과는 사뭇 다른 벼락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다 읽었어!’

주호가 내는 힘의 수위가 자신의 실력에 맞춰 내는 것쯤은 그녀 역시 이미 파악했다.

그러니 기습적으로 수위를 올려 공격한다면 먹히지 않을까.

“…….”

주호 역시 곧바로 반응했다.

찔러 들어가던 검을 끌어당겨 가슴을 두드려오는 남궁연의 손을 막아냈다.

그 탓에 검을 놓치며 큰 허점을 드러낸바. 동시에 남궁연의 손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정신 차리…흡!”

탁.

왼팔의 팔꿈치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막아낸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몸을 비틀어 오히려 역으로 상대의 영역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쐐애액-!

코끝을 스치는 각법에 남궁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칫 잘못했더라면 그대로 얼굴이 뭉개질 뻔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고 둘은 하나가 되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박투를 벌였다.

쿵.

이윽고 남궁연의 등이 바닥에 닿았을 때, 주호는 그 몸 위에 올라탔다.

‘안, 돼!’

몸을 잡혔다.

두 손으로 새파란 기운이 서리는 것을 보니 곧 무자비한 정타가 쏟아져 내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남궁연은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채 얼굴을 가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연아.”

“…교관님?”

그립고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그녀는 천천히 팔을 풀며 위를 올려다보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호를 볼 수 있었다.

“흑.”

남궁연은 돌연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며칠간 비동을 수색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환대도 못 받고 얻어맞기까지 하다니.

주호는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주었다. 그러곤 무어라 말하려 할 찰나, 자신의 품에 매달리는 따뜻한 온기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훌쩍이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주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되었느냐.”

“진정은 됐는데 떨어지기 싫어요.”

“얼마간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가 날 것이다.”

“안나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궁연은 주호의 품에 안겨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갑자기 절 왜 공격하신 거예요? 주화입마나 심마에 걸리신 줄 알았어요.”

“음.”

주호는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 역시 슬슬 나갈 때가 되었다 느껴 천마와 고별전을 치르던 와중이었다.

끝끝내 새로운 초식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대충 얼개는 잡은바. 심상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에 있었기에 상태창이 비어버린 몸을 지키기 위해 자동 방어 기제를 발동시킨 듯했다.

“심상 가운데 수련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연이 너를 적으로 생각하고 몸이 움직인 듯싶구나.”

하지만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어려웠기에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는 것으로 오해를 풀었다.

“그러면 이 수염이랑 머리카락도?”

“그런 듯하구나.”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과 현실의 시간에는 차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있던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리카락과 수염이 수북해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지금에 와선 귀찮아서 정리하지 않았던 것이 그녀에게 볼품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기르신 것도 괜찮으신데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다.”

남궁연의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혹을 넘어서면 모를까,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수염을 기를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남궁연의 등을 쓰다듬어주어 구속에서 해방되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찾아온 것을 보니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싶구나.”

“네. 혈천신교에서 차륜전을 제안했어요.”

“차륜전.”

주호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녀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은 총 스물. 각 진영에서 몇 명씩 차출해서 나가기로 했어요.”

“…신마는 신승께서 상대하신다고 하셨고?”

“네.”

주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승은 강했다.

분명 검제나 매화검선보단 윗줄의 고수. 어쩌면 위천강의 부친인 천마보다 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로도 신마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은 추론이나 예상 따위가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나는…….’

주호는 주억거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동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하자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용케도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할 수 있었다.

입신지경의 경지인 화경에서도 직전의 九성을 뛰어넘어 十성에 다다른 상태. 강호에 있는 숫한 고수들 사이에서도 그 너머에 있는 경지에 오른 고수를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신마가 그 너머에 있는 고수라면.

처음 만났을 당시 상태창은 그의 경지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화경보다 더 높은 경지일 가능성이 클 터.

“앞으로 사흘 뒤에 시작돼요. 지금 당장 서두른다고 해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준비를 좀 하마.”

주호는 재단 뒤에 있는 골방으로 들어가 몸을 정돈했다.

수북했던 수염을 깔끔히 잘라내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 역시 단정히 정돈했다.

마지막으로 챙겨온 여벌의 무복으로 갈아입자 건장한 풍채의 귀공자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젊은 고수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요.”

“이쪽이 더 나은 것 같으냐.”

“전도 괜찮은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 드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재단에 여전히 우두커니 가부좌를 틀고 있던 무황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남궁연이 그 옆으로 다가와 슬쩍 손을 잡아 왔다.

“…교관님께는 스승님 되시는 존재시죠?”

“그렇지.”

“뿌듯하시겠네요. 먼 시간을 뛰어넘은 제자가 강호의 검신(劍神)이 되었으니.”

“아직 멀었다.”

그가 자신의 무공을 후대에 남긴 것은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신마(神魔)라는 재해를 대비해서였다.

그것까지 막아서고 나서야 비로소 무황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터.

“가자.”

주호는 남궁연과 손을 잡은 채 비동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남궁연이 비동 안으로 들어갔던 사이 밖은 다시 함박눈이 내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새로이 길을 뚫었고, 이전처럼 절벽을 무너뜨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놓았다.

“다시는 이곳을 올 일이 없길 바라야지.”

“왜요. 검신의 일대기 중에 가장 중요한 장소잖아요. 나중에 자식들한테도 보여줘야죠.”

자식 이야기에 주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거늘 벌써 그쪽의 이야기까지 하는가.

“아가씨-!”

그러던 중 산새를 돌아다니던 기척 중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주호는 혈천신교의 무인인 줄 알고 단숨에 목을 쳐내려 했지만, 남자가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것을 보곤 손을 내렸다.

“아가씨 말도 없이 어딜 가셨었습니까.”

“아,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그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간밤에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아십니까. 아가씨께서 고수인 건 알지만, 이 산은…….”

남궁세가의 무인은 그제야 그녀 옆에 서 있던 주호를 발견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네. 검신 대협이세요. 저는 이분을 모시러 온 거고요.”

“허어.”

“사람들을 물리도록 하세요. 고생하셨어요. 시일이 바빠 모두에게 인사하지 못하고 가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께 도움이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두 기뻐할 겁니다.”

곧 남궁세가의 무인이 동료들을 인솔해 산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주호는 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짓을 했군. 이 추위에 산을 뒤지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터인데.”

“방금 들으셨잖아요?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 기뻐할 거라는 걸.”

“하하하.”

주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남궁연 앞에 천천히 몸을 숙이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업히거라.”

“…네?”

“사태가 급박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간을 맞추려면 널 떼어놓고 갈 수밖에 없다.”

“으음…….”

남궁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 등에 업혔다.

그의 말대로 시일을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물론, 천우희에겐 살짝 미안해졌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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