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혈천신교는 연합군이 차륜전을 받아들이겠다고 회신함과 동시에 밀고 들어오던 공세를 멈췄다.
그 덕분에 연합군 진영은 오랜만에 갖는 휴식에 다들 취해있다. 당천유 역시 바쁜 일정을 끝내고 병영으로 돌아와 오래간만의 여유를 즐기는 와중이었다.
“차륜전이라.”
연합에선 신승, 검제 남궁한, 매화검성 선청우, 그리고 천공검 신창원과 자신의 친우인 악비산이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오왕일마라 불리긴 하지만, 참가자의 면면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었다.
다른 연합의 고수들 가운데 명성이 더 뛰어난 이도 있었고, 실력이 더 뛰어난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악비산이 참가자로 꼽힌 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 악가의 가주로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도 고생이 참 많군.”
당천유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비산과는 어릴 적부터 붙어 지내왔기에 속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가문이라면 치를 떠는 이거늘 억지로 가주를 맡게 되었다니. 자신이었더라면 다 때려치우고 악가의 성씨를 갈아치웠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 천후 자넨가.”
“돌아왔는가.”
병영을 거닐던 중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한창 수련을 끝내고 온 것인지 땀에 흠뻑 젖은 천후였다. 그는 당천유의 부름에 반가운 기색을 띠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수련 중이었는가.”
“스승님께서 이번 차륜전에 참여하게 되셔서 말이네.”
“자네도 고생이 많군.”
사신문. 그곳의 고수인 백호와 주작이 출진한다고 들었다.
백호 양인철은 입신지경의 고수로 악비산의 스승이 되는 인물, 주작 천우희는 주호의 연인이자 천후의 스승이 되었다.
“참. 비산 그 친구 어디 있는지 아는가? 악가 진영에는 없던데.”
“동서쪽 산맥에서 수련하고 있을 걸세.”
“동서쪽. 고맙네.”
당천유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나중에 보자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렵게 구했는데 조용히 한 잔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낮부터 친우를 찾는 목적은 바로 품 안에 들어 있는 술 한 병이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러오느라 이제껏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무림의 명운을 가르는 차륜전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을 터인데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더 흥분에 차 있으려나.”
원체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였으니 지금 상황을 더 반기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였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후가 알려준 방향을 향해 나아갔을 따름이었다.
쿵. 쿵.
발밑으로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울림을 보아하니 제대로 찾아온 듯싶었다.
얼마간 그렇게 더 앞으로 나아가니 사내 한 명이 거칠게 백색 창을 휘두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
높이 뻗어 있는 절벽으로 수백 개는 될 법한 구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찌나 거친 흔적인지 일순간 그 광경에 압도되어 발걸음이 멈췄을 정도. 새삼 그와 자신의 격차가 이렇게까지 벌어졌나 싶을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
“…천유.”
“잘하고 있나 찾아왔네. 가볍게 한 병 어떤가.”
당천유가 품에서 꺼낸 술 한 병을 가볍게 흔들자 악비산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풀어헤친 웃통 사이로 땀투성이의 근육이 요동친다. 그 위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는 그간 넘어왔던 사선의 격렬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왜, 내 몸이 부러운가.”
당천유의 시선을 느낀 악비산이 제 가슴 근육을 꿀렁이며 물었다.
“그렇게 무식할 정도로 큰 근육이 무에 부럽다고.”
“자네처럼 비실대는 것보단 낫지. 이 기회에 어떤가. 내 악가창법의 비전이라면 흔쾌히 전수해줄 의향이 있는데.”
“됐네. 당가의 절기를 익히는 것으로도 벅차 죽겠어.”
“…어르신께서는 괜찮으신가.”
악비산이 조심스레 묻자 당천유는 널찍한 바위에 털썩 걸터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정정하시네. 팔 한쪽 잃은 걸로는 그 혈기를 막지 못하는 모양이야.”
“다행이로군.”
“그보다 자네가 문제이지 않은가. 원하지도 않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쪼르륵.
잔 두 개에 맑은 술이 담겼다.
악비산은 당천유 앞에 마주 앉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네. 제일 걸림돌이 될 이들은 벌써 죽어서 땅의 거름이 되었으니.”
차디찬 말이었다.
악가의 가주 및 주력 고수들 대다수가 사천에서 명을 달리한바. 하지만 악비산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악가의 명성이 주는 아집에 취해 썩어 있던 놈들이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아. 아직 구석에 처박혀 있는 늙은이들이 있긴 하지만, 수저들 힘도 없는 노인네들이 무엇을 하겠나. 전쟁이 끝날 때쯤엔 나와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없겠지.”
술잔을 잡으며 고개를 든 악비산의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자네나 나나 서로 피곤하게 되었군. 어서 드세.”
당천유는 술잔을 들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화끈한 열기가 한겨울의 추위를 씻은 듯이 날려주었다.
“크으, 명주라고 하더니 좋군. 한 병이면 충분할 거라고 하더니 정말이야.”
“…….”
악비산은 잠자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일렁임 하나 없는 그 표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나 싶더니 이내 팔을 휘둘러 그것을 바닥 위로 흩뿌렸다.
촤아악!
얼어붙은 땅 위로 뿌려진 술이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알딸딸한 기분에 취해있던 당천유는 그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얼굴로 친우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는가!”
혹시 기분이라도 상한 것일까.
자신은 나름대로 그를 배려해 찾아온 것이거늘. 하지만 그 표정을 보니 괜한 오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 잔은 그에게 바쳤네.”
“…….”
선우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떠나간 친우를 떠올리자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으며 입안으로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겨우 눈을 돌리고 있었거늘 악비산의 한 마디로 인해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뇌리 가운데 선명히 떠올랐다.
쪼르륵.
악비산은 술병을 잡고 비어버린 잔을 채웠다. 그러곤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고, 두 눈을 감으며 잔을 비워냈다.
“천유. 난 말이네.”
당천유는 본능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며 말하려 했지만,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매번 후회가 드네. 선우연 그 친구 말고 내가 남았어야 했다고 말이야.”
“…비산.”
“그래.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
선우연은 멀쩡한 척했지만, 일행 중 그 누구보다 피폐해진 상태였다.
홀로 남겨지게 된다면 그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명백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들은 기어이 그의 상냥함에 등을 맡긴 채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말하지. 내가 차륜전의 인원으로 나서게 된 것은 악가의 가주이자, 세가 연합의 위상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꽈아악.
술잔을 내려놓은 악비산은 옆에 기대놓았던 신창(神槍)을 쥐었다.
그 커다란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강한 힘이 담긴다. 곧이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한 점을 향해 창끝을 내질렀다.
쐐애애애액-!
엄동설한의 바람을 거스르며 막대한 기파가 일어나 절벽을 때렸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는 세찬 바람에 의해 순식간에 쓸려나간바. 뒤이어 나타난 참상에 당천유는 입을 크게 벌렸다.
“허어.”
어찌나 강한 힘이었는지 절벽 일부가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악비산은 가볍게 창을 거두며 선명한 의지가 서린 눈동자로 당천유를 바라보았다.
“전부 틀렸네. 이건 피의 복수지.”
친우의 목숨을 앗아간 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설사 극적으로 화평이 맺어져 휴전이 타결된다고 하더라도 자신 혼자서라도 그 복수를 하리라 맹세한바. 창대의 끝으로 바닥을 찍은 악비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남은 술은 그것을 전부 끝낸 뒤에 마시겠네.”
그는 이번 차륜전에 자신의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
“아가씨. 날이 찹니다. 뒤의 수색은 저희가 할 터이니 들어가서 몸 좀 녹이시지요.”
“…….”
남궁연은 어두운 얼굴로 산세를 둘러보았다.
차륜전이 사흘 전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정말 그를 찾아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며칠째 세가의 인원을 할애해 비동의 입구를 찾아 나섰음에도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수고해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숙소에 되돌아왔다.
비동 입구로 다다르는 길목의 표시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눈 덮인 설산은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들었고, 종래엔 이렇게 헤매는 처지가 되었다.
“큰소리친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네.”
창가에 기댄 그녀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얼마 후 강호의 명운을 건 싸움이 시작된다. 세가의 가주인 자신의 부친 역시 그 일원으로 참여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바. 그녀는 부디 결과가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말, 제가 이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데 어디에 계시는 건가요.”
사방에 남궁 세가의 무인들을 풀어놓았다.
만일 그가 비동에서 나왔다면 이쪽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을 터.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기 위해 근처에 있는 마을로 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런 소식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여전히 비동 안에서 폐관 수련 중인 것으로 보였다.
탁.
수하의 조언대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던 남궁연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밖으로 나섰다.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산을 올랐다.
앙상한 나뭇가지, 수북이 쌓인 눈.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싸늘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기에 끊임없이 내공을 운용하며 앞으로 나아갔을 따름이었다.
“…진짜로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
적막한 산세 가운데 홀로 있자니 왜인지 모를 쓸쓸함이 감돌았다. 괜히 감정이 복받치며 눈가가 촉촉해졌고, 당장이라도 주호를 보고 싶어졌을 따름이었다.
“어……?”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어느 나무의 잘려나간 밑동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뒤덮여 있어 헷갈렸지만, 비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가빠지는 숨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되새겼고, 과거의 편린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갔다.
“아.”
절벽.
얼어붙은 산세가 보였다.
잊을 수 없는 형태였다. 주호는 단지 손목을 가볍게 비트는 것으로 그것을 통째로 뜯어내지 않았던가.
스릉.
남궁연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도 그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리해야만 했다. 여력을 아끼지 않은 채 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청명한 검강이 불쑥 솟아오르며 깊은 산세의 적막을 깨부쉈다.
“만천검우.”
창궁무애검법 오의 만천검우
밤하늘을 뒤덮으며 강기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무수한 칼날이 얼어붙은 절벽을 난자했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알아볼 수 있는 자욱한 분진이 피어올랐다.
파스스─.
무너져 내린 절벽 일부 사이로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이 정도 여파라면 안쪽에서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터.
‘나오지 않으신다면 제가 가겠어요.’
남궁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