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신승께서 신마를 맞아주시니 든든하기 짝이 없구려. 그렇다면 이제 안건은 누가 참가할 것인지에 대해서겠소.”
차륜전인 만큼 적지 않은 수가 나서서 서로 자웅을 겨룰 터.
더욱이 정, 사, 마 삼대 세력이 포함된 만큼 인원 배분에 미묘한 알력 다툼이 생길 수 있었다.
“혈천신교에서 말한 인원은 총 스물입니다. 사도맹과 천마신교의 수장들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괜히 시간을 끌 바엔 허심탄회하게 묻는 것이 나을 수 있었다. 총군사 제갈경은 직설적으로 사도맹의 맹주를 맡은 철위령과 천마신교의 교주 대리인 소교주 위천강에게 물었다.
“…본 맹에선 맹주인 본인을 비롯해 다섯이 나서겠소. 인원이 적은 점 이해해주길 바라오.”
사도맹주 무정검(無情劍) 철위령은 살짝 쓰린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사도맹의 위신을 세우려면 최소 여섯 아니, 일곱까지 인원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사도칠패의 배신 사태와 더불어 혈천신교와의 전투로 전력에 큰 손실이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자신 혼자만 출전하고 싶었다. 인원에 포함한 그 한 명 한 명이 귀한 전력이었으니 혹시라도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었다.
“본교는 소교주인 본인을 포함해 일곱이 나서겠다.”
철위령의 말이 끝나자 위천강은 두 눈을 감은 채 그리 말했다.
천마신교 역시 반란으로 인해 휘청거리긴 했지만, 마도 제일의 세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뿌리는 건재했다.
소교주 위천강, 그리고 마검과 권마를 필두로 한 장로원의 마두들이 나선다면 쓰러진 신교의 체면을 다시 드높게 세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본 연합은 본승을 포함해 다섯을 명단에 올리겠습니다.”
“여섯? 그러면 두 자리가 남을 텐데.”
“아미타불. 그 이전에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십니다.”
신승의 말과 동시에 막사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문의 문주인 하월벽, 그리고 백호 양인철과 현무 백의양 그리고 주작 천우희였다.
“아.”
막사에 있는 더러는 사신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비밀 조직이라 착각했던 이들도 있었고, 운남과 귀주 쪽에서 그들의 분투를 잊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신승의 눈짓에 그 선두에 있던 하월벽이 가볍게 포권하며 인사를 올렸다.
“사신문의 문주로 있는 하모라 합니다.”
“백호 양인철이오.”
“현무 백의양이오.”
“주작 천우희예요.”
“…음.”
장내에 있던 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사신문, 그리고 백호와 현무, 주작까지. 그 한 명 한 명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지 않는가. 더러는 그중 천우희를 제외하고 나머지 셋이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임을 깨닫고는 경악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신문이라. 들어본 적 있소. 내 조부께서 당시 천마신교와 다툼이 있을 때 중재로 나선 신비 조직이라 했었지.”
“신비 조직?”
“하나의 문파지만 그 전력은 구파 중 두 곳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하였소. 그때는 본인을 놀리려 말한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존재했을 줄은.”
공동의 장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내뱉자 다른 이들 역시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승이 소개하고 공동의 장문인까지 말을 보탠 상황. 그렇다면 정말로 그들은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미타불. 맞는 말씀이오. 사신문은 고대로부터 중원을 암중으로 수호하는 조직. 구파 중 소식이 끊긴 곳은 있으나, 소림과는 예부터 간간이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소.”
“무당도 마찬가지요.”
“청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산도요.”
미리 말을 맞춘 각 문파의 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 덕분에 사신문의 고수들이 차륜전에 참가할 명분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 네 분 중 두 분께서?”
“그렇소. 백호인 본인과 주작인 그녀가 나설 것이오.”
양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의문이 들었는지 살짝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보아하니 사신문이란 사신수를 표방하는 문파 같은데, 그렇다면 청룡은 누구시오? 문주인 하대협입니까?”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하월벽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질문한 고수를 바라보았다.
“아니오. 본인은 문주에 있을 뿐 사신수의 좌에 있지 않소이다.”
“그러면 청룡은……?”
“청룡은 여러분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는 이요.”
하월벽은 면면과 시선을 마주쳤다.
다들 누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운남 쪽에서 천우희와 주호가 가까운 사이였던 것을 보았던 화산의 한 고수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맞소. 검신(劍神) 대협이오. 그가 본문의 청룡의 좌를 맡고 있소이다.”
“허어. 검신이라니.”
“주대협은 점창의 계보를 잇지 않았소? 맹주의 사제인 것으로 알고 있었거늘.”
“아미타불. 그건 본승이 설명할 수 있소. 검신의 신분이 특수한 것을 생각해 맹주께서 배려해주신 것이라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적절한 처사가 아닐 수 없소.”
“역시 맹주입니다.”
“빨리 회복하셨으면 여한이 없겠소이다.”
탁.
신승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는 것으로 어수선해진 장내의 분위기를 정리했다.
“아미타불. 다들 알다시피 검신은 이전 신마와의 대결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어 요양하고 있소이다. 그의 실력을 본다면 차륜전에 응당 포함해야 함이 맞으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예비로만 편성해놓겠소. 그리해도 괜찮겠소이까.”
“그리 전달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천우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승은 속으로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의제가 끝났으니 이것으로 회의를 파하도록 하겠소. 익일 같은 시간에 다시 회의를 소집할 터이니 다른 안건이 있는 분은 본승을 찾아와주시오.”
중원 연합의 회의 이후 고수들은 각 세력의 진지를 향해 돌아갔다.
사도맹의 맹주인 무정검 철위령 역시 수하들과 함께 사도맹의 병영으로 돌아가려 했을 찰나, 저 멀리 당가의 소가주와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곤 발걸음을 멈칫했다.
“맹주?”
“…미안하네. 잠시 신승과 만나고 올 테니 자네들은 먼저 돌아가 회의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주게.”
“알겠습니다.”
수하들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연합군 병영 한가운데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는 생각과 무정검의 강함을 믿는 행동이었다.
“크흠.”
철위령은 수하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 헛기침을 한 번 내뱉는 것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남궁 소저가 교관님께 직접 향했다고 하네. 아마 아슬아슬하게 시일을 맞출 수 있을…….”
“끼어들어서 미안하네만.”
“……?”
한창 철대환과 이야기하고 있던 당천유는 갑작스럽게 자신들 사이에 난입한 이를 바라보았다.
사도맹의 복식, 그리고 이 미증유의 기운을 품은 이는 그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당가의 천유라 합니다. 사도 맹주께서 어떤 일이십니까.”
“당가의 소가주였군. 정말 미안하네만 이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는가?”
“예?”
당천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 사도맹의 맹주가 철대환에게 관심을 드러내는가. 아니, 냉정히 생각해보면 드러낼 법도 했다.
권왕(拳王)은 다른 오왕일마 중에서도 적을 둔 사문이 없다고 알려진바. 사도맹으로 들이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미안하네. 곧 돌아갈 터이니 먼저 가주겠나.”
“알겠네. 천천히 이야기들 나누세.”
당천유는 자리를 떠났다.
사도맹이라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맹주 본인이 직접 나서서 영입한다면 제법 괜찮은 자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정사의 관계를 떠나 철대환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기에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을 따름이었다.
물론, 사도맹주에게 조금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을 따름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지요.”
“알겠다.”
몇 년 만의 부자 상봉이었다.
비록 절연한 관계라 할지라도 차마 냉정하게 내칠 수 없었기에 하다못해 자리라도 옮기고자 했다.
이윽고 인적이 드문 곳에 도달했을 때, 철위령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지낸 듯해서 다행이구나. 검신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예. 운이 좋았습니다.”
“오왕일마라고. 참 잘 되었구나.”
“예.”
짤막한 대답의 연속.
철대환이 그리 말이 없는 성격이라 할지라도 명백히 의도적인 모습이었다.
철위령은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당신 탓입니다.”
당신.
자신의 말을 칼 같이 자르며 튀어나온 말이 아버지도, 다른 호칭 아닌 당신.
온전한 남을 칭하는 그 부름에 철위령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사도맹. 중요하지요. 중원에 똬리를 튼 세 세력 중 하나가 아닙니까. 턱밑에서는 사도칠패가 배신할 때를 노리며 칼날을 갈고 있고, 밖에서는 수많은 외적이 맹의 약체화를 노리고 있었지요. 이해는 합니다. 맹주이신 조부께서 그리 몸져누우시고 힘드셨겠지요. …그래도”
철대환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정체도 알지 못한 자들이 침소를 들이닥쳤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은 단숨에 쳐 죽였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어머니는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철위령은 맹의 기틀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그 사건을 쉬쉬했고, 심지어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사십구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오지 않으셨지요. 당신은 이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 죽음을 추모하며 생각한 적은 있습니까?”
빈소는 쓸쓸했다.
어머니의 친지, 자신의 지인들만이 그곳을 오갔으며 나흘이 지났을 때는 그마저도 출입이 끊겼다.
맹의 분위기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부맹주인 철위령의 지엄한 명령 때문이었다.
철대환은 홀로 사십구재(四十九齋)가 끝날 때까지 빈소를 지켰다.그리고 오십 째의 날. 아무런 미련 없이 사도맹을 떠났고,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긴 끝에 정천학관에 발걸음이 닿았을 따름이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조차, 부인과 자식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가 사도맹이란 큰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철대환은 공허한 눈으로 제 아비였던 자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이미 메말라버린 지 오래다. 어머니의 죽음 직후 그가 다시 눈물을 흘렸던 것은 친우를 떠나보낸 직후밖에 없었다.
“철씨의 성을 이은 자로서 마지막으로 기대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제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설사 그것이 맹주로서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할지라도, 아비였던 자로서 일말의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툭.
철대환은 아무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철씨의 자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철저하게 남으로 대하겠습니다.”
철위령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다 본심이 아니었노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를 옭아맨 여러 사슬이 그것을 허락지 않게 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던 것에 일절 감사하지 않습니다.”
흘깃 그런 철위령을 바라본 철대환은 과거를 얽매던 족쇄에서 풀려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