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80화 (280/300)

#280화

남궁연의 검이 싸늘한 한풍을 가르며 매섭게 휘둘러졌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시뻘건 꽃이 피어난다. 단숨에 혈천신교 고수 두 명의 목숨을 끊어낸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섬뢰대주.”

“예.”

섬뢰대주 남궁진영이 그 부름에 달려와 고개를 숙인다. 남궁연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쪽의 피해는?”

“사망자는 다섯이고, 부상은 열일곱입니다. 그중 셋을 제외하곤 운신에 지장이 없는 정도라 괜찮을 듯싶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주호가 안휘로 떠난 지 한 달째.

세간에는 회담에서 입은 상처를 요양하기 위해 잠시 물러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남궁연을 비롯한 그 측근은 그가 신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갔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혈천신교는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대로 중원을 집어삼킬 작정인 듯 지평선을 새빨간 물결로 뒤덮으며 물밀듯이 밀려왔고, 몇 번인지 모를 격전이 이어지며 겨울의 혹독함을 알려왔다.

“소가주님! 근방에 새로운 적들입니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군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남궁연은 요양 중인 남궁한의 대리로서 남궁세가를 이끌고 있었다.

근 한 달간 수많은 마두를 격살하고 큰 공을 세움으로 그녀에겐 새로운 별호가 생겼다.

아니, 남궁연뿐만이 아니었다.

주호 휘하에 있던 후기지수들은 모두 같은 분류로 묶이며 작금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가 되었다.

천마(天魔) 위천강

검왕(劍王) 남궁연

도왕(刀王) 천후

창왕(槍王) 악비산

독왕(毒王) 당천유

권왕(拳王) 철대환

중원 무림에선 오왕일마(五王一魔), 마도에선 일마오왕이라 불리며 그 강함을 칭송받았다.

검후도 아니고 검왕이다. 예전이었더라면 목표를 뛰어넘은 유명세에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주변으로 쌓여 가는 시신들 때문인지 놀라우리만큼 냉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는 삼백. 어떤 조직인지는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군요.”

남궁연 휘하 섬뢰단 이백은 섬서 전선 중 이곳에서 종남파로 넘어가는 산맥 중 하나인 가양(可樣)을 지키고 있었다.

산맥 하나에 할당된 이백이란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것이었지만, 그만큼 혈천신교의 공세가 격렬하고 연합군에게 여유가 없는 것을 의미했다.

며칠간 이곳 가양에 머무르며 격퇴한 적이 벌써 일천에 다다른다. 저들에게도 상당한 피해일진데 핏빛 군세는 끝을 모르고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거머리 같은 새끼들.”

퉤.

섬뢰단원 중 누군가 침과 함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누구 하나 그 불온한 태도를 제지하지 않았을 정도로 비슷한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준…….”

전투에 준비하라.

남궁연은 그 말을 내뱉을 찰나, 저들 사이에서 솟구치는 일부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쐐애애액!

귓가를 스치는 날카로운 파공성.

기존 무인과는 달리 몇 차원 위의 고수.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섬뢰단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쯧.’

남궁연 역시 동시에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소가주님!”

남궁진영을 비롯해 섬뢰단에서도 반응할 수 있는 고수 몇몇이 뒤따른다. 남궁연은 그들을 곁눈질하면서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쉬시시식-!

절정에 달한 창궁무애검법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그 일 검을 피해내기 힘들 정도였지만, 상대는 작정하고 온 듯 남궁연조차 무시하지 못할 고수들이 섞여 있었다.

“…이건.”

“검왕. 자네를 잡기 위해 인원을 좀 끌어모았네.”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그녀의 검을 가볍게 피해내며 두 손의 손가락을 활짝 폈다.

그 끝에 맺힌 연녹색 기운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바. 일전 당천유가 알려준 대로라면 심상치 않은 독이 서려 있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단숨에 친다.’

검 끝에 피어오른 새파란 강기가 선명한 궤적을 남겼다.

그것을 바라보던 노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기까진 계획대로다. 조금의 손해는 있겠지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독을 뿌린다면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전부 막아내기 힘들 터.

‘한 톨만 흡입해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일곱 걸음을 걸으면 죽는다는 칠보단명산보다 더 강한 극독이다. 그 즉시 칠공에서 피를 내뿜으며 사망에 이를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남궁 소저에게 수작을!”

“……!”

그러나 노인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거늘 어디서 불쑥 솟아났단 말인가.

파바바박-!

황급히 방향을 틀어 두 팔을 교차했지만, 갑작스럽게 난입한 괴한의 손이 기묘하게 구부러지며 수십 개나 되는 우모 침을 쏘아 보냈다.

“크아아악!”

의복 위로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침의 끝은 너무나도 가볍게 그것을 파훼한바. 이윽고 피부가 거무죽죽하게 변해 쓰러진 노인을 보며 당천유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손을 툭툭 털었다.

“별 같지도 않은 녀석이.”

“당 공자. 거기에 철 공자까지.”

“소저, 괜찮으시오? 이곳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지원 왔소.”

당천유의 등장과 동시에 난입한 일단의 고수들이 산세를 오르던 혈천신교의 고수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사천 당가의 정예인 독패당의 고수들이었다. 사천을 비롯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긴 그들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찬바. 손속에서 일말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쪽도 힘들 텐데.”

“뭘, 같은 오왕(五王) 아니오.”

당천유는 짐짓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작 스물하나의 나이에 왕(王)이 들어간 별호를 얻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 정도의 위세라면 전쟁이 끝날 때쯤 무너진 사천당가의 이름을 다시 굳건히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

“이쪽은 전부 끝났다.”

“수고했네. 권왕.”

“…참으로 그 이름을 좋아하는군.”

철대환은 살짝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한 것이라곤 당천유와 함께 전장을 돌아다니며 날뛴 것밖에 없거늘 그런 휘황찬란한 별호가 붙었다.

이전에는 당천유의 인맥으로 당가에 빈객이 최선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새로이 문파를 세워도 될 정도로 입지가 올라갔다.

‘사파 출신이 크게 출세했군.’

철대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을 찰나, 당천유가 남궁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혹시 교관님 소식 아는 것이 있소?”

“저도 딱히 들은 건 없어요. 오히려 다른 분들께 묻고 싶었던걸요.”

혈천신교의 공세가 거세지는 지금 언제까지 자신들이 이쪽에서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신승을 비롯한 연합군의 수뇌는 겨울이 끝날 때쯤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한바. 부디 그전까지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뭐, 어련히 나오시지 않겠소. 교관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것은 처음 보았으니.”

“…그렇겠죠.”

남궁연은 살짝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

당천유와 남궁연이 주호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을 당시, 그 본인은 초췌해진 몰골로 땅을 구르는 중이었다.

“큭.”

온몸에 깊은 자상이 가득하다. 오른팔은 형태도 없이 썰려 나갔고, 깊은 내상으로 인한 혈류가 토해져 나와 앞섬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심상의 공간인지라 현실로 돌아가면 원상태로 회복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험하게 다루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후.”

그래도 두 다리와 왼팔은 멀쩡히 달려 있기에 몸을 일으키며 검을 쥐었다.

천마 위태무는 그 앞에서 오만한 얼굴로 주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에 펼쳐져 있던 별천지 같던 정원은 이미 없다. 그저 황폐해진 대지 가운데 귀기 어린 수라만이 강림하였을 뿐이었다.

“밍기적거리지 말고 일어나거라.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제가 늘고 있긴 한 겁니까?”

“음.”

천마는 턱을 쓰다듬었다.

마기에 휩싸인 모습 가운데 그러는 행동은 제법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면 막아낼 수 있는 고수가 현세에 몇이나 있을까.

주호 역시 전력을 다했지만, 과거 천하제일 고수의 무게를 증명하듯 단 한 번도 그 몸에 닿지 못했다.

신마와 다른 것이라면 비록 압도적인 격차일지라도 어떻게 패배하는지 눈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저 보인다는 것이지 그걸 메꿀 방도는 지금 단계에서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처음 싸울 때는 정말 네가 무황의 무공을 계승받은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예?”

“아니면 이 시대에서는 본좌가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 무공의 수준이 낮아졌던가 둘 중의 하나라 생각했지. 입신지경의 고수가 그리 약할 리 없지 않으냐.”

주호로서는 사뭇 충격적인 말이었다.

자신이 무황의 무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신승과 싸워 어느 정도 견뎌내었으며, 마교의 장로들을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고, 사흉수의 고수들과도 자웅을 겨루었다.

혼돈은 아직 결과가 보이지 않지만, 그 이외의 고수들 가운데 자신의 상대는 없을 터.

하지만 그것으로도 천마의 눈을 채울 순 없는 듯했다.

“무황, 녀석은 본좌와 처음 만났을 당시 네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싸움에서 지금의 신공을 완성했지. 본좌의 도움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경이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기존에 신공이라 불리던 것들과는 다른 한 차원 위의 수준이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도 그 정도 힘밖에 내지 못하느냐.

그 싸늘한 시선에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대련 부탁드립니다.”

“얼마든지.”

주호는 그렇게 그에게 다시 덤벼들었고, 그날 하루만 열일곱 번을 더 죽고 난 뒤에야 겨우 훈련을 종료할 수 있었다.

“…후우.”

비동에 들어온 지 한 달째.

밖은 괜찮을지 항상 걱정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 혈천신교의 군세가 이차 전선마저 무너뜨리고 중원을 장악하는 순간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뒤엉키게 했지만, 그는 힘껏 고개를 털어 다 떨쳐버렸다.

신마를 쓰러뜨릴 방법을 찾을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문제일까.”

슬쩍 고개를 들어 재단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무황을 바라보았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분위기다. 주호는 비동에 들어온 직후 이때까지 무언가 단서가 될 법한 것이 없을까 싶어 몇 번이고 비동을 샅샅이 수색했다.

발견한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리 유의미한 것들이 아닌바. 바닥에 털썩 드러누운 주호는 힘없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공은 무리 없이 발현되었다.

단전에 축기할 수 없는 문제도 해결되어 이전보다 더 폭발적이고 꾸준한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천마는 그리 말한 것일까.

“…모르겠군.”

도무지 궁리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자니 새카만 천장 위로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가르치는 제자들, 지인, 그리고 남궁연과 천우희까지.

짝.

뺨을 가볍게 두드린 주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수십 번의 싸움, 그것을 복기하는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을 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천마 위태무가 먼저 그에게 말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구나.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보자꾸나.”

“근본적인 문제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원(混元)이란 정도와 마도의 힘을 의미한다. 일극은 그것이 완전하게 합쳐진 중도를 뜻하지. 하지만 네 기운은 그렇지 않아.”

“그렇습니까?”

주호는 자신의 손 위로 떠오른 잿빛 기운을 바라보았다.

자연지기와 똑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생각을 눈치챈 천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닮은 것으로는 안 된다. 그 자체와 다름이 없어야 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거치는 이상 아무리 입신지경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자연지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소리인가.

“가능한 이야기다. 본좌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이니.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혼원일극신공의 이치는 겨우 이 정도가 아니거늘.”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결을 읊어 보아라. 혹시 그 부분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호는 곧 청룡신공, 혼원일극신공의 구결을 읊었다.

천마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그것을 들으며 다음에 나올 무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시작할 생각을 하지 않기에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마신공은?”

“예?”

“천마신공은 왜 읊지 않느냐. 본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무황 그 녀석이 전인에게 남기는 것을 허락했으니 어서 읊어 보아라.”

“음.”

그 말에 주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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