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한적한 막사 안.
천우희는 홀로 운기 중에 있었다.
불그스름한 머리카락 위로 솟구친 한줄기 불꽃이 일렁거리며 점차 새하얀색으로 바뀌어 간다. 이윽고 완연한 백색이 된 불꽃은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듯 녹색에 가까운 청색으로 뒤바뀌었다.
주작의 불꽃은 두 번 변한다. 주작신공을 익히는 계승자에게 진리처럼 뒤따라오는 말이었다.
그 두 번의 변화는 주작신공의 극의를 상징하는바. 천우희는 초절정의 완숙을 넘어 그 끄트머리에서 입신지경의 초입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했겠지.’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는 주호를 만났을 당시의 경지가 끝이었으리라.
병명도 제대로 판명나지 않은 지병으로 인해 몸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 주작신공의 기운, 그리고 어릴 적부터 섭취한 영약과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정신력으로 매달 찾아오는 고통을 견뎌내었다.
애써 괜찮은 척했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기도 했고,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내놓았다.
그저 긴 고통 없이 잠자듯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미련이 생겼다.
평생 남자에게 정을 주지 않을 줄 알았으나, 바람처럼 나타난 주호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항상 되뇌며 그 관계를 끊어내려 했지만, 운명이란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듯했다.
미련은 희망을 낳았고, 희망은 기대를 품게 했다.
조금만 더 그의 곁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라면 자신을 이 지옥 같은 고통 가운데서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헛된 망상임은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달콤하기 짝이 없는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자신을 구해버렸다.
대환단은 그렇다 치고 청석을 약재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절맥이 완치되었고 살아남은 끝에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환단은 어릴 적에도 먹은 전적이 있었기에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줄 알았지만, 절맥을 치료하고도 거의 삼십 년에 가까운 공력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무거운 족쇄가 풀린 몸은 날개를 단 듯 날아다녔다.
무공이 우후죽순으로 성장한 것도 당연한바. 그 단시간 안에 수많은 경지를 돌파하고 입신지경 초입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지금도 이러할진대 입신지경에 이르러 주작신공을 완성하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그 이전까지의 기록들은 많았지만, 입신지경 이후의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 주작 역시 그 벽에 가로막혀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신문의 다른 고수 중 입신지경에 도달한 이가 더 많았다. 이유인즉, 사신수의 무공은 신공절학이라 불릴 정도로 수준이 높아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니 입신지경에 오른다면 비슷한 경지의 다른 무공을 익힌 고수들보다 더 큰 효용을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주호는 규격 외였다.
“후.”
천우희는 짧게 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운기를 마쳤다.
혈천신교가 제안한 차륜전까지는 아직 시일이 제법 남아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최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마교에서 일곱, 사도맹에서 다섯, 무림맹 여섯, 그리고 우리 쪽에서 둘인가.”
도합 스물의 인원이 중원을 대표해 벌이는 싸움이다. 사신문의 출전 인원은 자신과 백호. 문주와 현무는 차륜전 이후 유사시를 대비할 예정이었다.
“…….”
자신이 있는 막사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천우희가 고개를 들었다.
곧 안쪽으로 들어온 익숙한 얼굴들에 그녀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어서 와. 비산은 축하하고.”
천후, 악비산, 남궁연, 그리고 백호까지. 모두 사신문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백호의 계승자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축하를 받은 악비산이 씩 웃었다.
그는 같은 후기지수 중 유일하게 차륜전의 인원으로 선발되었다.
무공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천후가 한 수 위인 것은 명백한 사실. 하지만 산동악가의 가주로서 그 입지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뽑힌 것이기도 했다.
문득 천우희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새하얀 신창(神槍)으로 향했다.
입신지경에 들어 무기의 한계에서 벗어난 백호가 계승자에게로 넘겨준 것이었다.
백호는 현재 자신이 소싯적에 쓰던 묵색 창인 묵호(墨虎)를 매고 있었다.
“주호 그 친구에 관해서 들어온 이야기는 있는가?”
“감감무소식이에요. 저보다는 동생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천우희의 시선에 남궁연은 짧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근방에 세가의 사람을 풀어놓았는데 별다른 소식은 아직 없네요. 마을로 나온다면 남궁의 표식을 보셨을 텐데 접촉하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그 안쪽에 계시나 봐요.”
“…시일을 맞추기는 어렵겠네.”
“그래서 제가 직접 가려고요.”
“직접?”
“네. 언니만 뵙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어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찾아오라고 했으니까요. 서두르면 하루 이틀 정도 여유는 있겠네요.”
“음.”
천우희는 살짝 머뭇거렸다.
그녀 역시 주호가 심히 보고팠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싶었으나, 차륜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그런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묘하게 여유로워졌단 말이야.’
천우희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남궁연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모습에 더욱 의혹만 짙어졌을 따름이었다.
비단 무공뿐만 아니라 언행에 대해서도 한층 더 성숙함을 보였다. 이전에는 어떻게 해야 주호가 자신을 바라보게 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하네.’
속으로 짧게 신음을 내뱉은 천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그 부분은 동생한테 부탁할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독점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
속내를 들킨 천우희의 얼굴이 순식간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일까요?”
짐짓 모르겠다는 시늉을 하며 손부채로 얼굴을 부쳐보지만, 이미 분위기는 남궁연의 쪽으로 넘어갔다.
옆에 있던 천후와 악비산, 그리고 백호는 그녀를 배려해 모르는 척 슬쩍 시선을 피해주었다.
물론 천우희는 오히려 그것이 더 창피할 따름이었다.
“대, 대련.”
“…예?”
“대련이다. 연이는 떠난다니까 어쩔 수 없고, 비산이 너는 차륜전에 나가잖아. 그러니 그전까지 감각을 곤두세워놓아야지. 그러니까 특훈이다.”
“저야 좋습니다.”
악비산은 거리낄 것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생 무인인 그에게 있어 대련은 응당 응해야 하는바. 특히 자신보다 윗선의 고수인 천우희라면 환영이었다.
그렇게 남궁연이 주호를 향해 떠난 뒤, 천후와 악비산은 연합군 병영과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얼떨결에 따라오게 된 백호는 관전자로서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백호창법은 어느 정도 되었지?”
“이제 육성을 돌파했습니다.”
“제법이네. 나보다 성취가 더 빠른 것 같은데.”
“같은 창법을 익히고 있으니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지요. 그 덕분에 빠르게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도 손대중할 필요는 없겠네.”
“바라는 바입니다.”
악비산은 신창을 손안에서 돌리며 백호신공의 기수식을 취했다.
천우희는 허공에 어지러이 흩어지는 백색 궤적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악비산과 달리 주작의 계승자인 천후는 아직 주작신도를 받지 못했다.
천우희가 현역이기도 했고, 아직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못해 무기의 수준에 크게 구애받기 때문이었다.
‘나도 입신지경에 도달하면 백호 어르신처럼 물려줘야지.’
가볍게 신도를 뽑아들고는 먼저 들어오라는 듯 끝을 까딱이자, 간격을 재고 있던 악비산이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백호창법은 백호의 이빨과 발톱에서 따온 무공. 찌른다기보단 찢는다는 표현이 걸맞은 형태였다.
“…….”
신창이 움직이는 것을 본 천우희의 눈이 빛났다.
기존 백호창법과는 궤가 다르다. 아마 악가의 비전을 합한 것일 터. 악가 창법의 요지는 신속의 찌르기. 그걸로 백호창법의 극단적인 부분을 보완한 것이리라.
‘역으로 말하자면 균형이 잡힌 만큼 날이 무뎌지고 이점이 죽었다는 것이겠지.’
쉬시시식-!
듣는 이가 절로 섬뜩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꿰뚫었음에도 천우희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선 그 자세에서 상체만을 움직여 수십 번을 찔러 들어온 창끝을 모두 완벽하게 피해냈을 뿐이었다.
‘과연.’
같은 초절정의 경지지만, 이 정도의 차이라니. 악비산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으며 창을 휘두른 손에 힘을 더했다.
가주를 비롯해 주축 고수가 대다수 사망한 악가 내부에서 이 공격을 받아낼 자가 얼마나 있을까.
남은 것은 전부 반쪽짜리 쭉정이들. 이 전쟁이 끝나면 악가는 봉문한 채 대대적으로 전력 증강에 나서야 했다.
‘내가 더 분발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오대 세가, 아니 세가 연합 말석에 이름을 올리기 힘든 수준. 그러니 창왕(槍王)의 명성을 거머쥔 자신이 몸집을 부풀려야 했다.
휘리릭.
신창의 끝이 팽그르르 돌며 회전이 가미되었다.
나선으로 공기 저항을 줄이는 수법은 악가의 비전 중 하나. 물론 그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금아.”
백호창법 비천금아(飛天金牙)
비천금아의 초식이 하늘을 찢을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악가의 비전인 나선이 가미되어 그 파괴력은 원래보다 곱절은 더 향상된바. 그와 동시에 천우희의 불꽃이 백색으로 뒤바뀌었다.
주작신공 백익(白翼) 쌍륜(雙輪)
한 쌍의 고리가 그녀의 곁에서 일어나며 맹렬하게 회전한다. 하늘을 찢어발기는 창과 하늘을 뒤덮은 한 쌍의 날개는 서로 한 치의 물러남 없이 거칠게 몸을 부딪쳤다.
쿠우우웅─!
묵직한 기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쓸려나간 먼지 가운데 악비산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천우희는 여전히 원래 자리에 서서 여유로운 태도로 신도를 내밀고 있었다.
‘완패다.’
악비산은 순순히 인정했다.
악가의 나선이 주는 회전을 백염의 쌍륜이 상쇄시켰다. 배가 되었던 그 위력은 다시 반감되었고, 그 상태에서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패의 결과는 뻔해질 따름이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뭘 배워가는 건 네 역량이지. 그래도 괜찮네, 수고했어.”
천우희 역시 악비산의 수준을 가늠했다.
전력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고수가 상대로 나와도 훌륭히 싸울 수 있을 터.
“제자야. 다음은 네 차례다.”
천우희는 신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멀뚱히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천후를 향해 말했다.
“…저는 그리 쉽게 꺾지 못하실 겁니다.”
천후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앞으로 나아갔다.
***
새로운 초식이 필요하다.
천마 위태무가 한 말은 그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원래 주호는 이곳에서 자신이 만든 삼 초식을 가다듬어 완성도를 올리려 했다.
기반이 되는 청룡검법과 검식은 이미 발군의 수준. 그렇기에 일섬(一閃), 유성(流星), 나찰(羅刹), 이 세 초식을 가다듬는다면 능히 신마와 자웅을 겨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천마신공의 검법 역시 극마, 탈마, 신마로 세 개의 초식뿐이 없지 않은가.
얼마 전 그 의견을 천마에게 말했더니 그는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예끼 놈아. 천마신공은 수없이 긴 역사 가운데 손꼽히는 천재들이 수없이 다듬고 발전시켜 만들어온 절학이다. 네 그 세 초식은 한 세대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듯싶더냐.”
“저도 세기의 천재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그러긴 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도 경지에 오르진 못할 터니. 하지만 쌓인 역사가, 깊이가 다르다.”
“…후.”
주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세 개의 초식이 만들어졌을 때는 저마다 번뜩이는 영감이 있었다.
그 심상을 기반으로 무리(武理)를 정리했고, 무공이라는 형태로 정형화를 시킨 것이 바로 초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도 이렇다 할 번뜩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죽어도 그저 죽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 뿐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천마 위태무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그를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죽음에 익숙해진 것이다. 얼핏 보면 담대해졌다고 착각할 수 있겠으나,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현실과 이곳을 구분하지 못한 채 밖에서도 그리하면 어떡할 테냐.”
“…그렇긴 하겠군요.”
여기서 얻을 것은 다 얻은 것인가. 그만 현실로 돌아가 저들과 합류해야 하나 갈등이 들었다.
‘꼴사납구나. 신마를 쓰러뜨릴 수 있게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거늘.’
확실히 무공은 늘었지만, 이렇다고 해서 신마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쯧쯧, 미련한지고.”
천마 위태무는 의욕을 잃은 채 축 늘어진 주호를 바라보곤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그저 방향만 제시해주려 했거늘, 새로운 초식을 만들란 말이 괜한 오지랖이었는 듯했다.
지금은 아직 초기지만, 저 가슴 한편에 달라붙은 심마가 커진다면 현실에서도 제법 큰 위기로 다가올 터. 보다 못한 천마 위태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툭 말을 내뱉었다.
“천마검법의 극의를 알려줄 터이니 거기 앉아보아라. 참나, 신교의 밑천이 다 털리는구나.”
천마검법의 극의.
그 말에 주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본좌가 최후에 깨우친 심득이다. 이것까지 전수해주면 네게 본좌의 영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어찌 되었든 그 앞의 경지는 너 스스로 개척해야 할 일이니. 괜히 본좌가 더 간섭한다면 그건 성장의 가능성을 줄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진심으로 주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천마 위태무를 바라보았다.
“상관없습니다. 설사 이것으로 인해 제가 더는 위를 바라볼 수 없게 된다고 하여도, 신마를 꺾을 수만 있다면 만족합니다.”
그 두 눈에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는 것을 본 천마 위태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뜻이 그러하니 잘 알겠다. 본좌가 깨달은 마지막 심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